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호의 당구 이야기 ㉑ ] 안순분 여사-김가영 선수, 한국당구의 우먼파워

김성진 입력 2017. 5. 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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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한국빌리아드 프로모션은 허리우드 홍영선 회장의 지원으로 안정을 찾고 각종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안순보란 분이 장성출 선수의 소개로 전화를 한다며 필자와 만나고 싶다고 했다.

▶여장부 안순보 여사 회원제 당구클럽 시도

안순분 여사는 당시로선 비현실적이었던 회원제 당구장을 운영해보고 싶어 했다. 당구에 대한 인식이 왜곡돼 있던 상황에서 회원제 당구장이 가능하겠냐고 되물었지만 안순보 여사의 생각은 확고했다 이미 클럽을 계약하고 공사 중이며 최고의 시설로 인테리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 여사는 필자에게 회원제 당구클럽을 홍보하려고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필자는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한국빌리아드 프로모션은 각종 사업 추진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회를 열어 홍보를 하면 좋겠다고 답했고 4개 신문에 기사로 내보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제안을 했다.

이에 고무된 안 여사는 전국당구대회 개최를 약속하고 1996년 1월 27, 28일 이틀간 안 클럽배 전국3쿠션당구대회를 열게 된다. 안 여사는 총 예산을 2천 만 원으로 약속했지만 솔직히 불안한 사업이었다. 당시로서 적지 않은 금액인 2천 만 원을 들여 당구장 하나가 대회를 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안순보 대표가 박승희 선수에게 시상을 하고 있다.

▶안 클럽배 전국당구대회 340여 명 몰려 박승희 선수 우승

한국빌리아드 프로모션은 대한당구선수협회에 사업승인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한다. 이에 화가 난 필자는 대한당구선수협회의 처사에 항의를 하고 오픈대회로 전환, 인쇄매체를 통해 대회 소식을 알렸다. 이에 전국에서 340여 명의 선수들이 신청을 해 성황리에 대회를 열 수 있었다. 관내 국회의원이었던 이세기 의원을 비롯해 많은 명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안 클럽배 전국당구대회는 당시 최고의 경기력을 자랑했던 박승희 선수와 전천후 선수인 남도열 선수가 결승에서 만나 박승희 선수가 우승을 차지해 300만 원의 상금을 거머쥐었다.

▶일반 손님 몰려 회원제 포기

안 클럽에서 경기를 치른 선수들은 실내 인테리어에 깜짝 놀랐다. 테이블마다 전용 옷장에 큐는 아담 커스템 일제 고급 큐로 세팅했다. 당구 클럽에 누가 봐도 놀랄 만큼 거액을 투자 한 것이다. 이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퍼뜨린 입소문에 안 클럽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 3개의 스포츠신문에 소개되면서 강남 일대 당구 마니아들이 몰려들면서 호황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안순보 여사가 꿈꿨던 회원제 당구클럽은 일반 손님이 몰려들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박승희 선수와 남도열 선수의 결승전 장면.

▶포켓당구 여왕 김가영 11세 때 전국대회 출전

대한당구협회 제 21대 양태주 회장은 1993년 12월 제 19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 겸 회장기 전국당구대회를 개최한다. 동호인부, 단체전, 선수부 등 다양한 종목으로 진행해 선수부에서는 배동홍 선수가, 포켓 선수부에서는 이열 선수가 우승을 한다.

눈길을 끈 건 이 대회에 포켓당구의 여왕 김가영 선수가 처음 출전한 것이다. 당시 대한당구선수협회 홍보 이사였던 필자가 기사거리가 될 수 있다는 판단해 스포츠조선 조경제 기자에게 연락해 앳된 김가영 선수를 취재하게 했다. 아직도 23년 전 김가영 선수의 경기 모습이 생생하다. 어린 김가영 선수가 오늘날 한국은 물론이며 세계 최고의 포켓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롭다.

김가영 선수는 전 가족이 당구인이다. 아버지 김용기 씨는 당구선수 출신으로 인천에서 당구장을 경영했다. 그 덕분에 김가영 선수는 당구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틈난 나면 큐를 들었다. 당구를 좋아하는 김가영 선수를 보고 아버지 김용기 씨는 딸을 선수로 키우기로 마음을 굳힌다. 혹독한 훈련으로 김가영 선수의 경기력은 어린 나이답지 않게 일취월장해 11세에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전국당구대회에 출전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포켓당구의 여제 김가영 선수.

15세인 중학교 2학년 때는 포켓볼 대회에 처음 출전을 했고 그 후 각종 대회에서 입상을 한다. 이를 지켜본 아버지 김용기 씨는 김가영의 당구 자질에 확신을 가지고 포켓 강국인 대만으로 유학을 보낸다. 대만은 아시아 포켓당구 연맹국이며 포켓당구의 천국이었다. 포켓당구를 배우기 위해 박신영 현지원 정영화 등 많은 선수들이 유학을 갈 정도로 대만에는 경기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 김가영은 약 2년 간 대만에서 당구교육을 받으며 세계적인 남자선수들과 실전경험을 쌓아나간다. 20세 무렵엔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해 나간다.

그런 김가영이 드디어 일을 낸다. 2005년 세계여자포켓볼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어린나이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한 명씩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이어서 US오픈과 2006년 세계여자포켓9볼선수권에서도 우승을,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을, 2007년 인터내쇼날빌리어즈챌린저와 2007WPBA 캐롤라이나프로리다클래식에서는 정상에 오른다. 또 대만에서 열린 2008 암웨이배 세계여자9볼에서도 준우승을 하는 등 전성기를 누린다.

US오픈포켓당구대회에서 우승한 김가영 선수.

김가영의 경기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각종 세계대회에서 입상과 우승을 넘나들며 세계랭킹 1위에도 수차례 오르는 등 한국 포켓당구의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당구는 아시아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포켓당구는 대만에서 중국으로 시장이 옮겨지고 있으며 중국에서 포켓당구 선수는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 김가영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중국에서 별 중의 별인 것이다. 현재 선배인 현지원 선수와 송파구에 김가영 당구 아카데미를 개설해 후배양성과 국내포켓당구 발전을 목적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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