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항쟁' 30주년]"6월과 촛불, 한길입니다"

최미랑 기자 2017. 6. 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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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이한열 열사를 부축했던 이종창씨가 회상한 ‘그날’
ㆍ“한열아, 난 잘 살고 있는 걸까…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프다”

30년 전인 1987년 6월9일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열사(당시 경영학과 2학년)를 이종창씨(당시 도서관학과 2학년)가 일으켜 세우고 있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 네이선 벤이 정문 앞 굴다리 위에서 이 장면을 촬영해 6월항쟁 30주년을 앞두고 최근 이한열기념사업회에 제공했다. 네이선 벤 제공

1987년 6월9일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경찰 최루탄을 맞고 숨진 이한열 열사 사건은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당시 쓰러진 이 열사를 부축했던 이종창씨(51·파주 가람도서관 관장)를 인터뷰해 회상기로 재정리했다.

‘시린 계절.’ 누군가 ‘6월은 어떤 느낌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거 같습니다.

30년이 흘렀습니다. 그날은 느낌이 좀 달랐습니다. 1987년 6월9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민주광장 집회에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하루 뒤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여는 ‘6·10 국민대회’(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나가려 했습니다. 전투경찰이 막고 있었죠. “독재 타도!” “호헌 철폐!” 학생들은 정문 앞으로 나와서 네 마디 구호를 물결 타듯 외쳤습니다.

그날도 ‘백골단’(시위대를 검거하기 위해 구성된 사복 경찰단)이 보였습니다. 전경과 백골단은 학생들을 진압할 때 보통 최루탄을 쏘고 조금 기다렸다가 정문 안으로 밀고 들어오곤 했죠. 하지만 그날은 최루탄을 쏘자마자 바로 뛰어들어왔습니다. ‘아, 오늘은 다른 때보다 심하게 진압하는구나.’ 느낌이 왔습니다. 바로 앞쪽으로 가서 화염병을 던지고는 뒤돌아 뛰기 시작했죠. 화염병이나 돌을 던져 다른 학생들이 도망갈 시간을 버는 것이 제가 속한 이른바 ‘소크조’의 역할이었거든요. 저는 주로 학교 밖에서 볼 때 정문 왼쪽을 담당했습니다.

정문 기둥을 지나 학교 안쪽으로 뛰어들어갈 때였습니다. 최루탄 연기로 시야가 온통 뿌연데 왼쪽에 뭔가 사람 같은 게 보였어요. 뛰느라 지나쳤다가 혹시나 해서 다시 돌아서 가 봤죠. 한 학생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시야가 너무 흐려 누군지 판단할 상황은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 학생이 전경들에게 잡히지 않도록 빨리 안전한 곳으로 끌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어디쯤 오나’, 백골단의 움직임을 계속 돌아보면서 쓰러진 이를 끌고 학교 안으로 들어왔죠.

한참을 끌고 올라와 테니스장(현재 공학관) 근처까지 왔을 때였습니다. 마스크 안으로 최루가스가 들어와 속은 메스껍고 기운은 빠질 대로 빠졌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가까스로 버티는데 학생 두 명이 이쪽으로 뛰어오는 게 보였어요. 그 순간 저는 정신을 놓고 쓰러졌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눈을 떠서 보니 저 혼자 누워 있었습니다. 다친 사람은 다른 이들이 옮긴 듯했습니다. 제가 부축해서 온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른 채로 저는 다시 나가서 전경들과 싸웠습니다.

이때까지 한열이와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한열이는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에, 저는 도서관학과 2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한열이는 전남 화순, 저는 전남 영광 출신으로 고향이 가깝고, 대입 재수 시절 광주에서 둘 다 종로학원을 다녔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그날 그렇게 누군지도 모른 채 한열이와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그날 싸움은 길었습니다. 학내 정리 집회에 가니 우상호 당시 총학생회장(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열이가 많이 다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수술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집회를 끝낸 뒤 경찰의 습격에 대비해 한열이의 병실을 지켰습니다. 다음날 낮에는 6·10대회에 나갔는데, 명동성당까지 가서 농성을 계속하다 저녁에는 다시 세브란스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시청 앞에서 최루가스를 뒤집어쓰고 씻지 못한 채 병원에서 밤을 보냈더니 화상을 입은 자리의 물집이 터졌어요. 총궐기 집회가 있던 14일에는 비가 왔는데 허물이 벗겨져 어찌나 따갑던지요.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 게 있어요. 그날 연세대 안에서 전경과 학생들의 충돌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즈음이었죠. 뒤통수에 돌을 맞고 넘어지면서 뒤를 돌아보니 청바지에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흰색 ‘화이바’를 쓴 백골단이 막 돌을 던진 자세로 서서 나를 보며 웃고 있었어요. 학생들과 매번 서로 돌을 던지곤 했는데 나를 맞혔으니 통쾌했던 것 같아요. 잠깐 정신을 잃었다 깼는데 뒤통수에는 혹만 좀 나 있고 피는 안 나는 거예요.

