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회, 그것도 특!

2017. 5. 2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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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부드러운 회, 매콤새콤한 국물…
그야말로 통쾌하고 상쾌한 맛

여름철 별미인 물회. 한겨레 박미향 기자

5월 말인데 덥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더우면 나는 무조건 물냉면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쩐 일로 물회가 먼저다. 나는 지금 반년 넘게 <한겨레>에 짧은 영화 산문을 연재하고 있다. 내 자랑이 아니라 물회 얘기다. 영화에 대한 식견이 전무한 내가 ‘권여선의 인간발견’이라는 허황된 제하에 글을 쓰게 된 것은 오로지 물회 탓이다.

지난해 8월 나는 문학 행사차 경북 울진에 갔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일행과 함께 죽변항으로 향했다. 안내를 맡은 울진의 시인이 물회를 잘하는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서울에서 울진까지 280km가 넘는데다 그날은 비까지 오락가락해 차가 속도를 내지 못했다. 시간이 촉박해 휴게소에서 급한 요기만 한 터라 몹시 배가 고팠고 또 덥고 목도 칼칼하던 참에 물회라니 반가웠다.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시인이 “전원 턱 물회”를 주문했다. 누군가 익살스럽게 ‘턱 물회’가 뭐냐고 묻자 시인은 천연덕스럽게 ‘턱별한 물회’라고 응대했다.

특 물회와 국수사리가 나왔을 때 하필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받지 말까 하다 받은 게 실수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이 <한겨레> 기자라면서 다짜고짜 영화 산문을 연재하자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영화에 대한 나의 무지를 고백한 후 제안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기자는 이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한 듯 차분하게, 영화 전문 글은 영화평론가가 맡아 쓸 테니 걱정 말고 당신은 영화에 무지한 소설가답게 영화 속 인간탐구 쪽으로 가면 된다고 했다. 특 물회의 선연한 주홍빛 살얼음이 녹아가고 쪽진 머리 모양의 국수사리가 급속도로 사라지는데 기자는 세상 급할 것 하나 없는 말투로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았다. 마침내 국수사리가 딱 한 덩이 남았을 때 나는 “아, 알았다. 쓰겠다”고 대답하고, 기자가 감사의 말을 길게 늘어놓기 전에 자세한 사항은 전자우편으로 알려달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마지막 남은 국수사리를 내 물회 그릇에 넣자마자 울진의 시인이 큰소리로 여기 사리 좀더 삶아달라고 외쳤다. 아니 리필이 되는 줄 알았으면 회와 해산물부터 먼저 건져 먹을 것을 괜히 불은 국수를 넣어 물을 흐렸구나 후회가 밀려왔지만 아무튼 나는 물회를 먹었다. 차지고 부드럽게 후루룩 넘어가는 회와 오독오독 씹히는 해산물과 싱싱한 채소와 매콤새콤한 국물까지 그야말로 통쾌하고 상쾌한 맛이었다. 땀과 더위와 앞으로 써야 할 글의 부담까지 한 방에 날려버리는 맛이었다. 거기에 소주까지 곁들이니 마음이 느긋해져, 뭐 나도 옛날에 감명 깊게 본 영화가 많으니 거기 나온 인물들을 잘 탐구해서 쓰면 되겠지 싶었다. 곧 국수사리가 더 나왔고 나는 냉큼 새 국수사리를 물회에 말았다. 막 삶은 국수라 더 쫄깃하고 탱탱했다.

나중에 서울로 돌아와 전자우편을 확인한 나는 기함했다. 기자는 내가 옛날 고릿적 영화를 가지고 쓰려는 줄 어떻게 알고 그렇게 아무 영화나 갖다 쓰면 절대 안 되고 가능한 한 현재 상영 중인 영화로만 써야 한다고 토를 달아놓았다. 아니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거절할 것을 그깟 무한 리필되는 국수사리에 눈이 멀어 대충 결정한 게 후회막급이었지만 아무튼 그때 먹은 죽변항 특 물회는 참 맛있긴 했다.

서울에서도 물회를 몇 번 먹었는데 영 그 맛이 안 났다. 회의 질과 국물 맛을 떠나 왜 서울의 물회집들은 국수사리마저 그 모양으로 내놓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주문을 받은 뒤 삶지 않고 미리 삶아 퉁퉁 불은 국수를 손님에게 내놓는 세계관이라면, 회의 싱싱함과도 담 쌓고 사는 세계관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현재 상영 중인 싱싱한 영화로만 글을 쓰도록 요구받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억울한가.

권여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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