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세계의 근대화, 동서양의 교류가 낳았다

안재원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근대화와 세계화는 서양만의 공일까

한자의 상형성은 자연언어가 아닌 새로운 부호 체계를 사용해 자연현상을 탐구하려 했던 서양 자연과학자들의 기획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중용>의 라틴어 필사본(Lat. Cod. 6277) 중 한자의 상형성에 대해 설명한 부분.

한자의 상형성은 자연언어가 아닌 새로운 부호 체계를 사용해 자연현상을 탐구하려 했던 서양 자연과학자들의 기획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중용>의 라틴어 필사본(Lat. Cod. 6277) 중 한자의 상형성에 대해 설명한 부분.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은 <1417년, 근대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자연학이 세계의 근대화에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밝힌다. 설득력도 있고 내용도 알차다. 저자가 원했던 소기의 목표는 달성했다. 하지만 세계의 근대화와 관련된 그의 해명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고 본다. 세계의 근대화가 서양만의 내적 동력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기에. 결론부터 말하겠다. 한자와 동서 고전의 번역도 나름 큰 기여를 했다.

■ 한자도 한몫 거들었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의 말이다.

“진정한 문자를 사용하여 글을 쓴 것은 극동의 왕국인 중국에서였다. 진정한 문자는 대체로 글자나 단어가 아니라 사물과 개념을 표현한다.”(<학문의 진보>, 1606)

자연의 탐구를 위해 보편 문자 혹은 “진정한 문자(real character)” 체계를 개발하자는 논의의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보편 문자의 기획에 한자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 눈길이 간다. 한자의 상형성을 유럽에 최초로 보고한 서양인은 크루즈(Gaspar da Cruz, 1520~1570)다.

“중국 사람들은 고정된 철자(letter)를 사용하여 쓰지 않는다. 그들은 문자(character)를 사용하며 그것으로 단어를 만든다. 따라서 매우 많은 수의 부호(character)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부호로 하나의 사물을 상징한다. 예를 들어 오직 하나의 부호로 하늘을, 또 다른 부호로 땅을, 또 다른 부호로 사람을 뜻한다.”(<중국 문물에 대한 보고>, 1569)

한자를 하나의 부호로 본 크루즈의 생각은 멘도사(Juan Gonzalez de Mendoza, 1545~1618)의 <중국의 문물과 의례와 견습에 관한 역사>에서도 발견된다. 베이컨의 생각은 멘도사의 견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룰루스(Raymond Lullus, 1232~1315)의 ‘조합술(ars combinatoria)’도 보편 문자의 기획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한자의 상형성이 베이컨의 ‘보편 문자’의 기획에 영감을 주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보편 문자를 사용하자는 베이컨의 제안은 새로운 학문들이 사용하게 될 기호 체계(Novum Organum)의 개발과 표준화의 논의로 이어진다. 요컨대 화학·의학·수학·음악이 자연언어가 아닌 개별 학문들에 적합한 특수 부호와 기호를 만들어 사용하자는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이 논의를 바탕으로 화학의 개별 원소들을 표현하는 표기 체계와 수학의 부호 체계와 음악의 악보와 음가를 표시하는 부호들이 만들어졌다. 이 부호들은 16세기 말부터 유럽의 지성계를 달구었던 ‘보편 언어(universal language)’ 혹은 ‘보편 문자(universal character)’ 담론의 소산들이다.

먼젤로(David E Mungello)는 ‘중국 문자와 보편 언어’에 대한 연구(참고, <진기한 나라 중국>)에서 17세기에 서양의 과학자들이 근대 과학의 기호와 부호를 사용하자는 제안과 기획에 사물을 그대로 반영하는 상형문자인 한자가 상당 정도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설득력이 있다. 베이컨의 제안이 존 윌킨스나 조디 달가르노와 같은 그의 후계자들, 화학자 로버트 보일이나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과 같은 학자들과 독일의 라이프니츠와 같은 철학자에게로 이어진 것은 분명하기에. 새로운 학문들의 부호와 표기 체계의 표준화를 위해 영국에서는 1662년에 왕립 학술원이,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각각 1666년, 1700년에 학술원이 창설되었다.

표준화의 과정을 거친 근대의 새로운 학문들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새로운 부호와 기호를 사용하는 학문들과 학술 아카데미의 창설은 서양의 학문 체계를 이전까지의 기독교 교리 중심의 교육 방식과 그리스·로마의 고전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 전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통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자연현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언어가 아닌 새로운 부호 체계를 수립하려는 기획에 한자의 상형성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니다.

