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천장' 깬 피우진의 '걸크러시' 어록 다시 보니..

김지숙 입력 2017. 5. 18. 17:56 수정 2017. 5. 18.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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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 투병 중 받은 유방 절제술로 강제전역때
"남성 군인처럼 가슴없는 게 문제될 줄 몰랐다"
군대 성차별도 직언.."현실은 여군에게 치마 강요"

[한겨레] “이보다 더 짜릿하고 감동적 인사는 없었다. 역대급 홈런이다”(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그녀를 국가보훈처장에 내정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다”(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지난 17일 피우진(61) 예비역 중령이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되자 ‘피닉스’(피 처장의 항공 호출명)의 ‘재도약’을 반기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여성 보훈처장은 1961년 보훈처 설치 이후 처음이다. 주로 보수 성향의 예비역 장성급 남성이 도맡아온 보훈처장에 진보 성향의 예비역 영관급 여성을 임명해 파격적 인사로 꼽힌다. 상이군인으로서 본인이 보훈대상자인 피 보훈처장은 이날 “보훈은 안보의 과거이자 미래”라며 “보훈 가족 중심으로 보훈정책을 펼쳐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한민국 1세대 헬기 조종사로서 ‘유리 천장’을 깬 인물로 유명하다. 1979년 육군 소위로 임관해 특전사 중대장 육군 항공대대 헬기 조종사 등을 거치며 25년간 1300여 시간 비행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2002년 유방암 투병 중 받은 ‘유방 절제술’이 군 신체검사에서 장애 판정을 받아 정년을 3년 앞둔 2006년 11월 강제 전역해야 했다. 이후 이에 항의하는 행정소송을 진행해 2008년 5월 복직했다. 그가 2006년 ‘부당 강제 전역’을 당하며 펴낸 자서전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에는 군대 내 성희롱·성차별을 고발하는 내용이 담겨 논란이 됐다. 화제가 됐던 그의 발언과 일화들을 자서전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다시 소개한다.

“남성 군인과 똑같이 가슴이 없다는 게 문제가 될 줄 몰랐다”

피우진 신임 국가보훈처장이 육군 항공단에 근무할 때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유방암 판정을 받은 것은 2002년 10월, 비극이 시작된 것은 2005년이었다. 유방암을 이기고 3년이나 멀쩡히 군 생활을 했지만 육군 논산병원에서 현역 간부 정례 신체검사를 받던 중 심신장애 등급 2급을 판정받았다. 양쪽 유방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암이 발생한 것은 왼쪽 유방이었지만, 그는 헬기 조종사로서 중요한 균형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오른쪽도 절제했다. ‘양쪽 유방절제’는 군인사법 시행규칙에 따라 장애 2급에 해당하며, 장애등급 1~9급이면 전역 처분된다. 군 당국은 정년을 3년 앞둔 그를 ‘해고’나 다름없이 내쫓았다.

2006년 10월 <한겨레21> 인터뷰에서 그는 “남성 군인과 똑같이 가슴이 없다는 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군 생활과 무관한 신체 일부가 없다는 이유로 복무 희망자를 강제 전역시키는 군 인사 시행규칙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복무 능력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 여성 1호의 날개는 꺾이는가 ) 당시 그가 제시한 체력검정 보고서를 보면, 팔굽혀펴기 23회 특급, 윗몸일으키기 58회 특급, 1.5km 달리기 9분30초 1급으로 그의 체력은 나무랄 데 없었다. 전역 판정을 받고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도보로 전국 종주를 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국방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벌여 1년7개월의 법정 공방 끝에 승소해 2008년 복직했다. 하지만 대령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계급정년으로 전역했다.

피우진 신임 국가보훈처장. 출판사 삼인 제공

“여군은 결코 치마를 내세우지 않았지만, 현실은 여군에게 치마를 강요한다” 2006년 11월 강제 전역 뒤 그는 자서전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삼인)를 펴냈다. 그는 책에서 “나의 군인 정신은 나라를 위해서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나의 적은 북쪽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주변의 남군과 문서 쪼가리들이었다”며 군대 내 만연한 성차별을 통렬히 비판했다.

