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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의 金錢史]향신료 무역이 탄생시킨 최초의 보험

입력 : 2017-06-02 17:34:44 수정 : 2017-06-02 17:3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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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원정 후 동서 교역 활성화…향신료·무기·사치품 등 거래

해적·해난사고 등 위험 ‘가득’…해상보험 태어나
보험은 예측하지 못한 위험으로부터 사람과 기업의 재산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보험의 존재로 기업가는 리스크에 대비할 수 있게 됐으며 이는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최초의 보험은 향신료 등 동서 교역의 활성화로 인해 태어난 해상보험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우리는 천민자본주의, 황금만능주의 등의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돈을 숭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정확히는 돈이라 불리는 종이쪽지를 숭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돈’과 ‘경제’란 단어에 목을 매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한낱 종이쪽지에 지배당하고, 그 종이쪽지에 사회 전체가 얽매여 신음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을까? 세계파이낸스는 [안재성의 金錢史] 시리즈를 통해 돈과 금융의 역사에 관해 짚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전술했듯이 은행의 탄생은 상업과 경제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됐다. 은행 못지 않게 경제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 것이 '보험'이다.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다양한 리스크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지진, 화재, 태풍 등 천재지변이 일어나 소유한 건물이 유실되거나 배가 침몰할 수 있다. 도적을 만나 전 재산을 털리기도 하고 거래 상대방이 돈을 떼먹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이런 위험이 닥칠 때마다 기업이 파산하면 기업가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도 손실이 매우 크다. 한진해운의 사례가 보여주듯 사라진 기업의 빈 자리를 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험은 그런 리스크를 획기적으로 해결해줬다. 평소에 약간의 보험료를 내는 대신 예기치 않게 막대한 손해를 입었을 때는 보험사로부터 보험금을 받아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기업가들이 안심하게 경영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물론 국가경제에도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왔다. 보험의 탄생은 경제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생명보험 시장 규모가 손해보험보다 2배 이상 크다. 하지만 본래 보험은 위와 같이 기업의 리스크를 축소시키기 위한 손해보험으로 출발했다. 특히 근대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보험은 해상보험이었다.

◇새로운 시장을 연 십자군 원정

십자군 원정은 크리스트교도들이 그들의 성지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일으킨 광신적인 전쟁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서유럽에서 중근동까지, 이역만리 먼 곳으로 수만 명의 군대가 원정을 가는 것은 어지간히 뜨거운 신앙심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이 단지 수백 년에 걸친 크리스트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전쟁 및 서양 세력이 200여년 간 중근동을 지배한 역사만 남긴 것은 아니다.

십자군 원정에 의해 정치적으로는 로마 교회의 권위 추락을 일으켜 르네상스 시대로 가는 길을 열었다. 또 경제적으로는 신앙심보다 이익을 중요시하는 상인들에게 새로운 시장 개척의 기회가 됐다.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해상상인들은 1차 십자군 원정부터 십자군과 계약을 맺었다. 제해권 장악으로 십자군을 지원하는 동시에 식량, 무기 등도 보급해주는 대신 십자군이 정복한 도시에서 자유로운 상행위를 보장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원활한 상행위를 위해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특별구역도 얻어냈다.

상인은 언제나 새로운 시장 개척에 민감한 법이다. 십자군 원정은 이탈리아 해상상인들에게 동방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열어줬다. 그들은 이 탐스러운 먹이에 앞다퉈 뛰어들었다.

이 때 동방에서 서방으로 수입된 물품 중 최고의 인기를 끈 품목은 향신료였다. 후추, 계피, 생강 등의 향신료를 고기 요리에 첨가하면 맛이 월등히 좋아진다. 고기가 주식인 서양인들은 향신료에 열광했으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밖에 모슬린 천으로 만든 고급 의류, 페르시아 융단, 공예품 등 주로 사치품들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흘러갔다. 반면 서방이 수출한 상품은 식량, 목재, 철 등 주로 생필품들이었다. 서양의 기술이 월등한 갑옷 등은 아예 완제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해상상인들은 심지어 인신매매까지 했다. 크리스트교는 같은 크리스트교도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교도에 대해서는 규제가 없다. 이탈리아 해상상인들은 유럽에서 아직 크리스트교도를 믿지 않는 지방의 노예들을 사서 이슬람교도에게 팔았다.

이렇게 팔려간 노예 중 여자 노예는 하녀가 되거나 하렘으로 들어갔으며 남자 노예는 대부분 군대에 편입됐다. 중동 지역은 어마어마한 땅 넓이에 비해 전통적으로 인구가 적은 편이다. 외국에서 젊은 남자를 사 와 이슬람교로 개종시킨 뒤 군인으로 써먹는 것은 옴미아드 왕조 시절부터 흔한 일이었다.

