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사람 풍경] 지상 막장서 사투 벌이는 '검은 장미' 여성 광부들 .. 탄광 조연 아닌 주연이다

박정호 2017. 5. 20.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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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찍다 고향 탄광에 눈 돌려
최민식·김영갑 두 작가가 롤 모델
다큐작가의 영예 온빛사진가상 받아
남편 잃고 선탄부로 채용된 아낙들
갱서 캐낸 탄서 이물질 골라내는 일
예전엔 30~40명, 지금은 10여 명
2014년부터 매년 전시, 책도 펴내
탄광촌 퍼즐 맞춰질 때마다 힘 생겨
아버지 세대에게 받은 혜택 갚을 것
━ 20년간 태백 탄광 지켜온 사진작가 박병문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병문씨는 광부의 아들이다. 그에게 탄광은 추억과 희망의 대상이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박씨와 그가 찍은 선탄부 오은숙씨의 사진을 겹쳐 놓았다. 갱에서 채취한 석탄 덩어리에서 이물질을 골라내는 선탄부는 여자 광부로 불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진작가 박병문(58)씨는 어릴 적 기억이 생생하다. 그의 어머니는 출근길 아버지를 배웅하면서도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했다. 갱내 탄차를 몰았다. 언제라도 생사가 갈릴 수 있는 그곳, 광부들은 하루를 여는 아침 시간에 이성을 경계했다. 부정을 탄다는 거였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때는 그랬다. 아버지는 심지어 여자가 먼저 앞으로 지나가면 일터로 가지 않았다.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일반 광부들은 더했다. 탄광은 여성 금지 지역이었다. 지하 1000m, 평균 섭씨 40도의 세계는 남자들의 몫이었다. 고된 노동 탓도 있지만 아내들은 남편이 탈 없이 귀가하기만을 빌었다. 광산촌, 인명 사고가 잦았다. 남편을 잃은 아낙들은 앞날이 막막했다.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탄광에선 혼자 남은 어머니들을 ‘특채’했다. 선탄부(選炭婦)로 고용했다. 이른바 여자 광부다. 선탄부도 고되기는 매한가지였다. 갱에서 올라온 석탄 더미에서 잡석·갱목·철사 등을 일일이 골랐다. 투구 모양의 두터운 방진(防塵) 마스크는 필수품. 분진(粉塵)을 막기 위해 온몸을 철통 무장했다. 그래도 손끝 검정 자국은 지울 수 없었다.

박 작가가 선탄부를 환한 세상으로 불러냈다. 서울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어느 여자 광부의 하루’ 전시(28일까지)를 열고 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 태백 광부들에게 지난 20년 동안 매달려온 그만의 보고서다. 그는 “카메라를 들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탄광촌에 전념하겠다”며 “지금까지 조연, 엑스트라에 그쳤던 여자 광부들을 주연 자리로 끌어올리고 싶다”고 했다.

박병문씨의 고향인 강원도 태백시 장성광업소 정경. 2014년 모습이다.[사진 박병문]

Q : 선탄부도 광부라 할 수 있나.

A : “물론이다. 탄광 하면 보통 남자만 있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다. 지하 막장에서 캐낸 탄을 섬세한 손놀림으로 상품화하는 주역이 선탄부다. 막장만큼이나 사투를 벌인다. 직업병 진폐(塵肺)도 무섭다. 그들이 일하는 곳은 지상 막장이라 할 수 있다.”

Q : 일이 그렇게 힘든가.

A : “석탄이 연탄 공장으로, 화력발전소로 나가려면 선탄장 컨베이어벨트 30개를 거쳐야 한다. 잠시만 있어도 탄가루가 달라붙는다. 작업장도 어두컴컴하다. 선탄부는 벨트에서 떨어진 탄을 하루에도 수십 번 허리를 굽혀가며 쓸어 담는다. 가정의 버팀목이자 당당한 산업전사다. 저는 ‘검은 장미’라고 부른다.”

Q : 촬영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A : “처음에는 대부분 얼굴을 내보이기를 꺼렸다. 아픔이 많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동의를 구했다.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충분하다고 설득했다. 이리저리 돌아가는 벨트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들을 찍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Q : 흑백 사진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A : “‘있는 그대로’를 찍으려고 했다. 작업장·휴게실·샤워장·출퇴근길 등등, 그들의 일상을 한 편의 이야기로 꾸몄다. 선탄부의 힘겨운 삶을 고발하거나 비판할 의도는 없다.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에 공감하고, 위로를 보내고 싶다. 예전에 태백에만 30~40명 일했는데 지금은 10여 명 남아 있다.”

Q : 탄광 사진만 20여 년 해오고 있는데.

A : “1996년부터 찍어 왔다. 고향의 어제와 오늘을 담는 다큐멘터리다. 그간의 작업을 모아 2014년 ‘아버지는 광부였다’ 개인전을 처음 열었다. 이후 해마다 전시를 하고 책도 냈다. 이번이 네 번째다. 광부라는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카메라를 보면 욕설부터 꺼내는 분도 많았다. 그들의 얘기를 충분히 듣고 유대감을 쌓아왔다.”

Q : ‘아름답지 않은 아버지는 없다’고 했다.

A : “검은 얼굴에 하얀 이를 보이며 퇴근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아버지 얼굴에 맺힌 검은 땀방울이 우리 5남매의 울타리가 됐다. 오래전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시작한 게 이제 숙명이 된 것 같다.”

