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정치학..남기고 싶은가, 지우고 싶은가

김형규 기자 2017. 5. 26.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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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박근혜 정부, 세월호 참사·위안부 합의 등 대부분 기록 남기지 않거나 비공개
ㆍ이명박 정부, 시청각 기록 늘어 ‘착시’ 후임 대통령 위한 비밀기록 단 한 건도 없어
ㆍ노무현 정부, 이지원·대통령기록물법 등 국가기록관리 체계 만들어
ㆍ문재인 정부 성공 열쇠는 ‘기록’, 범위 재검토·기록원 독립 등 시스템 재정비해야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된 역대 대통령 관련 자료. 대통령 기록은 후임 정부 국정운영에 참고가 될 중요한 자료이면서 후세의 역사적 평가를 위한 사료적 가치도 지닌다. 이상훈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비정상의 정상화’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세월호 참사, 한·일 위안부 합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개성공단 폐쇄…. 이전 정부의 사업을 바로잡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록’ 검토다. 하지만 가장 큰 우려는 제대로 된 기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다. 문재인 정부가 인수인계를 받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이들을 기다린 것은 박근혜 청와대 비서실장의 책상 위에 놓인 달랑 10쪽짜리 현황 보고서와 회의실 예약 내역이 전부였다. 청와대의 지난해 비품 구입 목록에는 문서파쇄기 26대가 포함돼 있다.

국가기록원은 지난 12일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기록물 1106만건을 이관받았다고 밝혔다. 이 중 업무 연속성을 위해 후임 정부가 참고해야 할 국정운영의 중요한 자료인 비밀기록은 1100여건뿐이다. 전진한 알권리연구소장은 “박근혜 정부가 넘겼다는 비밀기록에는 당연히 위안부 문제나 사드, 개성공단 등 당장 외교안보 정책에 반영해야 할 핵심 자료들이 있어야 하지만 실제론 껍데기 자료만 넘겼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 기록이 ‘없는’ 박근혜 정부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이 받은 선물 목록조차 누구에게 뭘 받았는지 알지 못하게 할 정도로 정보공개에 폐쇄적이었다. 김익한 명지대 교수는 “정보공개 청구를 했을 때 비공개 판정이 나오는 것도 문제지만, 박근혜 정부의 근본적 문제는 기록을 감추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만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당일 12번의 서면보고와 3번의 전화보고를 받은 뒤 5번 전화로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했지만 증빙자료는 제출하지 못했다. 청와대 제공

박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당일 10차례 이상 관련 보고를 받고 적극적으로 지시를 내렸다고 했지만 이를 증빙할 근거 자료는 내놓지 못했다. 그날 대통령이 관저에 머물며 혼자 식사를 했다는 등의 내용은 공식 기록이 아닌 청와대 근무자들의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일부 드러났을 뿐이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주도했다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도 처음엔 증거가 남지 않는 구두 지시로 집중 하달됐다.

기록 부실은 구조적 문제다. 청와대에서 생산되는 대통령기록을 총괄하는 국정기록비서관 자리는 참여정부 때 처음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이 자리를 ‘연설기록비서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통령 연설문 작성과 기록을 비서관 한 명이 담당하도록 했다. 이 경우 후대를 위한 기록보다 당장 해야 하는 연설 쪽에 업무의 비중이 쏠릴 수밖에 없다.

‘설명책임성(accountability)’이란 개념이 있다. 오늘날 기록관리와 정보공개 정책의 바탕이 되는 개념이다. 국가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시민에게 설명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 설명은 결국 기록으로 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국정기록비서관과 연설비서관을 다시 분리하는 직제개편을 단행했다.

■ ‘기록대통령’ 타이틀도 계승할까

“정부 업무는 모든 걸 기록으로 남겨야 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구별 없이 기록해야 합니다. 이 기록이 필요할 것인가, 아닌가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록을 남기고 후세가 판단할 것입니다. 9급 공무원의 제안이라도 기록에 남겨두세요. 자기가 제안한 것이 기록에 남아야 일할 맛이 나는 것 아니겠어요.”

2005년 9월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 발언을 보면 그가 얼마나 기록에 관심이 많았는지 그대로 드러난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처음으로 대통령기록물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시도했다. 그는 평소 참모들에게 ‘기록하지 못할 일은 아예 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다. ‘기록대통령’으로 불리는 게 그의 바람이었다. 청와대의 의사결정 과정이 한눈에 보이도록 만든 ‘이지원’ 시스템도, 훗날 그를 흠집내는 데 악용된 ‘대통령기록물법’도 그래서 만들어졌다. ‘공공기록물법’도 만들어진 건 김대중 정부 때였지만 빛을 본 건 참여정부에서였다. 노 전 대통령은 그전까지 유명무실했던 국가기록관리 체계를 새로 만들다시피 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의 윤태영 전 대변인 수첩. 2006년 9월 노 전 대통령이 방미 일정 중 미국 정계 인사들과 나눈 대화 내용 등이 수첩에 빼곡히 적혀 있다. 이렇게 생산된 기록은 수첩 500여권, 한글 파일 1400여개에 이른다. 윤태영 전 대변인 제공

기록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남다른 집착은 기록이 대의제로 이뤄지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분명한 인식 때문이었다. ‘노무현의 필사’로 불리는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청와대에 있는 동안 받아적은 대통령의 말은 수첩으로 500여권, 전자파일은 1400여개에 이른다.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낸 문 대통령 역시 기록에 대한 철학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말단 행정관부터 대통령까지 댓글로 소통이 가능하고 정책결정 과정이 그대로 기록으로 남는 참여정부 시절의 업무관리 시스템인 ‘이지원’을 수정·보완해 새 정부에서도 사용할 계획이라고 최근 밝혔다.

