이한열 열사 부축했던 '그날의 기억'

이한열 열사 부축했던 '그날의 기억'

2017.06.10. 오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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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창 / 가람도서관 관장 (당시 이한열 열사 부축)

[앵커]
30년 전 1987년 6월 군부 독재와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이한열 열사. 그리고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기폭제가 됐었죠. 당시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부축했던 동갑내기 학생이 있었습니다.

사진으로 보셨을 텐데요. 30년 전 그날의 기억 직접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장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조금 전에 기념식 저희들이 보도해드렸는데 다녀오셨었죠?

[인터뷰]
다녀왔습니다.

[앵커]
아무래도 6월이면 더 많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이한열 열사 생각 많이 나시죠?

[인터뷰]
항상 6월이면 생각이 많이 나서 한 5월부터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하면서 6월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앵커]
지난 30년간 매번 6월이면 생각이 나셨을 텐데 올해 6월은 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어떠셨습니까?

[인터뷰]
그렇죠. 작년 촛불광장의 시민의 힘, 그걸 보면서 저희가 6월 항쟁 때 꿈꿨던 그런 나라가 조금씩 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서...

[앵커]
지금 저희가 지금 저희 스튜디오에 보이는 사진입니다. 저희가 영상으로 화면으로 보여드리면 좋을 것 같은데요. 바로 이한열 열사를 부축하고 있는 한 청년이 보일 텐데요. 바로 이 사진에 있는, 지금 부축하고 있는 이 청년이 바로 이종창 본인이시죠?

[인터뷰]
네.

[앵커]
당시 상황을 들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1987년 6월 9일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알리기 위해서 일단 학생들이 그때 연세대학교에 모인 거죠?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시죠.

[인터뷰]
그때 상황은 몇 년 전부터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가 있었고요. 그리고 한편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많은 집회, 시위들이 있었고 그런 시위들에 대해서 폭력적으로 탄압을 해왔었고 그런 과정에서 박종철 열사가 고문치사 사건으로 운명하게 되고 그리고 4월 13일에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는 호헌선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연세대학교, 많은 대학들이 그랬지만 연세대학교에서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규탄과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집회들이 있었고 6월 9일에도 연세대학교에서 그런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앵커]
그러면 이제 사건이 일어난 그 시간으로 좀 옮겨봐야 될 것 같습니다. 사진에도 보면 저희가 알 수 있지만 이한열 열사는 지금 쓰러져 있는 상태였고 이후 2, 3주 전이었죠. 외국 사진기사가 찍은 사진이 공개된 부분도 있는데 보면 주변에 학생들이 안 보입니다.

지금 이종창 관장님만 이한열 열사를 안고 있는 모습이 나오고 있는데요. 일단 왜 주변에 다른 학생들이 안 보였던 건가요?

[인터뷰]
그날 집회를 하고 그 다음날 있을 6.10국민대회를 알리기 위해서 정문 밖으로 나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한열이와 저는 학생들을 보호하는 사수대조에 속해 있었고요. 한열이는 정문 밖 한가운데쯤 있었고 저는 오른쪽 맨 끝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느때와 다르게 전경들이 폭력적으로 최루탄을 쏘면서 바로 진입해 들어왔고 그러면서 같이 뒤로 뛰어들어가는데 저는 맨 오른쪽에 있었기 때문에 맨 마지막에 뛰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최루탄을 하도 많이 쏘아서 앞이 잘 안 보일 상황이었는데 교문 안쪽으로 뛰어들어가는데 왼쪽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되돌아가서 보니까 한 학우가 쓰러져 있어서 경찰들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안고 학교 안쪽으로 옮기는 과정이었습니다.

[앵커]
옮기는 과정이었군요. 그러니까 지금 대부분의 학생들이 피하는 상황 속에서 너무 최루탄 연기가 심해서 앞을 보기도 힘든 상황에서 보니까 이한열 열사가 쓰러져 있었고 부축해서 옮겼고요.

다 아시겠지만 이후에 병원으로 옮기게 됐고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 어쨌든 숨을 거두게 됐는데요. 당시 이한열 열사와는 아는 사이였습니까?

[인터뷰]
아니요. 그 전에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앵커]
전혀 모르는 사이였고요. 그러면 이후에 병원에 있게 되면서 이한열 열사에 대해서 듣게 되면서 알게 된 거군요. 관계가 고향도 같았다는 것 같은데요.

