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대1 경쟁률 뚫고 '피고인 박근혜'와 5m 거리에 앉았다

2017. 5. 26. 15: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차 재판 방청기]
[한겨레]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껏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법정에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지난 19일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23일·25일) 방첨권 추첨을 위해 서울회생법원을 찾은 게 처음이었다. 응모번호는 외우기도 쉬운 111번. 덜컥 25일 재판 방청에 당첨됐다. 7.7 대 1의 경쟁률을 뚫었다. 그리고 25일, ‘박근혜 피고인’과 대략 5m 거리에 앉아 재판을 지켜봤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서관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40분. 입장을 위한 대기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짧은 치마를 입은 중년 여성은 한동안 줄을 서 있다가 “방첨권 당첨 안 되신 분은 입장이 안 된다”는 말에 발걸음을 돌렸다. 이날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정으로 가는 듯했다. 9시 즈음 재판정으로 올라가는 법원 직원의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하던 대로 하세요.”

재판정 입장을 위해 줄 서 있는 방청객들.

오전 9시. 방청객 입장이 시작됐다. 배정받은 좌석번호는 40번. 앞에서 3번째줄이었는데 첫 줄은 비어 있어 앞쪽이 훤히 보였다. 눈에 띈 것은 혐의의 무게만큼 검사석에 수북이 쌓여 있던 사건 자료였다. 대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 재단출연 강제모금 관련 직권남용 혐의 등 모두 18개의 혐의를 받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방청객 태반은 젊은 층이었다. 그들은 나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휴대폰을 통해 관련 정보를 훑으면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중년 남성은 성경책을 읽었다. 그가 들고 있던 종이에 쓰인 글귀는 ‘받은 구원과 받을 구원’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받을 구원은 무엇일까. 재판 방첨 추첨 때의 열기와 달리 방청석 군데군데는 비어 있었다.

오전 10시. 첫 재판이 있던 이틀 전처럼 남색 정장을 입은 박 전 대통령이 417호 대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집게핀으로 올림머리를 한 모습도 그대로였다. 눈은 휑했고 얼굴은 초췌했다. 올림머리 사이로 흰머리도 간혹 눈에 띄었다. 피고인석에 앉아서도 그는 표정이 없었다.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김세윤 부장판사 등이 들어서자 ‘박근혜 피고인’의 두 번째 재판이 비로소 시작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2차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오전 재판은 기싸움으로만 50여분이 소요됐다.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 이상철·유영하 변호사가 재판 절차에 강하게 항의했다. 요지는 “10만쪽에 이르는 방대한 증거 자료를 열람할 시간을 달라”는 것이었다. 변호사들이 말을 이어가는 동안 박 전 대통령은 눈을 감고 있기도 했고 흐릿한 눈으로 검사석을 바라보기도 했다. 눈이 부어 있어 그런지 일견 졸린 듯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다. 간혹 유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나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검사가 증인들의 녹취록을 읽는 ‘서류 증거조사’가 시작된 뒤에도 변호인들은 불쑥불쑥 이의제기를 했다. 이번 재판을 포함해 앞으로 재판이 예정보다 더 길게 진행되지 않을까 하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3시간여 만에 끝난 1차 공판은 그저 맛보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검사가 읽어 내려간 증인 녹취록 대부분 브이아이피(VIP)로 표기된, 즉 박 전 대통령의 죄를 묻고 있었다. 한 증인은 최순실씨가 이런 말을 계속 했다고도 밝혔다. “대통령을 위해서 일한다, 대통령 때문에 일한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박 전 대통령의 표정 변화는 전혀 없었다.

낮 12시20분. 점심식사를 위해 휴정됐다. 김 부장판사가 “박근혜 피고인은 검사가 제시한 서류 증거에 대해 할 말이 있나요”라고 묻자 박 전 대통령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방청석 앞쪽에서도 거의 듣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재판장을 나오니 1층 로비에서 노인들이 박 전 대통령을 재판을 다루는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한 중년 여성이 뉴스 보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자 지나가던 중년 남성이 툭 말을 던졌다. “재판은 거짓말 대회야. 다 들어보면 결론이 나오겠지.”

