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기생 치마에 임금 문양..엉터리 '古宮 체험 한복' 판친다

권순완 기자 2017. 5. 2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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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서울 경복궁 근처를 '대여 한복' 차림으로 거닐고 있는 젊은이들. /권순완 기자

지난 18일 오후 서울 경복궁 경내. 한복 차림의 태국 관광객 쇼르팁(24·여)씨가 친구와 함께 연신 ‘셀카’를 찍고 있었다. 근처 한복 대여점에서 빌린 옷이었다. 금색 꽃 무늬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A’자 형태의 통 넓은 빨간 치마 위에 어깨가 비치는 하얀 홑겹의 저고리를 걸쳤다. 등허리쪽엔 금색 치마끈을 리본으로 묶었고, 발엔 운동화를 신었다. 쇼르팁씨는 “평소 한국의 사극 드라마를 보면서 한번쯤 예쁜 한복을 입고 고궁을 거닐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옷차림을 본 한복 전문가들은 대부분 “이건 한복이라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최근 한류·소셜미디어 영향으로 고궁(古宮)이나 한옥 관광지 주변에 불고 있는 ‘한복 체험’ 열풍에 편승해 ‘엉터리 한복’이 판을 치고 있다. 한복 대여점에서 시간당 돈을 받고 빌려준 이 옷들은 화려하긴 하지만 형태와 무늬, 색상, 소재, 심지어 입는 방법 등에서 전통 한복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한류 방송이나 소셜미디어에서 한복 체험을 접하고 온 외국인이나 한국 젊은층들이 결과적으로 ‘무늬만 한복’인 옷을 입고 전통 관광지를 활보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전국 수백곳에 생긴 한복 대여점 사이들이 가격 경쟁을 벌이면서 싸구려 한복을 마구 유통시키고 있어, 한복의 이미지 자체가 손상될까 우려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한복 체험 열풍’은 지난 1~2년간 급속하게 확산된 유행이다. 한류 사극 드라마에 이어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기 연예인들이 고운 한복 차림으로 한옥 거리를 걷는 모습이 자주 비치자, 중국·동남아 여성을 중심으로 현지 한복 체험이 인기를 끌었다. 외국인들이 먼저 대여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리자, 이 유행이 한국 젊은층에게 거꾸로 역수입(逆輸入) 됐다.

작년 경복궁·창경궁 등에서 한복 착용자에게 인원 제한 없이 야간 입장을 허용했던 것도 호재(好材)였다. 요즘 주말 낮 고궁엔 수백명의 한복 입은 젊은이들이 ‘셀카봉’을 들고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풍경이 흔하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복진흥센터에 따르면 재작년 초 경복궁 근처 한복 대여 업체는 10곳 미만이었지만, 지금은 50~60곳 정도로 급증했다. 전주 한옥 마을에는 100곳이 넘는다. 대여료는 보통 4시간에 1만 5000원~4만원 선이다.

최근 3년 간 인터넷 블로그에서 검색된 '한복' 관련 단어의 빈도수 순위. '한복 대여' 항목은 2014년에만 해도 순위 밖이다가 2015년 2위로 껑충 뛰었고, 작년엔 1위로 '한복' 항목보다도 많이 검색됐다. /한복진흥센터

◇“기생 차림, 어우동 모자…제대로 알고 입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이런 체험 한복 중 특히 엉터리 치마가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한옥 거리에서 보이는 치마는 대부분 종을 엎어놓은 듯한 형태로, 속치마에 링(ring)이 들어 있어 그 모양이 고정돼 있다. 주로 금색 천으로 허리 부분을 동여매 뒤에서 리본으로 매듭을 지었다. 그러나 본래 한복 치마는 직사각형의 평면 천을 고정된 틀 없이 몸에 맞게 둘러 입는 것이다.

채금석 숙명여대 의류학과 교수(한국복식사 전공)은 “얼마나 주름을 내고 어떻게 동여매느냐에 따라 A라인·H라인·O라인 등 다양한 모양을 낼 수 있는 무정형성(無定型性)이 한복 치마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또 한복 치마끈을 뒤에서 묶는 것은 우리 복식법에서 그 예가 극히 드물다. 한복은 ‘앞 고름 매듭’이 원칙이다. 채 교수는 “요즘 거리의 한복 치마를 보면 마치 19세기 유럽 귀족 여성들이 즐겨 입던 ‘크리놀린(crinoline·바구니 모양 드레스)’ 스타일을 보는 듯 하다”고 말했다.

여성 한복이 형태에 문제가 많다면, 남성 한복은 기초적인 복식법부터 틀린 경우가 많았다. 한 교수는 “제발 ‘용보(龍補·자수로 새긴 용 모양의 둥근 문양)’만이라도 옷에 안 넣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용보는 임금의 예복에 다는 문양으로 등·배와 양 어깨 부분에 하나씩 부착돼야 한다. 그런데 대여 한복 중엔 일반 양반의 평복인데도 생뚱맞게 용보가 달린 경우가 많고, 그나마도 앞·뒤에만 있고 어깨 부분엔 생략된 경우도 있었다.

또 남자의 경우 저고리는 속옷이고, 반드시 그 위에 두루마기 등의 포를 입어야 함에도 저고리만 입고 갓을 쓴 채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김문자 수원대 의류학과 교수(한복구성 전공)는 “이건 마치 서양 파티장에서 턱시도 없이 와이셔츠 차림에 그냥 실크햇(꼭대기가 높고 평평한 정장 모자)을 쓰고 있는 격”이라고 말했다.