[인터뷰]
그 이후에 저도 좀 다쳐서 중환자실에 한 5일 후에, 전경이 던진 돌에 뒤통수를 맞고 뇌골절, 뇌출혈로 응급실에 가서 수술을 두 번 받고 중환자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식을 찾고 났는데 한열이 어머님께서 들어오셔서 한열이하고 친구냐를 물어보셨는데 저는 친구가 아니라고 했고 나중에 차도가 좋아져서 일반 병실로 옮겼는데 기자분들이 취재하는 과정에서 고향도 같고 고등학교도 광주에서 학교는 다르지만 같이 나왔고 마침 또 재수를 했는데 둘 다 서울 종로학원에서 같이 재수를 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걸 가지고 기자분들이 절친한 친구사이였다고 기사화하면서 친구로 알려졌었던 것 같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 당시 다치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부축하고 가는 과정 속에서 전경의 돌을 맞으신 겁니까, 아니면 옮기고 난 후에 맞으신 겁니까?

[인터뷰]
한열이가 6월 9일에 그렇게 다치고 난 이후에 연세대학교에서는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가지고 계속 집회가 있었습니다.

[앵커]
대학교에서도 있었고 병원에서도 계속됐던 건가요?

[인터뷰]
같이 있었는데 6월 14일에 연세인궐기대회가 있었습니다. 궐기대회를 마치고 다시 그날은 복학생 형님들까지 다 동참을 해서 한열이를 살려내야 된다는. 한열이는 중환자실에 계속 있었고 그래서 정문으로 나가서 전경들과 공방을 벌이는 과정에서 전경이 던진 돌에 뒤통수를 맞게 됐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맞았을 때에는 약간 정신을 잃었다가 어지러움이 좀 느껴졌는데 만져보니까 피가 나지 않아서 제가 잘 몰랐던 거죠. 오히려 피가 안 나는 게 위험한 거라고 하는데 피가 안 나서 괜찮은 줄 알고 계속 공방을 벌이다가 중앙도서관 로비에 가서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이 중환자실, 응급실로 옮겨서 수술을 받게 됐습니다.

[앵커]
수술도 받으시고 뇌수술이면 큰 수술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쉽게 금방 회복되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 그러면 이한열 열사 사망 소식은 7월에 있지 않았습니까? 언제 듣게 되셨습니까?

[인터뷰]
일반 병실로 옮겨서 차도가 좋아져서 7월 5일에 퇴원하기로 주치의 선생님한테 얘기를 들은 상태였습니다. 7월 5일 새벽에 눈을 떴는데 병실 분위기가 다른 때와 달랐어요.

창가는 블라인드는 다 가려져 있고 뭔가 어머님이랑 친구들의 분위기가 좀 특이해서 어머님이랑 다른 데 관심을 두는 사이에 블라인드를 내려 보니까 전경들이 병원을 에워싸기 위해서 병원 주변으로 몰려오는 그런 상황을 보고 한열이가 운명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이한열 열사의 사진을 보면 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계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데 아직도 그 시계는 돌아오지 않은 거죠?

[인터뷰]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사촌 형님한테 누군가가 잠깐 얘기를 했다는데.

[앵커]
자기가 전해주겠다는 얘기까지 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죠?

[인터뷰]
그 이후에 진척이 없는 상황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앵커]
그래서 많은 추측이 그 학생도 아무래도 정권의 추적을 받지 않았을까, 경찰의 추적을 받지 않았을까 이런 추정도 있었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고 아직도 진척이 없는 상태고요. 그 당시 이야기를 해봤으니까요.

30년이라는 세월을 매 6월을 남들과 다르게 30년 전을 추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년마다 달라졌고 어쨌든 대통령 직선제. 6. 10항쟁을 통해서 이루어낸 그 직선제를 다 겪으셨을 텐데요. 그때 소회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인터뷰]
6월 항쟁을 통해 6. 29선언이라는 항복선언을 받아냈고 또 그 이후에는 7, 8, 9월 노동자 대투쟁, 농민들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6월 항쟁이 모든 우리 국민들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그런 투쟁이었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제일 힘들게 살았던 계층들도 노동자, 농민들도 자기들의 요구를 하고 뭔가 세상이 바뀌는 듯했는데 그해 겨울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 정권의 2인자인 노태우 씨가 대통령이 되는 걸 보면서 분노도 하고 좌절도 하고 그런 과정을 겪었었고요.