■ 기록도 정부 입맛 따라

‘기록대통령’으로 남고 싶어 했던 노 전 대통령은 750만건의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그보다 더 많은 1088만건을 남겼고, 심지어 박근혜 정부가 4년 동안 남긴 기록물은 그보다 더 많다. 숫자만 놓고 보면 기록관리가 향상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때 증가한 기록물 상당수는 시청각 기록 등으로 일종의 착시효과다. 심지어 이 전 대통령은 후임 대통령을 위한 비밀기록을 단 한 건도 남기지 않아 자료 은폐 의혹이 일기도 했다. 이처럼 중요한 기록이 정권에 따라 제멋대로인 것은 기록물 관리를 총괄하는 국가기록원의 독립성과 중립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기록원은 현재 행정자치부에 소속된 기관이다.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 1급 기관이다 보니 국정원이나 검찰 등 권력기관을 상대로 영이 서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최근 정부기관 보안 책임자들에게 문서 무단 파쇄를 금지하라는 지시를 한 것처럼, 세월호 참사 같은 큰 사건이 벌어졌을 경우 국가기록원이 해당 기관에 ‘기록 동결’ 조치 등을 명령할 수 있도록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미국의 경우 국립기록보관소(NARA)의 장은 차관급으로 임기가 종신직이며 상원 청문회를 거쳐 임명된다. 해임하려면 대통령이 의회에 사유를 설명해야 할 정도로 독립성이 보장된다. 이영남 한신대 교수는 “기록 업무가 정치와 행정에 예속되는 일을 막기 위해 국가기록원을 헌법에 근거한 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며 “제도적 정비 못지않게 기록원이 행정의 투명성과 참여 민주주의의 가치를 구현하는 상징적 기관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나누는 모든 대화를 녹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작가는 오바마와 인터뷰 도중 녹음기가 고장나 일부 내용을 놓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백악관의 도움으로 녹취록 전체를 전달받았다는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버지니아대학 밀러센터가 만든 ‘대통령 녹취록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지금도 1940년부터 1973년까지 재임한 미국 대통령 6명의 육성을 누구나 클릭 한 번으로 들을 수 있다. 여기엔 백악관 회의와 전화통화 내용이 포함된다.

물론 미국도 민감한 정보나 비밀기록은 일정 기간이 지나야 일반에 공개한다. 중요한 건 공개 여부와 관계없이 기록을 완벽하게 남겨놓는 일이다. 미국은 중앙정보국(CIA) 같은 정보기관도 매년 생성한 기록의 종류와 목록을 설명하는 보고서를 낸다. 그러나 황교안 전 총리는 세월호 참사 당일 박 전 대통령의 행적을 포함한 기록물들을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봉인하면서, 심지어 어떤 문서를 지정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도록 아예 문건 목록도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만들었다. 송기호 변호사는 “주권자인 시민의 정부 감시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암흑 상태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황 전 총리의 대통령지정기록물 지정 무효를 주장하는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다.

■ 기록 범위 전면 재검토해야

같은 맥락에서 고민해볼 만한 주제가 공무원 업무용 e메일의 공공기록 포함 문제다. 참여정부 때만 해도 청와대와 부처 간 업무 연락은 일정한 시스템하에서 이뤄져 대부분 기록이 남았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선 청와대 관계자가 각 부처에 구두로 지시를 내리고 e메일로 보고받는 경우가 잦아졌다. 현행 공공기록물법에서 e메일은 기록물도 아니고 보관할 의무도 없다. e메일로 부당한 지시와 명령이 오가도 걸러낼 방법이 없다.

실제 그런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2009년 2월 이명박 청와대의 한 행정관이 경찰청에 ‘군포 연쇄살인 사건을 활용해 용산참사로 악화된 여론을 덮어라’라는 내용의 e메일을 보낸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었다. 몇 달 후엔 신영철 전 대법관(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이 광우병 촛불집회 재판을 맡은 판사들에게 압박성 e메일을 보내 재판 개입 논란이 일기도 했다.

미국은 1993년부터 공공기관의 e메일을 정식 효력이 있는 공문서로 분류해 기록관리 대상에 포함시켰다. 힐러리 클린턴의 ‘e메일 스캔들’이 지난 미국 대선에서 파괴력을 발휘한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재문서를 중심으로 기록을 관리하는 한국 현실에서 당장 공무원 e메일을 공공기록에 포함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조영삼 서울시 정보공개정책과장은 “공공행위의 책임성과 신뢰성을 보여주는 증거적 가치를 가진 것은 모두 기록물에 포함시키는 것이 맞다”며 “e메일은 물론이고 SNS 등 최근의 달라진 디지털 행정 환경을 반영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거나, 정보공개를 자의적으로 거부할 경우 이를 처벌하는 쪽으로 법이 강화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익한 교수는 “공무상 당연히 있어야 할 기록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기록을 만들지 않은 죄를 묻는 ‘부존재 공익침해 감사제도’ 같은 제도를 이번 정권에서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면서 “그래야만 기록을 기피하는 관행이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기호 변호사는 “기록은 결국 권력이고 권력은 당연히 시민이 가져야 하는 것”이라며 “정부와 공공기관이 생산한 모든 기록에 대해 시민의 통제권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도 언제든 다시 위협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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