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사라진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

2017. 5. 2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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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참여정부 때 13개 신설, 보수정부 들어 고민 없이 없어져

참여정부는 ‘위원회 정부’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부처 간 이해관계가 달라 정부의 통합적 정책이 만들어지기 어려운데, 부처의 벽을 허물고 통합적 정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위원회 신설에 적극적이었던 점이 그 배경이다. 참여정부가 시작된 2003년 대통령·국무총리·정부 각 부처 소속 위원회를 통틀어 368개의 위원회가 있었지만 그 수는 2008년 2월 공식 임기가 끝날 때엔 579개로 늘었다.

포괄적 진실규명 나선 진실화해위

그리고 그 많던 위원회의 수는 다음 정권인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임기 중반인 2010년 6월 431개까지 줄었던 위원회는 이후 다시 늘어나 이명박 정부 말에는 530개로 늘었고, 이후 들어선 박근혜 정부에서는 급격한 증감 없이 530여개 수준에서 유지됐다. 위원회 수 자체가 늘고 준 것은 정부의 국정운영 기조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위원회 수를 급격히 줄이던 시기에 위원회의 존립 취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까지 활동기간을 연장하지 않고 한꺼번에 사라져 버린 점은 정권에 불리한 역사 지우기의 일환이 아니냐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9년 11월 26일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한성훈 팀장이 서울 충무로 진실화해위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6ㆍ25 전쟁기간 정부 주도로 보도연맹원 4934명이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하며 발굴 증거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가장 집중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한 시기도 참여정부 때였다. 1990년 8월 만들어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지원위원회를 비롯해 1998년 2월 출범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위원회, 2000년 8월부터 활동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등이 이미 활동하고 있었지만, 참여정부 들어 삼청교육대, 노근리 사건, 동학농민혁명,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등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위원회 등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참여정부 시기 활동한 과거사 관련 위원회는 이전 정권 때부터 조직돼 활동한 위원회를 포함해 모두 17개였고, 이 중 13개가 참여정부 때 만들어졌다.

특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이전까지 개별 사건에 따라 다뤘던 과거사 규명 방식을 벗어나 국가기관 등의 개입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전반적 사안들을 함께 다루는 포괄적 진실규명에 나서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2005년 설립 이후 1년간 1만860건의 조사신청을 접수한 뒤 2006년 4월부터 첫 조사를 개시해 4년 2개월 동안 총 1만1172건의 조사를 마쳤다. 위원회의 조사범위는 주로 군부독재를 포함해 그 이전 시기의 민주화운동에 초점이 맞춰졌다. 진상규명 결과 국가로부터 피해사실이 확인되면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와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권고하고, 개별 조사보고서를 비롯해 종합보고서를 통해 활동기간 중 규명 사건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활동을 했다.

진실화해위 설치의 법적 근거였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서는 조사 개시 후 4년간의 활동기간을 보장하고 이후 최대 2년을 더 활동할 수 있게 보장해 놓았다. 그러나 진실화해위 활동을 지켜보는 시민사회단체와 역사 관련 단체 등에서 애초 1년의 조사 신청기간과 총 조사기간 4년이 진실규명을 위해선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활동기간을 2년 연장하라고 요구했으나, 4년의 조사기간이 끝난 2010년 1월 최종적으로 연장된 조사기간은 2개월 6일에 불과했다. 당시 이영조 위원장이 활동 종료 후 발간한 보고서에서 제주 4·3사건을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폭동”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에서 발생한 민중반란”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진실화해위 인사가 정권의 성향에 맞춘 ‘코드인사’라고 비판을 받은 여파가 활동기간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모든 기관 진실규명 추진, 검찰만 빠져

참여정부에서는 독립기구로 출범한 진실화해위나 대통령 직속 위원회로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등 과거사 규명 활동이 끝난 뒤 현재까지 명목상으로 남아있는 과거사 관련 위원회는 대부분 개별 사건에 관한 위원회들이다. 거창사건과 노근리 사건, 동학농민혁명, 제주 4·3사건 관련 위원회 등이 남아있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보수정권 9년 동안 10·27 법난과 납북 피해, 동의대 사건, 한센인 피해 사건 등에 관한 위원회가 새로 만들어졌다.

참여정부 시기 만들어진 과거사 관련 위원회 중 주목을 받은 것은 국가정보원과 경찰청, 국방부가 각각 기관 자체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든 점이다. 이들 기관 자체 과거사 위원회는 참여정부 임기 말인 2007년 말까지 활동했다. 국정원은 민청학련과 인혁당사건을 비롯해,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 동백림 사건 등을 조사했다. 경찰청은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보도연맹원 학살의혹 사건, 남민전사건, 대구 10·1사건 등을 조사했다. 국방부도 군사독재 기간 강제징집·녹화사업과 실미도사건, 삼청교육대사건, 보안사 민간인 사찰사건 등을 조사했다. 여기에 사법부도 법원이 자체적인 과거사 규명 활동을 벌인 바 있다.

그러나 참여정부에서 국정원과 경찰청, 국방부, 그리고 사법부까지 과거사 진실규명 작업에 나섰지만 검찰만은 관련 활동이 전무했다.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함께 쓴 <검찰을 생각한다>에서 이미 검찰의 과거사 규명의 필요성을 밝힌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책에서 “검찰이 과거사 정리를 거부한 것은 과거사 정리를 통해 검찰 권한 행사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대선후보 시절에도 ‘적폐청산’의 일환으로 과거 정권에서 만들어진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다 밝히지 못한 진실규명에 대해 임기 내 완수를 공약하기도 했다. 검찰개혁 조치와 함께 검찰의 자체 과거사 청산 움직임이 뒤따를지 주목받는 이유다.

문 대통령과 함께 책을 쓴 김인회 교수도 지난 2월 국회에서 열린 검찰개혁 관련 세미나에서 검찰개혁의 과제로 “재심과 과거사 정리”를 제시하는 등 검찰개혁과 함께 검찰의 과거사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교수는 “검찰은 스스로 직접 고문이나 가혹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고문이나 가혹행위, 불법구금 등을 모두 알고 있었고 고문에 의한 자백에 따라 수사와 기소를 했다”며 “수사지휘권이 있는 검찰은 고문과 가혹행위, 불법구금 등 과거사 사건의 무관한 관계자나 종범이 아니라 사실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은폐한 공범, 전체 행위를 기능적으로 지배한 공범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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