그게 더 위험한 걸 그땐 몰랐습니다. 어지럼이 가시기에 다시 돌을 던지고 하다가 비가 오기 시작하자 얼굴이 따가워져 후배들과 같이 비를 피하러 중앙도서관 로비로 갔죠. 그곳에서 소파에 앉으면서 바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1987년 6월9일 서울 연세대 정문에서 경찰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부축했던 이종창씨가 지난 5일 연세대 내 이한열 열사 기념비를 쓰다듬고 있다. 기념비에 새겨진 ‘198769757922’는 이 열사가 쓰러진 1987년 6월9일, 사망한 7월5일, 장례식 날인 7월9일, 22세이던 당시 나이를 의미한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눈을 뜨니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이었습니다. 뇌골절·뇌출혈로 수술을 받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시골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와 계셨어요. 그때 한열이 어머님(배은심 여사)이 오셔서 ‘옆에 한열이가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좀 있으니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재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을 때 전 이제 죽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구나.’ 의외로 차분해졌습니다.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든 때였습니다. 선배 한 분은 제가 며칠 전 진로 상담을 하다 ‘아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어딘가 아파 며칠 병원에 입원했으면 좋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오셔서 엉엉 울더라고요.

다행히 수술은 잘됐습니다. 일반병실로 옮겨 몸을 회복하는 동안 내 병실은 우리 학과 사람들의 학회실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친구와 선후배들은 가두시위에 나갔다가 병실에 찾아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얘기해주고, 자기들끼리 토론도 하다가, 다시 깃발을 들고 나가곤 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 모습을 쭉 지켜보셨지요.

퇴원예정일이던 7월5일 새벽, 눈을 뜨니 병실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창문에는 바깥이 안 보이게 블라인드를 다 내려놓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 물어도 다들 ‘별일 아니다’라고 답하면서도 자꾸 창가로 못 가게 하더라고요. 친구들이 방심한 틈을 타 창문을 열어보니 어둠이 막 걷히는데 진한 녹색 옷을 입은 전경들이 뚜벅뚜벅 병원을 에워싸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어요. 아! 알아버렸지요. ‘한열이가 운명했구나.’

눈물을 흘리면서 한열이 병실에 가보겠다고 했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은 안정을 찾아야 한다며 며칠 더 입원할 것을 권했습니다. 학생들이 경찰의 한열이 시신 탈취를 막기 위해 스크럼을 짤 때는 환자복을 입고 옆에서 함께했습니다. 그렇게 퇴원한 날이 한열이의 5일장 마지막 날이었어요. 뇌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돼 빵모자 같은 것을 쓰고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 때 저는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시민들이 저희 동네로 피란 온 기억이 있는데, 그땐 무슨 일인지 전혀 몰랐지요. 고등학교 때는 광주로 유학을 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몰래 시위를 하러 가는 우리 반 아이들이 ‘빨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도 잘 안 사귀고 조용히 공부만 했어요. 도서관학과로 진학한 것은 ‘평생 책 속에 파묻혀 사는 것도 괜찮겠다’ 하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였어요.

어려운 가정형편에 큰형님은 중학교를, 작은형님은 고등학교를 나오셨고 막내아들인 저만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형님들의 도움으로 대학 다니면서 고민이 컸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해야 돼’라는 압박감이 들었지만 대학에서 광주의 진실을 접하면서 ‘이 사회를 바꾸려면 청년·학생들이 주도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학생운동에 ‘투신한다’는 표현을 썼지요. 개인의 삶을 뒤로하고 민주화와 평등사회 건설에 그야말로 ‘삶을 던지는’ 일이었습니다. 엄청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었죠. 옳은 일인 것을 알고 나서도 고민이 컸습니다. 1986년 입학해 선배들이 희생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처음에는 구경만 하다가 나중에는 스크럼도 짜고, 돌도 던지면서 조금씩 조금씩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어요.

