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일상을 바라보는 열 개의 시선

입력 2017. 5. 30. 03:24 수정 2017. 5. 30.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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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일상이지만 우리의 삶은 이를 통해서야 가능
모처럼 회복된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날들이 되기를
이건용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일상은 광장의 집회처럼 감격적이지 않다. 일상은 시시하다. 광장에 모인 수십만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칠 때, 내 마음이 그 많은 마음으로 확장되는 듯한 감동에 사로잡힌다. 때로 하늘까지도 열리는 듯, 벅찬 믿음도 생긴다. 이런 감격과 믿음이 있어 맨몸으로 탱크를 가로막아 서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그 마음들은 닫혀 있다. 같은 마음들이 주차 문제로 싸우고 뒷담화를 둘러싸고 서로 눈을 흘긴다.

일상은 잔치가 아니다. 잔치에서 우리는 베풀고 대접받는다. 낯선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거지들도 배불리 먹게 해준다. 주인은 무리를 해서라도 넉넉히 내고 손님들은 십시일반 비용을 보탠다. 그러나 잔치가 끝나 일상으로 돌아가서는 계산을 해본다. 과했다 싶으면 마음이 쓰리다. 일상은 쫀쫀하다.

일상은 여행이 아니다. 여행에서와 같은 홀가분함이 일상엔 없다. 여행자가 되어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면 좋다. 거리를 두고 보면 삶의 자잘한 모습은 정겹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무심히 바라볼 수 없다. 그럴 틈도 없다. 바쁘다. 약속과 할 일 사이에서, 몸이 분주하지 않아도 무슨 일엔가 항상 매어 있다는 의미에서 바쁘다.

일상은 시(詩)가 아니다. 순수하지도 충만하지도 않다. 시적인 순간에 비하면 하루하루 삶에 목을 맨 나의 일상은 비루하다. 하긴 메마른 삶에도 잠깐 시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난데없이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문득 오래전부터 끊어진 일기장을 다시 펼치기도 한다. 지평선 너머를, 혹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광막한 공간과 아득한 시간 속에서 덧없는 나의 시공간을 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시심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 밥을 위해 우리는 시를 잊어야 한다.

일상은 고되다. 고된 일들의 반복이다. 매일의 일을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거리에서 한다. 운동선수나 음악가의 일상은 반복으로 채워져 있다. 같은 동작을 수백 번 한 결과가 체조선수의 연기고 같은 패시지를 수천 번 반복한 결과가 피아니스트의 연주다.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는 잠깐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멋진 동작이고 황홀한 소리이지만 그 빛나는 순간은 일상의 고됨을 통해 이루어진다.

시시하고 비루하고 고되지만 우리는 일상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여행에서 돌아와 주민등록도 하고 세금도 내야 한다. 실은 그래야 광장에도 나가고 대통령선거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을 통해 산다. 일상을 부정하거나 망가뜨린다면 그것은 위대한 혁명도 고결한 시도 아니다.

일상의 의미는 그것을 상실한 후에 가장 쉽게 안다. 편도암 수술을 받은 후 한 목사님이 말했다. “수술 후 물 한 숟가락 삼키는 데 5분 걸렸습니다. 그때 알았죠. 물 한 모금을 시원하게 마실 수 있으면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고요.”

‘우리 읍내’(손턴 와일더 작)는 1막과 2막에서 우리 삶의 소소한 일상을 보여준다. 2막에서 결혼을 하는 여주인공 에밀리는 3막이 열리면 젊은 나이에 죽는다. 그는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무대감독에게 애원해서 그는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 본다. 열두 살 나던 해의 자기 생일, 일상은 언제나처럼 돌아가고 있다. 보고 싶었던 이승의 사람들에게 에밀리는 말해주고 싶다. 지금 이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물론 될 일이 아니다. 이승의 사람들과 자신의 간격을 절실히 느끼고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며 그는 독백한다. “안녕. 이승이여. 맛있는 음식도, 커피도, 새 옷도, 따뜻한 목욕도, 잠자고 깨는 것도. 아, 너무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이승이여, 안녕.”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혹한의 강제수용소에 갇힌 이반은 한 조각의 빵을 소중히 씹으며 옛일을 후회한다. “그렇게 감자를, 고기를 마구 먹어대는 것이 아니었다. 음식은 그 맛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어야 하는 법이다. 입안에 조금씩 넣고, 혀끝으로 이리저리 굴리면서, 침이 묻어나도록 한 다음에 씹어야 한다.”

한 육 개월 만에 이 나라에 일상이 회복된 듯하다. 모처럼 일상을 느끼니 신선하다. 우리가 이 하루하루를 “소중히 그 맛을 음미하면서” 사는 것은 언제까지일는지.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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