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死 아들 만나려.. 엄마는 10년간 뱃삯 모았다

김은중 기자 2017. 5. 23.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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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호주군 병사의 모친, 56년전 3등칸 1만5000km 부산행
외손녀가 책 이어 다큐로 제작
통조림공장서 일하며 9남매 키워
당시 부산까지 여정 노트에 기록.. 사후 외손녀가 발견, 작년 책 발간
올 8월 호주 한국영화제서 상영

지난 17일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 내 유엔군 참전군인 묘역을 한 50대 호주 여성이 찾았다. 그는 빈센트 힐리(Vincent Healy·전사 당시 육군 병장)라는 이름이 적힌 묘비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故) 힐리 병장의 외조카 루이스 에번스(여·54)씨다.

1961년 한국 방문을 마친 뒤 호주 브리즈번 자택에서 델마 힐리(1971년 작고) 여사가 웃고 있다. 탁자에 6·25 전쟁 당시 전사한 아들 빈센트 힐리 병장의 사진이 놓여 있다. 여사는 부산에 묻힌 아들의 묘를 찾기 위해 10년간 파인애플 공장에서 일하며 한국행 여비를 모았다. 델마 여사는 묘역에서 흙과 돌을 퍼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니고 다녔다. /루이스 에번스

에번스씨는 낡은 노트 한 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손바닥 크기의 빨간색 노트에는 56년 전 힐리 병장의 어머니이자 에번스씨의 외할머니인 델마 힐리(1971년 작고)가 1만5000여㎞ 떨어진 한국에서 숨진 아들을 찾아나선 과정을 직접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1950년 가을 영(英)연방 27여단 산하 호주 왕실 3대대 소속으로 참전한 힐리 병장은 1951년 3월 강원도 원주 매화산에서 중공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힐리 할머니에겐 4남6녀가 있었다. 장남이었던 힐리 병장은 큰 키와 빼어난 외모로 호주 육군 잡지 표지 모델까지 했던 집안의 자랑이었다고 한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부양하던 가장(家長)이기도 했다. 그런 아들의 전사 소식은 모친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숨진 아들 힐리의 유해는 고향 호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부산의 유엔군 묘지에 묻힌 것이다.

모친은 죽은 아들이라도 만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한국으로 가는 여비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가장 역할을 하던 맏아들이 전사하자, 넉넉지 않던 집안 형편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모친은 파인애플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며 남은 9남매를 키웠고 그러면서도 틈틈이 저축을 했다. 그렇게 해서 10년 만인 1961년 한국으로 가는 크루즈선(船) 3등석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해 5월 2주일의 항해 끝에 도쿄와 서울을 거쳐 부산 유엔묘지에 묻혀 있는 아들을 만났다. 연합군 전사자의 어머니가 직접 한국 땅을 찾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는 "아들과 영혼의 재회(spiritual reunion)를 이루었다"며 묘역에서 가져온 흙과 돌을 죽을 때까지 자신의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는 호주 동부 브리즈번에서 부산까지 아들을 만나러 가는 2주일간의 여정을 빨간색 노트에 꼼꼼히 기록했다.

에번스씨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삼촌을 찾아 낯선 한국 땅을 찾은 것은 이 노트 때문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을 정리하다 이 노트를 발견하고 60여년 전 한국에서 발발한 6·25 전쟁과 그곳에서 싸우다 숨져간 호주인들의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기자 출신인 에번스씨는 2014년 호주에 있는 6·25 참전용사 20여 명을 수소문해 힐리 삼촌과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1961년 할머니의 한국행(行) 여정도 정리했다. 삼촌의 묘지를 50년 가까이 돌봐 준 한국인들의 존재도 알게 됐다. 이런 내용들을 담아 에번스씨는 '부산으로 가는 길(Passage to Pusan)'이라는 책을 작년에 호주에서 펴냈다.

釜山 유엔군 묘역 외삼촌 참배 - 지난 2016년 10월 23일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을 찾은 루이스 에번스씨가 6·25 전쟁에서 전사한 외삼촌 빈센트 힐리 병장의 묘소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에번스씨가 이번에 한국을 찾은 것은 56년 전 할머니의 여정을 책이 아닌 영상에 담기 위해서다. 그가 시드니한국문화원의 지원을 받아 만든 7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오는 8월 호주한국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에번스씨는 "전쟁터의 흔한 영웅담이 아닌, 전쟁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나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에번스씨는 56년 전 자신의 할머니가 그러했듯이 준비해 온 모종삽으로 외삼촌 묘역의 흙과 돌을 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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