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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민주항쟁 30년] 동생 숨진 남영동 대공분실 찾은 박종철 형 종부씨 “촛불 이끈 젊은이들 자랑스러워”
-‘6ㆍ10 민주항쟁’ 상징된 고 박종철 친형 종부 씨 인터뷰
-“믿기지 않았던 죽음…경찰 압박에 화장한 것 한스러워”
-남영동 대공분실 찾아…“광장서 촛불 든 청년들이 종철이”

[헤럴드경제=김진원 기자]“욕조 안에 한 명이 들어가서 머리를 눌렀습니다. 다른 두 명이 양팔을 하나씩 잡았고요. 그 뒤에 또 한 명이 다리를 든 겁니다.”

축축하게 비가 내리던 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09호 조사실에서 만난 박종철 열사 친형 박종부(60) 씨는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대공분실의 불 꺼진 복도를 따라 조사실로 이어진 길은 어두침침했다. 을씨년스럽게 철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 뼘이 채 되지 않는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전부였다.

“여기를 찾을 때마다 매번 같은 심정입니다. 그 추운 날 혼자 끌려와 갇혀서 벌거벗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당했을 생각 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입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열사가 불법 체포돼 조사를 받다가 수사관들에게 고문ㆍ폭행을 당해 사망한 사건이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으나 언론ㆍ의학ㆍ종교계의 끈질긴 노력으로 진상이 밝혀졌다. 끔찍했던 군사독재시절을 끝낸 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생떼같던 동생 박종철이 무자비한 공권력의 손에 숨을 거둔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다. 현장에 들어설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지금은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는 친형 박종부씨가 현장을 둘러보며 30년 전의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대해 입을 열었다.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막내가 죽었다고? 죽기는 왜 죽어”=동생은 7살이나 어렸지만 어른스러웠다. 심지가 굳고 착한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이 정확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숨졌다는 사실을 박 씨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형사들이 급하게 부산에 연락해서 아버지를 기차로 모시고 올라왔습니다. 저는 다음날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고요. 아버지께서 ‘막내가 죽었다’고 하기에 제가 ‘죽기는 왜 죽어’했습니다. 아버지는 ‘이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하고는 펑펑 우시고 난리가 났습니다.” 박 씨는 말했다.

이어 희대의 망언이 나왔다. 동생이 숨진 다음 날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 열사 사망에 대해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박 씨는 “무슨 이런 어이없는 소리를 하나 하는 황당한 심경”이라며 당시를 돌이켰다..

이틀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동생의 시신은 경찰병원에 안치됐다. 지인들에게 부음을 전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부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부검 결과 물고문과 전기고문 흔적이 나왔다. 사방이 경찰에 둘러싸인 채로 회유와 압박에 못 이겨 화장했다. 임진강변에 뿌렸다. 박 씨는 화장을 막지 못했던 게 아직도 한스럽다고 했다. 

생떼같던 동생 박종철이 무자비한 공권력의 손에 숨을 거둔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다. 현장에 들어설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지금은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는 친형 박종부씨가 현장을 둘러보며 30년 전의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대해 입을 열었다.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가족의 막내에서 민주화의 상징으로=이후 언론의 의혹제기가 이어졌다. 경찰은 마지못해 물고문 사실을 시인했다.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를 구속했다. 민심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김종호 당시 내무부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해임했다.

전국의 교회, 성당, 사찰에서 박종철 군 추모 예배와 법회가 열렸다. 노동계와 학생은 추모 집회를 열었다. 김대중ㆍ김영삼 민추협공동의장은 박종철 추모대회를 개최키로 합의했다.

이즈음 한 대학교에 붙은 대자보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담고 있었다.

“끔찍한 탄압도 서슴지 않았던 저들은 다시 한번 박종철 학형에 대한 고문살인을 자행함으로써 민족민주운동 전반에 대한 살인행위를 저질렀다. 제2의 박종철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고문살인행위를 공공연하게 자행하면서 기존의 체제유지를 위해 발악하고 있는 군사파쇼정권을 분쇄해야만 한다.”

넉 달 뒤인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경찰의 조직적 은폐를 폭로했다.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대공 간부들이 사건을 축소했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라는 내용이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이 참여한 대책회의가 은폐ㆍ조직에 관여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거세진 시민들의 투쟁은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5월 26일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정호용 내무부장관, 김성기 법무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등 권력 내 핵심인물들에 대한 문책인사를 단행했다. 민주화 투쟁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결국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한 헌법 개정을 쟁취했다.

생떼같던 동생 박종철이 무자비한 공권력의 손에 숨을 거둔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다. 현장에 들어설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지금은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는 친형 박종부씨가 현장을 둘러보며 30년 전의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대해 입을 열었다.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박종철 누군지 아니?” 잊혀져 가던 동생=박종철 열사는 세월에 묻혀 가는 듯했다. 동생이 목숨을 걸고 지켜냈던 선배는 한나라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함께 학생ㆍ노동운동을 하던 이들은 변절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박 씨의 손을 잡고 “그들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가 정기적으로 선정하는 ‘박종철인권상’ 수상자들끼리 “너희 박종철이 누군지 아니?”라고 서로 묻는 ‘웃픈’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박 씨는 “젊은이들이 예전같지 않구나. 현실 참여 의식도 결여돼 있고 자기 앞가림 하기 바쁘구나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박 씨의 생각은 지난 일련의 촛불집회를 보면서 바뀌었다.

“제가 비록 개근은 못했어도 촛불집회 거의 다 참석했습니다. 유모차 끌고 나온 아주머니,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의 가족 3대들이 인상 깊었죠.”

이어 박 씨는 “특히 젊은 세대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작년 촛불이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들이 젊은 세대들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자기들뿐 아닌 나라의 앞가림도 확실하게 할 세대라는 자부심 내지 자긍심이 생겼습니다”라고 말했다.

생떼같던 동생 박종철이 무자비한 공권력의 손에 숨을 거둔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다. 현장에 들어설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지금은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는 친형 박종부씨가 현장을 둘러보며 30년 전의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대해 입을 열었다.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박 씨는 다만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너무 ‘업’ 돼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내비쳤다.

“여기저기서 촛불혁명의 승리다. 이런 말들을 하는데 너무 성급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정권들에서 어질러 놓은 일들, 엎어놓은 일들이 워낙 많지 않나. 그것들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것만 해도 힘든 일이지 않겠습니까. 조금 더 차분해질 필요가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 지난해부터 올해의 정권교체까지 이어진 과정을 어떻게 봤을까.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청년들이 종철이와 다를 게 없을 겁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블랙리스트 없는 세상. 청년이 희망을 가질 수 있고, 힘없는 농민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나라. 동생도 100% 그런 생각이지 않을까요.”

jin1@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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