■ 번역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말이 나온 김에, 서양의 근대화가 아니 세계의 근대화가 서양만의 내적 동력이 아님을, 즉 동서양 교류의 소산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겠다. 마찬가지로 17세기가 중요하다. 이 시기는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물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17세기는 중국에서 동양 고전과 서양 고전의 번역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매우 체계적이고 심도 깊게 동양과 서양 학자들의 토론과 논의를 통해 이루어져 출판되었던 시기였다.

번역은 양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서양 고전을 한문으로, 다른 하나는 동양 고전을 라틴어와 불어로 옮기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천문학>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일부, 유클리드의 <기하학>, 키케로의 <우정론>의 일부가 <명리탐> <환유전> <기하원본> <교우론>의 서명으로 한역되었다. 후자의 경우, 사서(四書)의 일부가 <중국인 철학자 공자>의 서명으로 라역(羅譯)되었다. 작업의 중심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중국 대학자들과의 토론과 논의를 심도 있게 나누었고, 이를 바탕으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17세기 독일 예수회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가 편찬한 백과사전 <중국도설(China Ilustrata)>(1667)에 실린 마테오 리치(오른쪽)와 서광계.

17세기 독일 예수회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가 편찬한 백과사전 <중국도설(China Ilustrata)>(1667)에 실린 마테오 리치(오른쪽)와 서광계.

명말에는 리치(Matteo Ricci, 1552~1610)와 알레니(Giulio Alleni, 1562~1649)와 같은 선교사들이 명의 고위관료였던 이지조(李志操, ?~1630)나 서광계(徐光啓, 1571~1630)와 같은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다. 번역의 과정에서 서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중핵 개념들과 동양 사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핵심 개념들이 직접적으로 맞대응되면서 비교되었다. 라역 <중국의 철학자 공자>는 1687년에 루이 14세의 칙령으로 파리의 왕립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책은 중국 학문의 특징과 공자의 생애를 다루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서문과 <대학> <중용> <논어>를 마지막으로 일종의 부록으로 중국 역사를 편년체 방식으로 서술한 <중국연대기>를 담고 있다. 사서에서 <맹자>는 빠져 있다.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학문을 소개하려 했던 번역 기획과 관련되어 있다. 라역들은 루이 14세와 같은 유럽의 왕들과 볼테르, 라이프니츠, 볼프 등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세계화는 동서의 교류의 소산이다

17세기 동서 교류는 크게 세 가지 점에서 특징적이다. 먼저 동양에서 사용하는 주요 개념들과 용어들이 이 번역 과정을 통해 탄생했고 서양의 근대와 근대 학문들이 시작하는 데 있어서 동양의 학문과 정치 체계가 서양이 동양에 끼친 그것에 못지않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참고로 리치의 전기에 해당하는 <그리스도교 중국 원정>이 중요하다. 책은 동양의 학문과 제도에 대한 정보를 서양 세계에 체계적으로 전하는 문헌이다. 예컨대 책의 제1장에는 중국의 정치 제도, 통치 방식, 학문과 사상이 체계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황제라는 절대 권력을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는 중국의 중앙집권적인 정치 제도에 대한 마테오 리치의 관찰과 보고는 루이 14세와 같은 프랑스 왕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루이 14세는 특히 중국의 관료 선발 시험인 과거 제도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중국의 통치 체제를 가능케 하는 교육 제도와 그 교육의 실제 내용이었던 <사서>를 읽고 싶어했다는 사실에서 잘 확인된다. 동양 고전이 17세기 말에 서구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퍼지게 된 것도 실은 루이 14세의 후원 덕분이었다. 다음으로, 17세기 중국에서 벌어진 동양과 서양의 만남은 상대적으로 평화적이었다. 이는 서양에서 온 예수회 신부들이 서양의 종교와 사상을 처음부터 이입 혹은 주입하려 하지 않았고 동양의 학문, 문화, 종교와 서양의 그것들을 비교·연구해서 이를 기반으로 서양 종교를 소개하고 뿌리내리게 하는 적응주의 전략을 취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세계관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 중국 원정>에는 전례 논쟁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들이 보고되어 있다. ‘예수회’를 추방하려는 반대 움직임과 심지어 충돌이 일어났다고 전한다. 충돌은 동양 정신과 서양 정신의 정면충돌로 확산되었다. 마르티네스가 저술한 <천학전개(天學傳槪)>와 반(反)그리스도교 관료인 양광선(楊光先, 1597~1669)이 지은 <벽사론(闢邪論)>이 충돌의 최전선에 맞붙었던 문헌들이다. 충돌의 요지는 이렇다. 중국인의 기원이 아담(Adam)에 있다는 마르티네스의 주장에 양광선이 <부득이(不得已), 나도 어찌 할 수 없다>를 통해 반박한다. 그러자 마르티네스의 동료인 불리오가 문헌 <부득이변(不得已辯), 나도 달리 할 수 없다>를 갖고 재반박한다.

