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건강] '억울한 정신병원行' 이중진단으로 막는다

민태원 기자 입력 2017. 5. 23.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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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복지법' 이달 30일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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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 개봉한 영화 ‘날, 보러와요’는 이유도 모른 채 정신병원에 강제로 끌려가 감금된 한 여성의 충격 실화를 다뤄 주목받았다. 보호자(2명)와 정신과 전문의 1명의 동의만 있으면 정상인이 정신병자가 되는 무서운 현실. 타의(他意)에 의한 정신병원 강제입원을 허용하는 현행 정신보건법(1995년 12월 제정)이 모티브가 됐다. 정신질환 때문에 기도원이나 요양시설 등에 방치되거나 치료받지 못하는 걸 막기 위해 만들어졌던 정신보건법은 그간 재산 다툼, 가족 갈등으로 정상인이나 가벼운 증상의 환자까지도 강제입원시키는 수단으로 남용돼 왔다. 실제 2013년 11월 서울에서 딸이 재산 문제로 갈등을 빚던 고령의 어머니 A씨를 우울증 치료를 이유로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이듬해 1월 A씨는 병원 공중전화로 이웃 주민에게 구조를 요청하고 법원에 인신보호구제를 청구했지만 다음날 딸 요청으로 다시 강제입원당했다. 퇴원 후 다른 병원 검사 결과 그에게는 어떤 정신병적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A씨는 억울한 입원을 유발한 정신보건법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신청했고 지난해 9월 이 법 24조 ‘보호의무자에 의한 입원(강제입원)’은 헌법에 맞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을 이끌어냈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와 세계보건기구(WHO) 등도 우리나라 정신보건법의 인권침해적 요소의 수정을 끊임없이 권고해 왔다. 이에 국회와 정부가 20여년 만에 정신보건법 전면 손질에 나섰고 지난해 5월 말 강제입원제를 대폭 개선하고 정신질환자의 건강증진 및 복지 서비스 지원 근거를 마련한 새로운 이름의 ‘정신건강복지법’을 만들었다. 이 법이 1년여의 준비를 거쳐 오는 30일 시행된다.

강제입원 68%…장기입원 ‘시설병’ 초래

기존 정신보건법은 정신질환자의 입원치료에 중점을 뒀고 정신질환 병상의 폭발적 증가와 장기 입원을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22일 보건복지부와 국립정신건강센터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국내 정신의료기관 및 요양시설에 입원(입소)해 있는 조현병 조울증 등 정신질환자는 8만1105명이었다. 이 가운데 비자의(非自意) 입원자는 5만5041명으로 강제입원율이 67.9%에 달했다. 국립정신건강센터 이철 센터장은 “1994년엔 96%가 비자의 입원이었으나 자의 입원이 늘면서 강제입원율은 점차 줄고 있다”면서도 “독일(17%) 영국(13.5%) 이탈리아(12%) 등에 비하면 현격히 높다”고 말했다.

정신 병상은 민간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2008년 6만9700여개에서 2015년 8만3600여개로 늘었다. 전체의 81.6%(6만7900여개)가 ‘폐쇄 병상’이다. 국내 정신질환자의 평균 입원 일수는 197일(2014년 기준)로 이탈리아(13.4일) 스페인(18일) 독일(26.9일) 등보다 7∼14배 길다.

반면 정신질환자의 재활이나 복지 지원, 조기 발견 및 개입은 취약하다. 사회에 나와도 직업 주거 문화생활 교육 등 복지 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는 규정이 없다. 입원 치료를 대체할 지역사회 내 정신보건 인프라와 사회복귀 시설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정신질환 경험자가 매년 470만명(2016년 실태조사)에 달해 정신건강은 전 국민적 문제가 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지원 근거가 미비하다는 지적이다.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이용표 교수는 “장기 입원은 무기력과 극도의 수용성, 삶의 의지 상실 등 이른바 ‘시설병’ 혹은 ‘사회도피증후군’을 가속화시킨다”면서 “지역사회 보호체계가 사실상 부재한 상황에서 정신 장애인은 가장 빈곤한 집단이 됐다”고 꼬집었다.

‘억울한 입원’ 상당수 사라질 듯

새로 시행되는 정신건강복지법은 인권 보호를 위해 강제입원 절차를 대폭 손질했다. ‘억울한 강제입원’이 상당수 줄어들 전망이다. 그동안은 보호자와 해당 병원 정신과 전문의 1인의 동의만 있으면 자·타해 위험이 없어도 강제입원이 가능했다.

앞으로는 국공립을 포함한 다른 정신의료기관의 전문의 1인이 추가돼 일치된 진단을 받아야 2주 이상 입원할 수 있다. 모든 강제입원은 1개월 내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 심사를 받고 자·타해 위험이 확인돼야 한다. 강제입원 시 6개월에 한 번 이뤄지던 입원기간 연장 심사를 초기에는 3개월로 단축했다.

신경정신의학회 등 의료계 일각에서는 법 시행으로 강제입원 조건이 까다로워지면 현재 입원 중인 중증 정신질환자(조현병 조울증 등) 최대 1만3500여명, 알코올중독자 5600여명 등 모두 1만9100명가량이 사회로 쏟아져 나올 것이란 예측을 내놓고 있다.

