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시작점 박근형 "연극 평가는 관객이 해야"

손민호 입력 2017. 5. 23. 01:26 수정 2017. 5. 23.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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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부녀 대놓고 조롱한 연극
'개구리' 계기로 지원배제명단 나와
"좋은 작품 아니지만 탄압은 안 돼
난 우리가 사는 삶을 무대 올릴 뿐"

시방 국내 문화예술계에서 연극 연출가 박근형(54·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교수)은 블랙리스트와 동의어다. 문화예술계 지원배제명단,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이 사실상 박근형 연출의 연극 ‘개구리’에서 불거졌기 때문이다. 2013년 ‘개구리’가 논란 속에 공연됐고 이태 뒤 박 연출의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이하 ‘군인’)’가 정부지원사업에 선정됐다가 탈락했다. 지난해 3월 ‘군인’은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올랐고, 겨울을 지나며 블랙리스트에 관여한 고위 공직자들이 우르르 구속됐다. ‘개구리’에서 조롱했던 대통령도 감옥에 갔다.

그러나 당사자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그는 꼭꼭 숨었다. 그리고 올봄 ‘군인’이 다시 무대에 올랐다. 지난 13일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올해도 연일 매진 행렬이다. 남산예술센터 앞에서 박근형 연출을 만났다. 다행히도 표정이 환했다. 2시간 30분이 넘는 인터뷰가 끝나자 식탁에 막걸리병이 쌓였다.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 부녀를 조롱한 작품 ‘개구리’(2013년)로 정부 눈밖에 났던 연출가 박근형 한예종 교수.뜻밖에도 자신을 “대중적인 연출가”라고 소개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Q : 올해도 객석이 꽉 찼다.

A : “나는 대중적인 연출가다. 내 연극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공연 도중에 관객이 딴짓을 하거나 일어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나는 관객이 좋아하는 연극을 만든다.” (지난해 초연 당시 ‘군인’은 객석점유율 116%를 기록했다. 객석이 모자라 임시 객석을 만들었지만 밀려드는 관객을 감당할 수 없어 1회 특별공연을 추가했다.)

Q : 대중적인 연출가라고?

A : “내 작품은 실험적이지 않다. 난해하지도 않다. 나는 우리가 사는 삶을 무대에 올릴 뿐이다.” (박근형 연출의 작품은 대부분 소시민의 일상을 무연히 재현한다. 연극인 박근형도 밑바닥에서 시작했다. 열아홉 살에 무작정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극장에서 선배들과 먹고 자며 연극을 배웠다. 그에게 처음 연극을 가르쳐준 선배가 김갑수 배우였다.)

Q : 그럼 ‘개구리’는?

A : “‘개구리’도 대중적인 작품이다. 국립극단이 그리스 희극 3부작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국민 중에서 아리스토파네스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저승에 있는 소포클레스 같은 시인들을 데려오는 줄거리인데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나 싶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얘기를 했다. 물론 권력을 풍자했다. 권력 풍자는 연극의 가장 큰 미덕이다. 그뿐이다. 나도 ‘개구리’가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탄압 받을 작품은 아니었다.” (국립극단이 제작하고 박 연출이 각색·연출을 맡은 ‘개구리’는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 부녀를 노골적으로 조롱해 논란을 불렀다. 이어 국립극단 손진책 예술감독이 연임에 실패하자 ‘개구리’ 때문에 쫓겨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Q : ‘개구리’ 이후 상황을 말해달라.

A : “내가 가르치는 한예종 학생들과 함께 만들었던 ‘군인’을 정식 무대에 올리려고 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지원작품에 선정돼 1000만원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문예위 직원들이 찾아와 출품을 취소해달라고 말했다. 내가 취소하지 않으면 창작산실 사업이 없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개구리’ 때문이라고 했다. 부당하다는 걸 알았지만 후배들의 앞길을 막을 수 없어 포기했다. 1000만원은 돌려주지 않았다. 이미 다 쓴 뒤였다. 고맙게도 남산예술센터가 ‘군인’을 선택해 작년과 올해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남산예술센터 우연 극장장은 ‘군인’을 동시대적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라고 말했다. 검열 논란의 중심이 된 작품이었고, 지난해 10월 일본에서 공연될 때는 국정농단의 실체가 드러날 즈음이었다. 그리고 올해 재공연을 시작하기 나흘 전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Q : 세상이 바뀌는 동안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A : “내가 나와서 뭐라 한들 달라진 게 있었을까. 그냥 연극 일을 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건 괜히 꺼려졌다. 어떻게 보면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와 다행이다.”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서 가장 인상적으로꼽히는 장면. 탈영병 아들은 아파트 경비로 일하는아버지를 찾아가고, 아버지는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아들을 돌려보낸다. [사진 서울문화재단]

Q : 정상으로 돌아왔다?

A : “연극을 평가하는 건 관객이다. 관객이 좋아하면 좋은 연극이고 아니면 나쁜 연극이다. 이번 사태는 예술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부정한 것이다.”

Q : ‘군인’은 어떤 작품인가?

A : “국가를 대신해 희생한 군인들 얘기다. 동의하지 않는 관객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객이 많은 걸 보니 좋은 연극인 것 같다(웃음).” 지난해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한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제목처럼 불쌍한 군인들 이야기다. 2016년 한국의 탈영병, 1945년 일본의 조선인 자살 특공대, 2004년 한국인을 납치해 살해한 이라크 무장단체, 2010년 서해 초계함의 해군 등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의 군인들 이야기다. 박 연출의 말마따나 그들의 삶을 재현하는 연극의 시선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군인이, 그리고 모든 사람이 불쌍하다는 주제에는 이견을 달기 어렵다. 세상을 사는 것은 이미 전쟁이므로. 6월 4일까지 남산예술센터, 6월 16~17일 인천문화예술회관, 6월 22~24일 성남아트센터.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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