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도로명주소, '폭탄 돌리기' 20년

이충일 도시·교통 전문기자 입력 2017. 5. 30. 03:14 수정 2017. 5. 30.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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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일 도시·교통 전문기자

전부터 주변에서 "이것 좀 칼럼으로 써보라"고 해온 사안이 있다. 도로명주소 문제다.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장황하게 따져봐야 '불편하다' '적응 안 된다'는 불평으로 가득한 인터넷 댓글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이제라도 집어치우자"고 하기에는 사실 너무 멀리 왔다. 도로명주소는 어느새 '국민적 계륵'이 돼버렸다. 그러니 그 과정이라도 들여다보기로 했다.

많은 사람이 이 사업을 '이명박 정부가 시작해 박근혜 정부가 시행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꽤 긴 역사가 있다. 21년 전 청와대 국가경쟁력강화기획단의 제안을 김영삼 대통령이 내무부에 지시하면서 출발한 일이다. 당시 서울 강남구 등 전국 6개 시·구에 시범사업을 바로 맡겼을 정도로 신속하게 추진됐다. 그러나 법이 제정된 것은 10년이 지난 2006년이고, 실제 시행된 것은 다시 8년이 지난 3년 전의 일이다. 요약하면,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시들하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 겨우 재점화돼 박근혜 정부가 일단락시켰다.

2014년 1월 14일 판교신도시에 설치된 새 도로명 주소 안내판들. 동 이름이 사라진 상태에서 주민 민원에 밀려 길 이름마다 '판교'를 넣다 보니 오히려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지적이 나왔다. /조선일보 DB

그동안 내무부 이름은 행자부·행안부·안행부를 거쳐 다시 행자부가 됐고, 장관만 18명이 거쳐 갔다. 담당했던 실장·국장·과장과 직원도 무수하다. 행자부 주소정책과는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 기피 부서이다. 한때 이 업무를 맡았던 간부는 "되도록 표나지 않게 살살 다루다가 후임자에게 인계하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일종의 '폭탄 돌리기'였던 셈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결코 정열적이지는 않았다. 돌리다가 돌리다가 도화선이 다 타가는 폭탄을 안게 됐을 뿐이다. "동(洞)과 아파트 이름이 사라지면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자 괄호를 써서 추가하게 하는 등 시행 전에 다섯 차례나 법을 고칠 정도로 사실은 수동적이었다.

도로명주소의 애초 목적은 국민 생활 편의 도모, 물류비 절감, 그리고 국가 경쟁력 강화이다. '지번(地番)은 일제 잔재'라는 비공식적 이유도 달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대부분 국민이 불편해하고, 물류비와 국가 경쟁력은 어떤 논리로 절감되고 강화되는지 여전히 아리송하다. 오히려 지름길까지 순식간에 찾아내는 최고 수준의 내비게이션 앱이 일반화되면서 "집을 쉽게 찾아 준다"던 최대 명분조차 머쓱해진 지 오래다. 도로명주소는 지금도 주로 공기관이 이용할 뿐, 민간의 활용도는 낮다.

반발이 사그라질 리 없다. 최근 경기도의회는 "도대체 위치를 짐작할 수 없으니 동(洞)·리(里)를 병기하자"고 요구하고 나섰다. 일각에선 "기존 주소가 그렇게 어렵다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택배와 배달의 나라가 됐겠느냐"는 비아냥거림도 나온다. 몇 해 전에는 전(前) 문화부 장관 등 63명이 "헌법에 명시된 전통문화 보존 의무에 반한다"며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정부의 자의적·편의적 법률이란 것이다. 등기부와 논·밭의 주소, 원룸이나 다가구주택 등 미해결 난제도 허다하다.

문제는 앞으로다. 전국 수십만 개 도로에 명판을 붙이고, 수백만 개 건물에 번호판을 달아주는 등 총 5000억원이나 쓴 것은 부차적 문제일 수 있다. 진짜 문제는 불만과 모순으로 가득 찬 이 폭탄이 아직 터지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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