인제의대 상계백병원 이동우 교수는 “급성기 환자 중에는 자·타해 위험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초기 치료를 통해 증상을 빨리 회복시킬 필요가 있는데, 이들의 입원이 어려워져 치료 사각지대가 발생한다. 또 장기 입원자 가운데 증상은 좋아졌으나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어 이를 지지 혹은 관리해줄 가족이나 지역사회 정신보건 서비스가 없어 퇴원을 못해오던 환자들은 개정된 법에 의해 퇴원이 예상된다”며 “이런 환자의 증상 재발이나 안전문제가 초래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 차전경 과장은 이에 대해 “강제입원은 자·타해 위험이 있는 경우로 한정하고 퇴원 후 지역사회에서도 자·타해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면 경찰, 시군구청장이 개입해 입원치료를 계속할 수 있게 행정입원이나 외래치료명령제 등 안전장치도 마련돼 있다”고 말했다. 또 자의 입원의 경우라도 자·타해 위험이 있으면 전문의 판단으로 3일간 퇴원을 제한하는 ‘동의입원제’도 새로 도입됐다. 차 과장은 또 “일부 퇴원자가 있다 하더라도 돌아갈 주거 여부, 돌봄·계속치료·복지서비스 지원 필요성 등 유형별로 분류해 정신건강증진센터 등 지역사회의 치료 및 복지서비스 기관에 빈틈없이 연계되도록 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병원-사회복귀 ‘징검다리’ 중요

퇴원 후 정신질환자의 지속적인 재활치료를 위해 ‘낮병원(Day Hospital)’이 주목받고 있다. 낮병원은 낮에 6시간 이상 진료와 상담은 물론 여러 치유 프로그램을 경험하고 당일 귀가하는 형태다. 가족, 사회와 단절되지 않게 개방성과 자율성을 지향한다.

30대 초반에 조현병 진단을 받은 원모(63)씨는 지난해 9월부터 경기도 고양시 명지병원의 낮병원인 ‘별마루’를 다니며 안정을 찾고 있다. 원씨는 과거 가족 동의로 경기도 용인의 한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보름간 입원한 적이 있다.

원씨는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고 갇혀서 약물을 투여받았다. 신문 TV도 못보고 소리를 지르거나 하면 바로 남자 간호사들이 데려가 침상에 묶어놓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곳은 아침에 와서 병 상담도 받고 비슷한 사람들과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 미술 음악 치료 등 다양한 사회적응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한때 술독에 빠져 살았던 차모(58)씨는 4년 전부터 가톨릭의대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를 다니며 알코올 중독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이곳은 국내 대학병원 가운데 유일하게 알코올의존증 치료를 낮병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차씨는 “알코올중독 때문에 3번이나 폐쇄병동에 입·퇴원을 반복하며 해독(단주) 치료를 받았지만 다시 술에 빠지곤 했다. 그런데 이곳에선 술을 마시게 된 원인과 마음의 상처부터 살피며 보듬어줬다. 내가 존중받고 있다고 느껴져 행복하다”며 웃었다. 차씨는 병원 주선으로 미화일을 하며 보람을 찾고 있다.

그러나 국내 정신의료기관 중 낮병원을 운영하는 곳은 2015년 말 기준으로 76개뿐이며 이용자도 1707명에 불과하다. 불필요한 입원을 제한하고 퇴원과 연계해 지역사회 복귀를 촉진하기 위해선 낮병원 확충에 대한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

오는 7월 국립춘천병원이 국립병원 최초로 운영하는 정신질환자 지역사회 공동생활시설인 ‘일자리 일굼터(두빛나래)’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곳은 조기 퇴원 후 갈 곳 없는 정신질환자들에게 독립된 주거와 함께 직업 재활훈련, 나아가 취업 기회까지 제공한다.

국립춘천병원 박종익 원장은 “국립병원이 직업 재활시설을 직접 설치·운영함으로써 입원치료부터 퇴원 후 사회복귀까지 정신질환자들이 불편함 없이 지역사회에 재통합되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모델을 만들어 민간병원으로 확산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지역사회 정신질환자 사례 관리와 조기발견 등을 맡는 전초기지인 정신건강증진센터 확충을 위한 예산 지원도 꼭 필요하다. 현재 전국 225개 시·군·구(기초자치단체)와 16개 시·도(광역자치단체)에 센터가 설치돼 있지만 16개 시·군·구에는 아직 없다. 또 정신보건 전문요원 1명당 50∼80명의 정신질환자를 담당해야 해 제대로 된 서비스 제공이 어려운 실정이다.

아울러 공동생활가정처럼 주거가 가능한 중간 집(Halfway house) 형태의 사회복귀 시설 확충이 시급하다. 장기 입원자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이고 가족과 단절돼 있기 때문이다. 이용표 교수는 “지역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위한 직업재활시설이나 일시적 스트레스 상황을 입원 없이 해결하기 위해 선진국이 하고 있는 ‘안정화 쉼터’도 늘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100% 부담하는 사회복귀시설 운영을 중앙정부가 맡는 방안이 고려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글=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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