오후 2시10분. 재판이 재개됐다. 오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일부 방청객이 자리를 비웠다. 단 한 명의 증인 출석도 없이 검사가 계속 녹취록을 읽기만 했던 터라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에게 이렇게 묻자 ‘네’라고 답했습니다” “△△△가 이렇게 진술했습니다”라는 말이 끝도 없이 이어지니 일부 방청객은 졸기도 했다. 고개를 숙이고 자고 있던 어떤 방청객은 “피곤하면 바깥에 나가 쉬다 오시라”는 방호원의 경고를 들었다. 신발을 벗고 있다가 방호원으로부터 다시 신을 것을 명령받은 이들도 있었다.

재판정 앞쪽 상황도 비슷했다. 박 전 대통령은 오전보다는 표정이 밝아보였으나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변호사도 하품을 했고, 검사 또한 하품을 참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변호인 쪽이 휴정을 요구했고 김 부장판사는 이를 받아들였다. 오후 3시24분이었다.

오후 3시40분. 잠시 바깥에 있던 박 전 대통령이 다시 재판정으로 들어섰다. 김 부장판사가 “잘 쉬었느냐”고 묻자 살짝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부장판사는 “재판이 원래 힘들고 지루하다. 처음이라 더 힘들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또다시 증인 녹취록 읽기가 이어졌다. 박 전 대통령은 오전보다는 적극적으로 유 변호사와 소곤소곤 대화를 이어갔다. 어떤 부분에서는 유 변호사가 의견을 묻자 “그냥 놔두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재판 시작 이후 처음 웃기도 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증인 진술서가 띄워져 있는 모니터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사뭇 어이없다는 듯 웃기도 했다. 탄핵 전 한 보수매체와 인터뷰에서 “완전히 엮인 것”이라고 말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오후 5시18분. 드디어 검사 쪽이 증인 녹취록 읽기를 마쳤다. 녹취록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은 역시나 ‘최순실’(검사는 ‘최서원’으로 읽었다)이었다. 이후 유 변호사는 “차은택 진술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거나 “박 전 대통령과 관련 없는 공판 조서도 일부 포함됐다”는 이의를 제기했다. “고생스럽겠지만 같은 내용이 중복되는 것을 빼면 재판 시간이 줄어들 것”이라는 말로 검사 쪽을 자극하기도 했다. “검찰 조사 내용과 법정 증언 내용이 다르다”며 치열한 법정 싸움을 예고하기도 했다.

김 부장판사는 오후 재판 끝 무렵에도 “박근혜 피고인,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까?”라고 정중히 물었다. 답은 역시나 “자세한 것은 추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였다. 오전과 달라진 점은 들릴 듯 말 듯한 개미 목소리가 아니라 법정 안 누구나 다 들릴 수 있게 마이크에 대고 또박또박 차분하게 말을 했다는 것이다. 오전·오후 그는 분명 달랐다.

오후 5시44분. 2차 재판이 끝났다. 박 전 대통령이 재판정을 빠져나가는 동안 일부 방청객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기도 했다. 성경책을 읽고 있던 방청객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서울중앙지검 정문에서는 여전히 일부 박사모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배치된 경찰 수가 더 많아 보일 정도로 참석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있던 한 여성은 연신 “억울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재판은 거짓말 대회”라고 읊조리던 한 중년 남성의 말처럼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야 하는 ‘피고인 박근혜’ 재판은 이제 막 시작됐다. 이날 재판 내내 “법과 원칙”을 강조하던 유 변호사의 말처럼 ‘법과 원칙’대로 하면 될 일이고 그래야만 하는 시대다. 박 전 대통령 3번째 재판은 29일 열린다.

글·사진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 페이스북][카카오톡][위코노미][정치BAR]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