그 과정에 30년 동안 어떤 때는 나은 세상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오히려 퇴보하는 그런 경험을 할 때도 있었고 그러면서 항상 마음이 때로는 무겁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앵커]
그리고 나서 참여정부도 지나고 문민정부도 지나고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 시민이 촛불을 들고 나가는 그 일이 바로 지난해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촛불집회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한데요.

[인터뷰]
87년 6월 항쟁 때 많은 고민들이 있었지만 그런 고민 중에서, 그런 엄혹한 상황에서 청년 학생들이 선도적으로 투쟁을 하는 과정이었는데 결국은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참여, 시민들의 동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면서 87년 들어서면서 운동권 내에서 그런 논의들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때 구호가 대동단결 대동투쟁. 크게 모여서 힘차게 투쟁을 하자 그런 거였는데 그 과정에서 결국은 6. 10 국민대회를 계기로 해서 처음에는 구경만 하시던 시민들이 결국은 동참해서 같이 구호를 외치시고 학생들을 잡아갈 때 구해 주시기도 하시고 결국은 6. 29선언이 나왔는데 그러한 시민의 참여 그런 흐름이 결국은 작년 촛불 집회 때는 어느 계층의 선도 투쟁이 없이 모든 시민이 동시에 참여의 모습을 보인 거라고 생각이 들어서 상당히 발전한 모습이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앵커]
더 성숙한 시민의식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제 정권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을 갖게 됐는데요. 바로 오늘이고요.

기념사를 여러분과 함께 들어보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 함께 잠시 들어보시죠.

[문재인 / 대통령 : 역사를 바꾼 두 청년, 부산의 아들 박종철과 광주의 아들 이한열을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항쟁을 이끌어주신 지도부, 87년 뜨거운 함성 속에서함께 눈물 흘리고, 함께 환호했던 모든 분들께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드립니다.]

[앵커]
이 기념사 직접 현장에서 들으셨을 것 같습니다. 이한열 열사 이름이 읊어질 때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인터뷰]
울컥했죠.

[앵커]
전체적인 기념사는 어떻게 들으셨는지도 궁금한데요.

[인터뷰]
6월 항쟁 과정에서 저희가 꿈꿨던 그런 우리나라의 미래 그런 걸 그려볼 수 있는 기념사였던 것 같습니다.

[앵커]
미래를 말씀하셨는데 어떤 미래를 당시 꿈꾸셨고 그 미래는 어느 정도 실현이 됐다고 보십니까?

[인터뷰]
저는 개인적으로 민주화된 사회는 모든 사람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모든 사람이 행복한, 차별없이 그런 사회가 민주화된 사회라고 생각을 했는데 물론 작년 촛불광장에서 보여준 시민의 힘 그게 정권 교체로 이루어졌고 그런데 앞으로 일단 체제와 틀이 바뀌었지만 결국 내용적으로는 아직도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좋은 세상. 아직은 이제 시작이고 더 만들어가야 할 것은 우리의 과제인 것 같습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죠. 사진으로 봤던 이종창 청년, 이제 머리가 희끗하게 변하시고 벌써 세월이 이렇게 많이 지났는데 어쨌든 친구 한열이는 스물두살로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요. 친구에게 꼭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게 있으실까요?

[인터뷰]
작년 촛불광장을 보면서 그리고 오늘 기념식을 보면서 조금은 마음의 부담을 덜고 한열이에게 이만큼 왔다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앵커]
이만큼 왔다. 사실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다 주어진 과제인 것 같습니다.

[인터뷰]
그렇죠.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항상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관심과 시민들의 참여에 의해서 계속 더 나아질 뿐이지 완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정부도 잘해야 되겠지만 저희가 작년 촛불광장을 경험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시민들이 항상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필요할 때는 촛불광장처럼 행동으로 옮겨주고 그럴 때 우리 모두가 바라는 민주화된 사회가 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30년 전 그날의 기억 직접 스튜디오로 모셔서 들어봤습니다.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장과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인터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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