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스토리] 쌓이는 초대장에 '축의금 알바'까지.. 일그러진 결혼문화

남정훈 2017. 5. 2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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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세금고지서' 청첩장

이웃끼리 품앗이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에는 축의금 걱정이랄 게 없었다. 혼사를 치르는 집에 성의껏 집에 있는 물건을 보내거나 일손을 도와주면 됐다. 상부상조하는 것이니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큰 부담이 없어 다들 만족했다.

요즘엔 많이 달라졌다. 결혼식장 입구에서 축의금을 주고받는 모습이 정착된 지 오래고 언젠가부터 액수를 고민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처럼 됐다. 청첩장을 주고받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고 그것 때문에 인간 관계가 끊어지기도 한다. 축하의 의미보다 ‘네가 낸 만큼 나도 낸다’는 거래의 일종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축의금 걱정 없이 결혼식에 가고 싶다는 이들부터 축의금 액수에 섭섭해하는 이들까지 씁쓸한 결혼식 풍경에 마음을 상한 사람이 적지 않다.

취업준비생 정모(28·여)씨는 청첩장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착잡하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탓에 축의금 5만원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 참석해 축하해줘야 할 사이가 아니면 결혼식에 불참하는 일도 적지 않다.

정씨는 “축의금을 낼 돈이 없어 고등학교 친구 결혼식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며 “다른 친구를 통해 그 친구가 서운해했다는 얘길 들으니 연락조차 못하겠더라”라고 털어놨다. 반드시 참석해야 할 결혼식에 가려고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다. 정씨는 “대학 때 아주 친했던 언니가 최근에 결혼을 했는데, 축의금 10만원을 만들려고 주말에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빨리 취업해서 축의금에 구애받지 않고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고 씁쓸한 마음을 토로했다.

26일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설문 결과에 따르면 미혼남녀 438명 중 ‘청첩장을 받으면 부담된다’고 답한 이들은 63%나 됐다. 그 이유로 가장 많은 응답자가 ‘애매모호한 관계’(35%)를 꼽았고, ‘경제적 부담’이라는 응답자도 19%에 달했다. 

오랜 경제 불황과 취업난 등으로 삶의 여유가 없어지면서 축의금은 인간관계의 친밀감을 구분하는 척도 혹은 그것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된 지 오래다. 가볍게 알고 지내는 지인이나 직장 동료는 5만원, 친한 선후배나 동창은 10만원, 절친한 사이면 그 이상 등으로 액수가 달라진다. 축의금 부담에 대인관계를 정리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모두 참석해 돈을 내는 게 적잖은 부담이라 챙길 사람을 선별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종종 축의금 문제로 지인과 관계가 틀어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난해 결혼한 문모(33)씨는 “결혼식 때 축의금 보낸 이들의 이름과 액수를 정리해뒀다. 내가 축의금으로 10만원을 낸 사람이 내 결혼식엔 5만원을 한 것을 확인했을 때는 기분이 좀 나쁘더라”고 말했다. 

다음달 초 결혼을 앞둔 손모(34)씨는 최근 매일 밤 술자리를 갖느라 피곤하다. 결혼을 급히 서두르면서 청첩장을 전달할 시간이 모자라 결혼식에 초대할 친구, 회사 동료, 선후배들과 ‘청첩장 모임’(청첩장을 전달하기 위한 식사모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도 있어 반갑기는 하지만 모임이 끝난 뒤 계산대 앞에 설 때면 굳어지는 표정을 감출 수 없다. 결혼을 미리 축하하는 자리인지라 괜찮은 식당을 잡다보니 모임을 할 때마다 30만~40만원이 든다.

손씨는 “5명에서 많게는 10명 이상의 지인들과 식사를 하게 되면 간단하게 삼겹살만 먹어도 30만원은 훌쩍 넘게 나온다”면서 “지금까지 대여섯 차례의 청첩장 모임을 가졌는데, 아직도 세 차례나 더 남았다. 이번 달 월급은 고스란히 청첩장 모임에 써야 할 판”이라고 걱정했다. 이처럼 결혼을 축하받아야 할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부담이 많다. 청첩장 모임을 생략할 수도 있지만 주변의 원망이 걱정돼 그러기도 쉽지 않다. 지난해 결혼한 이모(37)씨는 “전화로 ‘청첩장 보낼 테니 주소 좀 달라’고 하면 ‘맨입에 청첩장 주는 거냐. 밥 한번 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많이 들어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 직장 동료들을 따라 만나 청첩장 모임을 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청첩장을 받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청첩장 모임을 여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최근 지인의 청첩장 모임에 참석한 김모(33)씨는 “친한 사람들에게는 청첩장을 직접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결혼식에 시간을 내어 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인 만큼 밥 한 끼 정도 사는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나 싶다”며 “모바일 청첩장 하나 달랑 보내오면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딱 사라진다. 예의의 문제이고 오랜만에 지인들이 모이는 자리가 생기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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