옷 소재는 대부분 본견(本絹·천연 실크)이 아닌 합성 섬유고, 색상도 전통적인 흑·백·황·청·적의 오방색(五方色)을 완전히 벗어난 핑크·형광색이 예사로 눈에 띄었다. 그 위에 나비·꽃·새 등 국적 불명의 화려한 문양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고름 매듭 방향이 정반대로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많은 교수들이 “어떤 평(評)을 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총체적인 문제라, 차라리 현대 한국 복식의 또 다른 조류(潮流)로 봐야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복식법에 맞춰 입은 경우에도, 강렬한 원색에 이른바 ‘어우동 모자’로 불리는 전모(氈帽·대나무와 종이로 만든 여성용 전통모)를 빗겨 쓴 기생 차림이 많아 “외국 여성들이 무슨 옷인지 알고서 입는 것인지 걱정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지난 7일 서울 경복궁 근처를 '대여 한복' 차림으로 거닐고 있는 사람들. /권순완 기자

◇침체된 한복 시장…’대여업’ 뜨자 저가 한복 우후죽순

한복 대여업체들은 이런 비판에 대해 “업계 실정을 모르는 소리”라고 입을 모은다. 손님들이 매장 방문 전에 벌써 페이스북·인스타그램을 통해 보고 원하는 ‘퓨전 한복’의 형태가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옛 모양만 따라하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한 대여 업체 대표는 “(대여) 가게가 눈만 뜨면 서너곳 생겨나는 상황인데, 손님이 자주 찾는 화려한 옷 말고 세탁도 어려운 전통 본견 한복만 들여놓으라는 것은 한마디로 장사 접으라는 소리”라고 말했다. 다른 대여 업체 대표는 “전통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 아니냐”며 “우리 눈에 익은 조선 후기 때의 복식만을 전통으로 못 박고 그것만 복제 생산하라는 것은 너무 폐쇄적인 발상”이라고 했다.

‘엉터리 대여 한복’의 근원을 따져보면 허약한 우리 한복 산업 구조가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한복 산업은 최근 계속 하향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9년 한복 제조업체 수는 4141곳이었는데, 5년간 27%가 줄어 2014년엔 3054곳에 그쳤다. 한복 제조업 종사자도 같은 기간 5792명에서 4478명으로 5분의 1 넘게 줄었다. 1980~1990년대 ‘생활 한복’ 유행이 잠깐 반짝한 이후, 이것이 전연령대로 퍼지지 못하고 이후 계속 지지부진한 상태다.

한복진흥센터 관계자는 “2000년대 들어 ‘마지막 보루’였던 혼수시장에서마저 한복의 인기가 식자, 일부 도매업자들이 출혈을 감수하고 가격 경쟁에 뛰어 들어 한복 품질이 더욱 저하됐다”며 “그런데 최근 1~2년간 한류·소셜미디어를 타고 고궁 등 특정 지역에서 대여업이 뜨자 중국·베트남 산 저가 한복이 대거 이쪽으로 쏠리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7일 서울 경복궁 근처를 '대여 한복' 차림으로 거닐고 있는 사람들. /권순완 기자

◇한국인 “전통보다 ‘셀피’” vs 외국인 “전통 복장 설명만 해줬더라도…”

실제로 대여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중엔 외국인보다 한국인들이 오히려 전통 복식 여부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18일 경복궁에 ‘퓨전 한복’ 차림으로 연인과 데이트 나온 직장인 최모(24·여)씨는 “(내가 입은 옷이) 전통 복식이 아닌 건 나도 한 눈에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간만에 기분을 낼 목적으로 최대한 꾸며서 입은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면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날 검정 저고리·빨강 치마에 ‘어우동 모자’를 쓴 채 나들이 나온 안모(43·여)씨도 “한복 연구하시는 분들은 안 좋아하실지 몰라도, ‘셀피(selfie·셀프 카메라)’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리려면 과도하게 느껴질 정도로 화려해야 ‘때깔’이 난다”고 말했다. 반면 벨기에 출신 샤리프(25·남)씨는 “대여 가게에서 ‘전통 복장’과 ‘퓨전 복장’ 차이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못 들었는데, 만약 좀 더 전통적인 한복만 취급하는 곳을 알았다면 그곳에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복 업계나 학계에선 이러한 ‘대여 한복’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너무 강조할 경우 자칫 10여년 만에 처음 받는 젊은 층의 관심을 또다시 놓칠까봐 우려하고 있다. 과거 광장시장에서 10년 넘게 한복 도매업을 했다는 한 대여 업체 대표는 “기반이 거의 없는 맨땅에서 부족하나마 겨우 한복 홍보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관(官)에서 지원은 못 해줄망정 규제부터 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며 “대여 업체라고 다 수준이 같지 않다”고 했다.

김소현 배화여대 패션산업과 교수(전통의상 전공)는 “장기적으로 보면 한복 시장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고급·저가 시장으로 분화할 것”이라며 “문제 있는 한복 대여 업체를 제재하기보단, 전통 복식을 잘 살린 업체에게 ‘모범 한복 대여점 인증’ 등 인센티브를 주는 진흥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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