Q : 어린 시절 동네 풍경이 궁금하다.

A : “광부들은 허름한 주택에서 살았다. 아침마다 공동화장실에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기차에서 떨어진 탄 덩어리를 모아 연료로 쓰기도 했다. 넉넉한 생활은 아니지만 뒷동산에서 전쟁놀이를, 구슬치기를 하며 자랐다. 카메라 플래시가 펑 하며 터지는 소리를 무서워했던 제가 사진을 업으로 삼았으니 이런 게 인생인가 보다.”

Q :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는데.

A : “고등학교를 마치고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엔진을 조립했다. 몸이 고됐다. 91년 시험을 봐서 축협에 합격했다. 첫 발령지가 고향 태백이었다. 그때 사진동아리에 들어가 기본을 익혔다. 처음에는 백두대간 야생화를 주로 찍었다. 2007년 사진집 『금대봉의 야생화』도 냈다. 2008년 태백관광개발공사 오투리조트에 들어갔다. 틈이 날 때마다 주변 탄광을 돌아다녔다.”
삼척시 도계읍 경동탄광 선탄부들이 괴탄(塊炭)을 골라내고 있다. [사진 박병문]

Q : 광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A : “축협에 근무하며 출퇴근하는 광부를 간간이 찍었다. 과거의 아버지를 보는 듯했다. 서울 올림픽 이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쇠락해가는 고향 땅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고향이 거쳐온 시간의 목격자·증언자가 되기로 했다. 아버지 세대에 대한 헌사인 셈이다.”

Q : 사진 공부는 어떻게 했나.

A : “주로 독학했다. 책을 파고들었고, 세미나·특강도 찾아다녔다.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1928~2013) 선생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그의 휴먼 다큐가 큰 힘이 됐다. 제주를 사랑한 김영갑(1957~2005) 작가도 빠뜨릴 수 없다. 자연을 대하는 그만의 애틋한 시선에 감화됐다. 두 분이 저의 롤(role) 모델이다.”

Q : 최민식 사진상 특별상 대상도 받았다.

A : “4년 전이다. 크나큰 영광이었다. 지난해에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라면 받고 싶어하는 온빛사진가상도 수상했다. 탄광과 막장의 시간을 촘촘히 담은 공로를 인정받았다. 프로라는 전문가 타이틀에 안주하고 싶지 않다. 언제까지나 아마추어로 남고 싶다. 늘 긴장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려고 한다.”

Q : 다큐멘터리 사진이 외면받고 있는데.

A : “종종 판매되긴 하지만 그게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실망이나 좌절은 없다. 탄광촌의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질 때마다 새 힘이 생긴다. 지금까지 10원 한 푼 지원받은 적이 없다. 전시나 책 모두 자비로 충당했다. 남의 돈을 받으면 자유롭게 찍을 수 없다. 지금 당장 다큐 작가들이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Q : 가장 기억에 남는 광부를 꼽는다면.

A : “지난해 경기도 안산에 사는 퇴직 광부 한 분이 전시장에 와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진폐증 환자로 병원에서 지내는 분이었다. 마음이 아렸다. 나아가 뭉클했다. 안산병원의 도움으로 요즘 그분의 일상을 찍고 있다. 안산에는 태백을 떠난 분들이 많이 살고 있다. ‘제2의 태백’이라고 한다. 공단지대라 취업이 용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론 폐광·진폐에 집중할 계획이다. 그게 우리 아버지들에게 받은 혜택을 갚는 길이다.”

Q : 저무는 탄광을 막을 수는 없지 않나.

A : “알고 있다. 30년 전 12만 명이던 태백 인구는 요즘 5만 명 미만이다. 하지만 기억과 보존은 또 다른 문제다. 예로 철암역 선탄 시설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지만 실제 광부들이 살았던 동네는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이 살아 있어야 삶의 흔적도 간직할 수 있는데 말이다. 독일·일본처럼 폐광지를 관광자원이나 학습현장으로 적극 활용했으면 한다. 과거 없는 오늘은 없다.”

■[S BOX] 위안부 할머니의 일상도 4년째 앵글에 담아 「“지금도 카메라를 가까이 가져가면 종종 손사래를 치세요. 매우 조심스럽게 찍고 있습니다. 그분이 입은 상처를 덧나게 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해서죠.”

박병문 작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는 요즘 위안부 할머니가 걸어온 길도 기록하고 있다. 경북 경주시에 사는 박 할머니(89)의 일상을 4년째 찍고 있다. “광부와 위안부 할머니는 모두 극한의 환경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정치·사회적 의미를 앞세울 뜻은 없어요. 한 인간의 삶을 오롯이 담고 싶을 뿐입니다.”

박 작가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을 2004년께 방문한 적이 있다. 태백시 음악동아리의 위문 공연에 동행했다. 할머니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사진도 찍어 드렸다. “1년 정도 재능기부를 했어요. 그때 기록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할머니 공동체에 대한 조명은 제법 있는 편이라 개인 가정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할머니를 주목하게 됐죠.”

그는 지인의 소개로 박 할머니를 알게 됐다. 일본 오키나와(沖繩)에 끌려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오신 분이다. 박 할머니는 해방 이후 결혼을 하고 자녀도 뒀지만 주변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할머니와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눈을 감으신 이후의 시간도 담으려고 해요. 위안부 대목은 10% 정도 될까요. 고난의 20세기를 버텨오신 우리네 어르신들의 초상입니다.” 」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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