충돌은 서양의 신부들 사이에서도 벌어졌다. 리치의 적응주의에 대한 롱고바르디(Nicolo Longobardy, 1559~1654)의 비판이 그것이다. 중국인들의 전례 문제를 종교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문화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제례 의식을 문화적 활동으로 보려는 것이 리치의 입장인 반면, 롱고바르디는 이를 미신과 우상을 섬기는 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논쟁의 추이와 결과를 잘 보여주는 문헌이 <중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천에 대한 숭배와 공자의 문묘와 조상에 대한 숭배에 대하여>다. 전례에 대해 강희제는 중국의 제례 의식이 소위 서양적 의미의 종교 행위가 아니고 일종의 문화 행사라고 명시적으로 밝힌다. 그런데 이 충돌은 완료된 것이 아니고 현재 진행형의 부딪힘이다.

마지막으로 세계화는 동양과 서양 문명이 교류하면서 시작되었다. 단적으로 만력제의 요청에 따라 제작한 리치의 지도를 제시하겠다. 지도 제작의 공을 인정한 명의 만력제는 예수회 신부들이 북경에 머물도록 허락한다. 그들이 머물면서 학문과 포교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제공한다. 반전은 여기서부터다. 중국인들은 지도를 보고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중국의 영토가 세계의 10분의 1도 안되고 중국이 세계의 중심도 아니라는 점이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리치의 기록이다.

“나(아마도 리치)는 희망한다. 언젠가는 왕 자신이 혹은 그의 후계자 가운데 어떤 이가 지도와 그 해설을 읽고서 천주의 법을 배우려는 열정을 품게 되기를 말이다. 지도가 중국인들을 낙담시킨 것은 분명하다. 자신들의 광활한 왕국이 세계의 한구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말이다. 가장 크지 않다는 사실에 그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중국 원정> 584쪽)

만력제에게는 아마도 다르게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치는 라틴어 문서에 중국인이 생각하듯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한구석에 위치한 나라에 불과하다고 적고 있다. 리치의 생각을 이어받은 알레니는 <직방외기(職方外紀)>라는 책을 통해서, 책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중국 너머의 세계”를 소개하면서 지구는 둥글기에 중심이 따로 없고 오로지 중심은 하늘의 천주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리치의 지도와 알레니의 저술은 화이관(華夷觀)을 중심으로 중화주의를 재고함에 있어서 의미있는 언표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와 알레니가 지은 <직방외기>는 당시의 조선 지식인에게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흔적은 이언진(1740~1766년)의 ‘해람(海覽, 일본기행시)’에서 발견된다.

“지구의 같고 다른 차이와 바다의 섬들이 크고 작음은/ 서양 선비 리마두(마테오 리치)가 치밀하고 엄격하게 갈라 놓았다네.”

조선도 이미 18세기에 서양 학문의 영향권에 들어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세계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는 소리다. <곤여만국지도>와 같은 지도와 <직방외기>와 같은 문헌에 의해 중화주의 세계관이 흔들리면서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세계화’는 이미 명말에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물론 세계화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정확히 100년이 지난 1592년에 임진왜란, 서양인의 말을 빌리자면, “코라이 전쟁(Bellum Corai)”이 일어난다. 나는 이 전쟁도 소위 ‘세계화’로 말미암아 발발했다고 생각한다. 임진왜란이 물론 동아시아 전쟁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서양의 동진(東進) 운동의 연장선에서 발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라이 전쟁’은 세계사의 관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구조가 1592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리치의 기록이다.

“남경에 당도했을 때에, 모든 곳이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일본인들이 그들의 영토로부터 출발해서 적의로 가득 찬 군대를 보내어 조선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 그 당시에는 일본인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다.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다. 최근에 행동거지와 용모가 수상한 사람이나 모든 면에서 떠돌이로 여겨지는 사람을 집안에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지붕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조각배에서 찌는 더위를 견뎌야만 했다.”(<그리스도교의 중국 원정> 324~325쪽)

코라이 전쟁이 중국 본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관찰이다. 중국 본토 전체가 전시(戰時) 체제로 변했다고 한다. 마테오 리치 일행이 남경의 조그만 배에서 더운 여름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모두 전쟁 탓이었다고 한다. 이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화는 이렇게 슬픈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일단은 여기까지다. 근대화와 세계화가 서양만의 공은 결코 아니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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