이는 명백한 이적행위다. 그러나 이탈리아 해상상인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돈 앞에서 도덕이나 신앙심 따위는 빛이 바래진다. 그것이 돈의 위력이다.

그리고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았다. 중동의 상인들도 자기 땅을 침략한 이교도와 거래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오직 거기서 얻어지는 쏠쏠한 수익에만 집중했다.

이리하여 한 쪽에서는 피를 흘리는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다른 쪽에서는 상인들이 다양한 물품을 거래하는, 다소 기이한 관계가 수백 년간 지속된다.

◇해상보험의 탄생

이처럼 동서 무역은 서로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겼다. 그러나 모든 기업 경영이 그렇듯 꼭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해상 교역은 몹시 위험했다. 당시 나무로 만든 갤리선이나 범선은 오늘날의 배보다 훨씬 풍랑에 약하다. 일기예보도 없던 시절이다.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하거나 크게 파손되면서 상품을 전부 잃어버리는 사고가 종종 일어났다.

리스크는 해난사고만이 아니었다. 근대 전 지중해는 해적의 소굴이었다. 놀라운 일은 이 시기 이탈리아 해상상인들의 배를 노리는 해적이 이슬람교도뿐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 해양도시 중에서도 특히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던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상선단만이 아니라 전업 해적선단까지 운용했다. 자국 배만 제외하고 타 유럽국가의 배들은 언제든 습격해 노략질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자국 정부에 약간의 세금을 내는 것만으로 이런 범죄행위가 용인됐다.

유난히 재수 없는 상인은 중근동의 전쟁에 휘말려 전 재산을 빼앗기기도 했다. 자연히 늘 이런저런 위협에 시달리는 상인들은 대책을 원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해상보험이다. 당시 최고의 자본가는 곧 해상상인이었기에 보험료를 낼 능력은 충분했으며 해상보험은 짧은 시간에 대성행했다. 큰 항구마다 전업 보험사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주인공 안토니오는 친구 바싸니오를 위해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으로부터 큰 돈을 빌렸다. 안토니오는 빚을 갚지 못할 시 자신의 심장에 가장 가까운 살 1파운드를 주기로 약속했다.

안토니오는 동방으로 보낸 무역선이 무사히 돌아오면 어렵지 않게 빚을 갚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무역선이 침몰하면서 안토니오는 파산하고 만다.

그 뒤 안토니오와 바싸니오의 아내가 재판관으로 변장해 “살만 떼어가되 피는 흘리게 하지 마라”는 판결을 내린 것은 희곡 특유의 통쾌한 이야기다.

그러나 당대의 베네치아인들은 주변에 안토니오같은 사람이 있을 경우 “어처구니없을 만큼 무모한 인간”이라고 칭하며 거래를 꺼려했을 것이다. 자신의 살 1파운드를 담보로 내미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동방으로 무역선을 보내면서 해상보험조차 가입하지 않은 무모함 때문이다.

실제로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 대부분의 해상상인들은 해상보험을 통해 이런 위험을 피하곤 했다. 해상보험은 상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서기 1291년 중근동의 십자군 최후의 거점 아크레가 맘루크 왕조의 이집트군에게 함락되면서 ‘십자군 시대’는 끝을 맺지만 그 후에도 동서 무역은 멈추지 않았다.

아크레 함락에 화가 난 로마 교황이 이슬람교도와의 교역을 금지하면서 일시적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곧 그마저도 교활한 편법으로 극복했다. 이집트가 중근동에 ‘소 아르메니아’라는 작은 나라를 만들어준 것이다.

소 아르메니아는 사실상 이집트의 위성 국가였으나 겉으로는 엄연히 크리스트교 국가였다. 덕분에 이탈리아 해상상인들은 크리스트교도끼리의 무역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근동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 아르메니아 내에서 이슬람교도들과 신나게 장사를 한 것은 물론이다. 이집트가 이 소국을 내버려둔 것도 서방과의 교역에서 떨어지는 쏠쏠한 수익 때문이었다. 역시 돈에 대한 탐욕은 신앙심보다 강했다.  

그리하여 동서 교역과 이를 지탱하는 해상보험은 계속 번창했다. 당연히 보험사도 꽤 돈을 잘 벌었기에 보험사 경영자들은 화재보험, 지진보험 등 새로운 상품을 거듭 출시했다.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보험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나 수없이 많은 종류의 보험상품이 존재하는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세계파이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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