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흰 뼈들의 환생

김인국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입력 2017. 5. 19. 20:5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벌써 한 달째, 사금을 캐듯 시커먼 펄 속에서 하얀 유골을 찾고 있다. 뼛조각 하나가 발견될 때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허겁지겁 달려가고, 그 소식은 속보로 뜬다. 사지육신 멀쩡하게 돌아와도 모자랄 판에 부서진 채로라도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이번에도 못 찾으면 어떻게 사나 싶어 겁먹은 부모들의 얼굴을 볼 적마다 가슴을 친다.

이런 성의의 백분의 일만이라도 배 기울던 그날 기울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불현듯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를 ‘세금도둑’이라고 부르며 모독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여전히 같은 생각일까.

새로운 시절의 도래를 기다렸던 것인지 대선이 끝나자마자 돌아오지 못하던 이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다. 마지막 한 점까지 남김없이 수습되고 아홉 분 모두 귀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비바람 몰아치는 3년 내내 ‘빌고 바랐을 뿐’ 먹지도 입지도 못한 채 수만 갈래로 찢기고 부서진 부모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어느 한날한시를 정해서 온 나라가 일제히 촛불 들고 엉엉 통곡하며, 아홉 분의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다. 쇠심줄 같은 권력의 외고집마저 단칼에 베어버린 촛불의 함성인데 서로 차례를 미루다가 여태껏 남게 된 착한 영혼들의 귓전에 그 소리가 닿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외쳐보자. “너희 마른 뼈들아, 이제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에제키엘서) 그러면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그 위로 살갗이 덮이지 않겠는가. 그다음 이렇게 명령하자. “너 숨아, 사방에서 달려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살아나게 하여라.” 기어코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서는 광경을 봐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아무도 아이들을 배에 태우지 않을 테고, 그렇게 바다를 무덤으로 바꿔버린 우리에게 빛나는 미래는 있을 수 없다.

마른 뼈들의 환생을 꿈꿀 만큼 나라가 변하고 있다. 고작 열흘 된 대통령이 9년 묵은 광주의 상심을 매만지고 포옹하는 장면에 또 감격하였다. “눈물 닦아준다더니 매일 울린다”는 말이 즐겁게 나돈다. “죄와 죽음은 사라지고 타락하였던 만물이 새로워지며 모든 생명이 온전히 회복되나이다”하는 기도문이 실감난다.

금아(琴兒) 선생의 <오월>을 되뇌며 계절의 온유를 음미한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모란의 달/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그래서 늙은 시인은 말했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시방 오월 속에 있는 것을.” 바로 이 대목, 오늘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다.

툭하면 얻어맞고, 벌금 물고, 강도 바다도, 역사도 국권도 무참히 더럽혀진, 비루하고 울적했던 세월이 어언 십 년. 그런데 이 괴로움에 반드시 값이 있도다, 하면서 꿋꿋이 버텨주신 사람들 덕분에 마침내 이런 오월을 만났다. 눈만 감으면 고마운 얼굴들이 수두룩하게 떠오른다.

성경은 고난을 견디는 의연한 태도와 함께 즐거운 날의 흥겨운 자세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다. 괴로움의 값어치를 알아 묵묵히 참아내듯 즐거운 날에는 환희의 맛을 유감없이 느껴보라고 말이다. 슬픈 날 슬퍼했다면 기쁜 날에는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이여”(시편), 이렇게 노래하며 기뻐해야 한다.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불행하던 그 햇수만큼 우리를 즐겁게 하소서”하고 밤낮 눈물로 매달린 끝에 순리의 때를 맞이하였으면 매만지고 토닥이는 것이 도리이다.

고마움을 알아야 기쁨이 커지고 오래간다. 처음 스치는 옷깃이라도 반갑다고, 고맙다고 인사하자. 고맙다, 고마+ㅂ다. ‘고마’는 신(神)이다. ‘ㅂ+다’, ‘~브다’는 같다, 비슷하다, 닮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하느님을 닮으신 분,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나를 보았으면 하느님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엄청난 소리를 했다. 우리라고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앞으로 허겁지겁 허둥대던 5월은 없는 것으로 하자. 대신 5월은 ‘헝겁지겁’ 달려가는 어머니의 성월이기로. 조급해서 몹시 허둥거리는 모양은 허겁지겁, 너무 좋아서 정신 차리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모양은 ‘헝겁지겁’이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고 하느님 보소, 이런 노래 부를 때는? 당연히 헝겁지겁! 아, 사람이 좋구나, 오월이 좋구나.

<김인국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