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저장 강박증'이 뭐길래..아들 잡은 쓰레기더미

송락규 입력 2017. 5. 29. 15:44 수정 2017. 5. 2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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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28일) 서울 노원구의 한 주택에서 "아들이 심하게 다쳤다"는 신고가 소방당국에 접수됐다. 곧이어 현장에 도착한 경찰과 119구조대원들은 경악했다. 대문 앞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쓰레기더미 때문에 집안으로 진입하기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문을 열고 사람 키만 한 쓰레기더미들을 기어오른 119대원들은 마당 한편에 나뒹굴고 있는 또 다른 쓰레기더미를 발견했다. 더미 속에는 강 모(46) 씨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쓰레기더미를 한쪽으로 치우고 응급조치를 했지만, 강 씨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경찰 조사 결과 강 씨는 가스 정기 검침일을 앞두고 계량기 앞에 있는 쓰레기더미들을 치우려다 변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강 씨의 70대 어머니 A 씨도 당시 마당에서 쓰레기더미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아들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그제야 사고가 난 것을 깨닫고 신고한 것으로 조사됐다.

119구조대원들이 강 씨를 구조하고 있다. (화면 제공: 서울 노원소방서)


집안 가득 쌓인 쓰레기더미..."20년 전부터 모아"

사고 다음날 다시 찾은 현장에는 여전히 쓰레기더미가 가득 쌓여 있었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집안 내부는 고철, 알루미늄, 폐지, 플라스틱 등 각종 잡동사니가 차지하고 있었다. 70여㎡의 공간에서 쓰레기 외에 다른 가재도구는 찾기 어려웠다. 도저히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동네에 오랜 기간 거주했다는 주민 B 씨는 "20여 년 전부터 A 씨가 쓰레기를 모아왔다. 이웃들이 냄새도 나고, 보기 흉하다고 치우라고 권유해도 저렇게 내버려두다가 결국 사고가 났다"며 안타까워했다. 또 다른 주민 C 씨는 "구청에서도 다른 주민들 민원 때문에 몇 번이나 찾아왔지만, A씨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아 몇 번이나 허탕을 쳤다"고 말했다.

경찰과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A 씨는 과거부터 오랜 기간 쓰레기들을 모아 집 안팎에 쌓아뒀다고 한다. 아들 강 씨는 평일에는 합금 공장에서 일하느라 집에 돌아오지 않고, 주말에만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도왔다고 한다.

사고 현장을 가득 채운 쓰레기더미.


물건 아끼는 절약정신? 위험천만 저장 강박증

경찰과 소방당국에 따르면 신고 당시 A 씨는 경황이 없어 보이기는 했어도 정상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상태였다. 이웃 주민들도 평소 A 씨가 쓰레기를 모아 다소 괴상하기는 했어도 대화나 행동에서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그저 폐지와 고철을 모으는 할머니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물건이나 쓰레기를 모아둔 A 씨의 증상을 저장 강박증이라고 진단한다. 저장 강박증 환자들은 어떤 물건이든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계속 저장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습관이나 절약 또는 취미로 수집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의미로, 심한 경우 치료가 필요한 행동 장애이다.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저장 강박증 환자들은 언젠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건들인데 그 물건을 버렸다가 쓰지 못할 때 오는 후회를 느끼고 싶지 않아 쓰레기를 모으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환자 중에는 추억이나 애정이 깃든 물건을 아쉬움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저장 강박증 환자들은 어떤 물건이든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계속 저장한다.


'쓰레기 집' 근본적인 해결책은 관계망 형성

최근 몇 년 사이 저장 강박증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쓰레기 집'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2014년 전국 임대아파트를 전수조사했더니 292가구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일반주택까지 포함할 경우 '쓰레기 집'은 훨씬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경남 창원에선 쓰레기더미가 가득 쌓인 집에서 아이들을 내버려둔 한 여성이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기도 했다. 이 여성은 3년 전 가정폭력을 일삼던 남편과 이혼한 뒤 우울증과 저장 강박증을 앓기 시작했다고 경찰에 털어놨다. 생계를 위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식당 일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의 계속되는 민원으로 지방자치단체들이 직접 나서는 경우도 있다. 이달 초엔 서울 강북구에서 저장 강박증 환자들의 집을 정리하기 위해 복지관 직원들과 공무원들이 팔을 걷어붙였는데 작업 4시간 만에 20톤이 넘는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집안을 깨끗하게 치우더라도 대부분의 저장 강박증 환자들은 다시 쓰레기를 모은다. 집 안 구석구석을 차지한 쓰레기만큼이나 저장 강박증 환자들의 마음 곳곳에도 생채기가 나 있기 때문이다. 저장 강박증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려면 안정적인 관계망 형성이 필수적이다. 소중한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소중한 것과 쓰레기를 한 데 두지 않는다.

송락규기자 (rockyou@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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