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기념식서 문재인 대통령 안고 운 김소형씨 "아버지처럼 포근했다"

온라인뉴스팀 sportskyunghyang@kyunghyang.com 입력 2017. 5. 18.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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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오신 것처럼, 기분 좋았고, 포근했습니다.”

‘5·18 둥이’ 김소형씨(37)가 문재인 대통령을 안고 울었다. 김씨는 1980년 5월18일이 생일이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바로 그날 전남도청 앞에 있던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나이는 5·18 기념주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2010년 30주년일때가 서른살, 37주년을 맞은 올해 서른 일곱살이 됐다.

그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 품에 안겨 구슬피 울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김씨에게 ‘5·18’은 비운이 서려있는 날이다. 자신의 생일이면서 사실상 아버지를 잃은 날이어서다. 아버지는 정확히 5·18후 나흘째 되는 날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았다.

그는 이날 기념식에서 아버지에게 바치는 ‘슬픈 생일’이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낭독했다.

“철없을 때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 엄마는 지금도 참 행복하게 살아계셨을텐데.… 한 번도 당신을 한 번도 보지못한 저가, 이제 당신보다 더 커버린 어른이 돼서 비로소 당신을 불러봅니다. 아버지, 당신이 제게 사랑이었음을.…사랑합니다. 아버지”

추모사를 마친 김씨가 눈물을 훔치며 무대를 내려갈 즈음, 자리에 앉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던 문 대통령이 김씨를 뒤따라가 껴안았다.

“울지 마세요. 기념식 끝나고 아버지 묘소에 참배하러 같이 갑시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유가족인 김소형씨를 위로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김씨는 “문 대통령의 위로의 말에 더 많은 눈물이 쏟아졌지만 대통령 옷에 묻을까봐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면서 “아빠가 안아준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김씨는 ‘아버지의 역사’를 줄줄이 들려줬다.

아버지 김재평씨(당시 29세)는 당시 전남 완도 수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11시11분 기다리던 딸이 태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한밤중인데도 광주로 출발했다. 하지만 광주로 가는 길은 이미 계엄군이 차단하고 있었다. 가끔 차를 얻어타기도 했지만 대부분 걸어서 나주까지 왔다. 하지만 광주시내를 들어갈 수 없었다. 나주에서 화순쪽으로, 다시 담양으로 돌고돌아 서구 화정동 그의 동생집에서 산모와 아기를 만날 수 있었다. 완도를 떠난지 이틀만이었다.

딸을 얻은 아버지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21일 오후 해질녘이 되자 광주~송정 도로를 지키던 계엄군이 갑짜기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갓난이가 울음을 터뜨렸고, 아버지는 솜이불로 창문을 막으려고 일어섰다. 그때 우리창을 뚫고 날아든 총탄이 아버지를 쓰러뜨렸다.

김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안 것은 초등학교 2학년때다. ‘광주보상법’이 만들어지면서 관련 서류를 챙기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이를 털어놨다. 그때까지는 완도 보길도에서 함께 살던 외할아버지로부터 “아빠가 좋은 일을 하시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전남 완도 보길도 외가에서 네살때 외할아버지와 함께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고인이 된 교사출신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고 말했다.

김씨는 “계엄군이 뭔지 잘 몰랐지만, 외국 군대가 쳐들어왔나 하는 생각을 했고, 몇년동안 그게 정말 혼란스러웠다”면서 “그때부터 ‘5·18’이 궁금해졌고,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혼자 ‘5·18 책’을 읽어보기도 하고, 관련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때는 ‘5·18 전국학생 글쓰기 한마당’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써내 대상을 받았다. 조선대 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하면서 ‘아버지 상(像)’을 만들어보려 했으나 그때마다 눈물이 쏟아져 그만뒀다.

그는 옛 전남도청 근처에서 13년째 ‘웨딩 플래너’로 일하고 있다. 올해 안에 결혼도 하겠다고 귀뜀했다.

그는 “오랫동안 미뤄둔 아빠 조각상 하나를 완성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오늘 행사가 끝난 후 대통령께서 아버지 묘소 참배 약속을 지켜주셨다”고 거듭 대통령에게 감사를 말을 했다고 경향신문은 전했다.

<온라인뉴스팀 sportskyunghy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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