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위장전입의 추억

2017. 5. 28.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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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문학에 빠진 계기가 언제였나 생각해보면 1986년 가을에서 멈춘다.

그때 경기도 서북부 작은 읍의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때 그 읍 소재지 마을에서는 '강남8학군'도 아닌, '서울특별시'에 있는 중학교로 배정받겠다고 서울에 주소지가 있는 이들은 아이들을 전입시켜, 기차나 시외버스로 통학시키는 이들이 꽤 있었다.

그때 내가 바라보던 차창 밖 풍경은 급성장 경제개발의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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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문학에 빠진 계기가 언제였나 생각해보면 1986년 가을에서 멈춘다. 그때 경기도 서북부 작은 읍의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주민 대다수가 농사를 짓는 마을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출근하는 공장 노동자였다. 육학년 때였고, 나는 2학기에 새로운 학급회장이 되었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서울에 있는 여중으로 배정받으려면 전학을 가야 한다고 했고,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울지 않았지만 몇몇 친구들은 울었다. 학교는 옮겨졌지만 집은 이사하지 않았다. 위장전입이었다.

학교를 옮기고 나니 동네 친구들과 놀 시간도 없었다. 그때 그 읍 소재지 마을에서는 ‘강남8학군’도 아닌, ‘서울특별시’에 있는 중학교로 배정받겠다고 서울에 주소지가 있는 이들은 아이들을 전입시켜, 기차나 시외버스로 통학시키는 이들이 꽤 있었다. 나름 앞서간다고 생각하며 자녀 교육에 극성스러운 부모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우리 부모님도 끼었던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80년대 재개발 붐으로 마포의 달동네에 방 두 칸짜리 조그만 집을 사서 세를 주고 있었는데, 그 집주소로 나와 동생들을 전입시켰던 것이다.

논두렁 밭두렁이 있던 우리 동네를 벗어나 도시 외곽을 지나, 도심을 통과하여야 내가 전학한 학교에 도착했다. 친구들은 아직 잘 시간에 일어나 새벽밥을 먹고 출근하는 아버지와 함께 집을 나섰다. 처음 얼마간은 시골에서 도시로 급변하는 차창 밖 풍경이 신기하여 바깥을 쳐다보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내가 바라보던 차창 밖 풍경은 급성장 경제개발의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곧 무료해졌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통학버스 안에 있는 시간만 이용해도 일주일에 두 세권씩은 읽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때 우리 집엔 엄마가 월부 책장사에게 사놓은 문고판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요즘 주요 공직자 인사청문회에서 ‘위장전입’이 문제되는 것을 보니, 내가 그런 고위 공직자에 천거될 인물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유형진(시인),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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