6월항쟁은 한편으로 승리의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아, 이렇게 사는 게 정말 보람 있구나’ 하고 확인시켜준 계기도 됐고요. 6월항쟁을 통해 열린 광장에서는 그해 7~9월 억압받고 착취받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사회가 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노태우가 대통령이 돼 기대는 좌절되고 말았지요.

저는 내성적이고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학생회장 같은 것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죠. 그런데 어쩌다보니 계속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이 생겼습니다. 4학년 때는 주변에서 ‘지금은 머슴형이 대세’라면서 제게 문과대 학생회장에 출마하라고 부추겼어요. 말주변이 없어 유세를 잘 못해서 어렵게 당선됐습니다.

졸업 후에는 2년간 숨어다녀야 했습니다. 1990년 여름 ‘조국통일 촉진그룹 사건’에 연루돼 수배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노동운동을 계속할지, 도서관 일을 할지 고민했는데 수배령이 떨어지자 선택지가 없어졌습니다. 숨어지내는 동안 형사가 저희 가족과 친구, 친척을 계속 찾아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대구와 부천의 공장에서 밀링, 선반, 센타레스 가공, 프레스, 용접 같은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시골 촌놈’이라, 일을 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있었습니다. 일을 빨리 배운다고 칭찬도 많이 받았지요. 하지만 결국 적응은 잘 못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과 다 흩어져 고민을 나눌 상대도 없었고, 수배 생활이 끝날 무렵엔 몸도 마음도 많이 망가졌습니다.

더 이상 경찰이 저를 찾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살할 생각이 들 정도로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낮은 학점으로는 취직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때 떠오른 것이 난곡주민도서관이었어요. 책을 매개로 빈민 지역에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운동이었는데, 학교에 다닐 때 학과 선후배들이 서울 신림동에 이 도서관 개관을 준비해서 운전도 해주고 일을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제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았지요. 그렇게 1992년 다시 서울로 돌아와 도서관을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됐습니다. 모교 연세대에서 20여년을 사서로 일했고, 지금은 파주 가람도서관에 관장으로 있습니다.

아직도 한열이와 대학 시절의 활동과 관련된 것들이 제 의식 속에 많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촛불집회에 나갔다 온 밤은 옛날 생각들이 연결되면서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잠에 들면 옛날 수배 시절 쫓기던 꿈을 꾸기도 합니다.

매년 6월이면 한열이를 추모하는 자리에 나갔습니다. 한열이 가족을 뵐 때 가장 마음이 힘듭니다. 한열이와 나는 뜻을 같이했고, 함께 중환자실에 있었는데… 저는 살아서 나왔잖아요.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나는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이런 물음이 지난 30년 동안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6월항쟁 그리고 한열이 30주기를 맞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렇게 언론 앞에 나왔는데도 이 이야기는 여전히 쉽지 않네요.

집에서 딸들에게 정치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때와 달리 학교에서도 6·10항쟁을 자연스럽게 배울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2002년 미선·효순 촛불집회 때는 다섯 살, 여섯 살이었던 딸들을 데리고 나갔지만 아마 기억은 잘 못할 겁니다. 쓰러진 한열이를 안고 있는 사진 속 사람이 저라는 것을 딸들은 할머니를 통해 알았다고 해요. 대학 시절 고향 집에 갈 때마다 ‘데모하지 마라’ 하시던 어머니는 제가 다쳤을 때 병실에서 6월항쟁의 과정을 고스란히 보시면서 자식이 하는 일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레 아셨던 것 같아요. 한열이를 부축하는 제 사진을 따로 챙겨두었다가 6월이 되면 꺼내어 딸들에게 보여주곤 하셨다고 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집회가 이어질 때 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큰딸은 촛불집회에 같이 나가자고 하더라고요. 작은딸도 따라나서면서 온 가족이 함께 갔습니다.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됐습니다. 평화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축제에 가까운 분위기가 생소해서요. 생각하면 놀랍습니다. 1980년대에는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청와대 주변까지 진격하려고 수년을 싸워도 가까이 가지를 못했는데, 이번에는 평화적으로 청와대 앞까지 갔잖아요.

한국의 미래를 낙관하느냐고요? 예. 그렇습니다. 지난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이전만 해도 절망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전 세계가 보수화되는데 우리나라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닌가 했죠. 그러나 수많은 촛불을 보면서 ‘아, 우리 현대사는 좀 다른 경험이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촛불광장이 우리 민주주의가 발전해 나가는 큰 힘이 됐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외부로부터 주어진 민주주의 체제에 내용을 담아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그 길에 4·19가 있었고, 5·18이 있었고, 6·10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6월항쟁 30년 후에 촛불이 있었습니다.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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