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교도소 사건서 '사라진 17명'..군, 명단 공개해야

정대하 입력 2017. 5. 22. 08:56 수정 2017. 5. 2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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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상 규명-이것부터 밝히자 ① 민간인 암매장 의혹

당시 계엄군 "교도소 교전 28명 사망"
인근에 암매장돼 발견된 주검 11명
1995년 검찰 수사기록도 이들만 확인

항쟁뒤 '2천명 학살설' 돌았지만
주검 못 찾은 행방불명자 75명
구속·훈방자 130명도 신원 미공개

군·검 주요기록 '군사기밀 봉인'
국방장관 결단땐 공개할 수 있어

[한겨레]

여전히 어둠 속에 가려진 5·18민주화운동의 진실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8일 “헬기 사격까지 포함해 발포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5·18 관련 자료의 폐기와 역사왜곡을 막겠다”고 밝혔다. 이참에 항쟁의 진실을 모두 드러낼 수 있을지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이제라도 5·18의 정확한 진상을 규명하고 화해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밝혀야 할 핵심 사실관계는 무엇인지, 이를 위해 군과 검찰이 감추고 있는 자료들 가운데 공개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등을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이리로 좀 연락해 주시오.”

서만오(운수업·1955년생)씨는 1980년 5월22일 오후 광주교도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았다. 시위대 버스 안에서 총을 맞은 그는 밖으로 나와 폐차된 버스를 개조해 만든 ‘간이술집’까지 기어갔다. 서씨는 이 가게 할머니한테 주민등록증을 건넨 뒤 쓰러졌다. 그리고 “계엄군 두 명이 다리를 잡고 질질 끌고 교도소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동사무소에 서씨 주민등록증을 맡겼다. 동사무소에서 연락을 받은 서씨 가족들은 할머니를 찾아가 주민등록증을 맡았던 사연을 들었다.

서씨 가족들은 광주교도소 교도관 한상범씨를 통해 “동료 교도관한테 계엄군들이 죽은 사람들을 교도소 앞에 있는 야산으로 싣고 가더라”는 말을 겨우 전해 들었다. 교도관 한씨는 “계엄군들이 시체를 묻을 때, 떼를 떼어서 누구나 알아볼 수 없게 감쪽같이 묻은 다음 나뭇가지를 10여㎝ 정도 꺾어서 꽂아둔다”고 말했다. 서씨 가족들은 5월26일 인부를 동원해 야산을 뒤져 비탈에 묻혀 있던 주검을 발견했다. 교도소 앞 야산 등에서 서씨를 비롯해 모두 11구의 주검이 암매장 상태로 발견됐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완전한 진상규명을 위해 밝혀져야 할 의문점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히는 게 암매장과 실종자 의혹이다. 당시 항쟁에 참여했으나 주검을 찾지 못해 행방불명자(5·18유공자 인정)로 인정된 81명 가운데 나중에 주검을 찾은 이는 6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75명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항쟁 직후엔 2천여명이 학살됐다는 말까지 떠돌았다.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5.18 희생자 유가족과 시민들이 묘지를 둘러보고 있다. 광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찾아야 할 대표적인 행방불명자들은 이른바 ‘교도소 습격사건’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발표된 17명이다. 군은 80년 5월21~23일 광주교도소 주변에서 6번에 걸친 시민군의 습격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교도소 습격기도사건은 조작됐고, 교도소 인근을 지나던 애꿎은 민간인들만 희생됐다. 계엄사령부는 80년 5월31일 ‘광주사태 진상 조사’ 결과에서 ‘교도소 습격사건’으로 민간인 28명이 사망했다고 밝표했다.(<사진>) 하지만 1995년 검찰의 관련 수사 기록에서 확인된 희생자는 11명에 불과하다. 5·18 연구자들은 군이 교도소 관련 사망자 17명의 명단부터 공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당시 체포되거나 연행됐다가 훈방된 이들에 대한 군 기록도 공개돼야 한다. 광주시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보고서(2007)를 통해 확보한 80년 5월 구속·훈방자는 2604명이다. 이들 가운데 5·18특별법에 따라 1~6차 심사를 통해 보상을 받은 유공자는 1993명이다. 나머지 611명 가운데 광주시가 지난 2월까지 주소를 파악해 보상을 신청하라고 안내문을 보낸 이는 300여명에 그쳤다. 나머지 310여명은 인적사항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5·18 연구자 정수만 전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은 “군이 당시 체포·연행·훈방자들의 인적사항을 공개하고 파악해 생존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항쟁의 진상을 밝히려면 무엇보다 군과 검찰이 갖고 있는 기록부터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군은 여전히 많은 자료를 군사기밀이란 이유로 묶어놨다. 5·18 당사자들이 12·12 및 5·18 검찰 수사 기록 중 주요 사건 관련 참고자료를 공개하라고 낸 정보공개 소송에서 대법원은 2004년 10월 “비공개는 부당하다”고 확정 판결했다. 그럼에도 검찰은 전체 사건기록 30만쪽 가운데 7만쪽(23%)만 공개했다. △진압군 중 대대장 이하 명단 △진압군 상황일지 △진압군 지휘체계 및 작전계획 등 5·18 당시 군부대의 이동 경로를 알 수 있는 군 자료는 군사기밀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전문가와 연구자들은 관련 기록 공개가 법 개정 등 절차 없이 군사기밀 해제 권한을 가진 국방부 장관의 결정만으로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군사기밀보호법은 “군사기밀을 지정한 자는 군사기밀로 지정된 사항이 군사기밀로서 계속 보호할 필요가 없게 된 때에는 지체 없이 그 지정을 해제하여야 한다”며 “국방부 장관은 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는 때에는 군사기밀을 공개할 수 있고, 기술개발·학문연구 등을 목적으로 연구기관 등의 요청이 있는 때에는 군사기밀을 제공하거나 설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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