부대 회식을 하면 여군은 무조건 상급자 옆에 앉히며, 마치 접대부를 붙이듯 여성 중간 간부가 이를 주도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었다. 책의 ‘4성 장군과의 악연’이라는 챕터에 당시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낮술을 마시던 사령관이 일직 사관에게 전화를 걸어 특정 여군 부사관의 이름을 거론하며 술자리로 보내라고 명령했고, 당시 대위였던 피 보훈처장이 이를 거절하다 사령관의 압력에 못 이겨 외출 승인을 낼 때 사복 대신 ‘전투복’을 입혀 보낸 것이다.

여군 일직 사관이 전화를 걸어와서는 군사령관이 어느 여군을 보내라고 명령했다면서 외출 승인 요청을 했다. 군사령관이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서 분위기를 띄울 여군을 보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미 여군 부사관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군사령관이 툭하면 술자리에서 여군들을 불러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불러서는 옆에 앉혀 놓고 술 시중을 들게 하면서 같이 블루스를 추거나 노래를 부르게 하는데, 접대부 노릇을 하는 것 같아서 정말 싫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올 때는 꼭 예쁜 사복을 입고 오게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아이 아프다고 해.” 막아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에 나는 일직 사관에게 그렇게 지시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얼마 후였다. 이번엔 밤이 아니고 대낮이었다. 공관장이 내게 전화를 걸어서는 군사령관의 명령이라면서 당번 요원과 의전과 부사관 등 몇 명을 보내달라고 했다. 군 사령관이 골프를 치고 난 후 몇 분과 함께 낮술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중략) 10분 간격으로 빨리 보내라는 전화가 왔다. 나중에는 원스타인 본부사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는 마구 욕을 해댔다. 너 때문에 내가 죽는다, 당장 아이들 보내라 하는 말이었다. 더 이상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생각 끝에 여군 부사관들에게 전투복을 입도록 했다. 전투복을 입고 가면 아무래도 사복 차림과는 느낌이 다르니까 접대부 다루듯 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피 보훈처장은 당시 이 일로 ‘미운털’이 박혔고, 보직 해임을 당했다. 그는 2006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 일이 1998년 대위 시절 겪었던 일이라고 밝혔다. (▶ 현역 여군 중령 피우진이 털어놓은 군내 여성인권 실태)

피우진 신임 국가보훈처장이 2006년 11월 강제전역 뒤 도보로 전국을 종주하는 모습. 출판사 삼인 제공

그의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린 2001년 ‘사단장 성희롱 사건’도 책에 담겼다. 당시 한 육군 사단장이 갓 임관한 여군 장교를 성추행한 사건이 벌어졌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이때 합참에 근무하던 피 보훈처장이 유일하게 언론 인터뷰에 응한 것이다. 그는 사건 경과를 설명하며 “회식 자리에 불려갈 때부터 강제로 입맞춤을 당한 순간까지 여군 장교가 ‘싫다’는 의사 표시를 할 만한 분위기가 될까”라고 반문하며 “조직 보호라는 미명 아래 모든 집단이 자기들의 치부를 감추기에 급급하다면 우리는 서로서로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비슷한 사건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엄정한 처리를 하면서 조직 문화 자체를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피우진 신임 국가보훈처장의 여군 중대장 시절. <한겨레> 자료사진

“두 번씩이나 군복을 벗어야 했던 상황, 나를 지켜준 것은 여군 자매들”

2009년 그는 중령 전역식에서 가수 방미의 ‘날 보러 와요’를 불렀다. 이날 고별사를 보도한 1인 미디어 ‘미디어 몽구’가 공개한 영상(▶피우진 중령 전역식 고별사)을 보면, 30여년간의 군 생활을 마무리하는 그 자리에서도 그는 정복을 입지 않고 전투복을 입고 있다. 그는 “군인 피우진에서 개인 피우진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마지막으로 전투복을 입었다. 군복 중 유일하게 모든 군인들의 통일된 복장으로, 제가 희망했던 군인의 상징이었기에 이 군복을 입었다”며 군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밝혔다. 이어 고 엄옥순 대령, 동기 양혜정 중령, 특전사 전우 박경자 상사 등 함께 했던 여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소규모 다과회로 항공학교 관계자 등 군인 20여명과 민간인 30여명 등이 참석한 조촐한 전역식이었다.

피우진 신임 국가보훈처장이 2009년 자신의 중령 전역식에서 고별사를 하는 모습. 미디어몽구 제공

그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상황, 두 번씩이나 군복을 벗어야 했던 상황, 암과의 전투, 그럴 때마다 나를 지켜준 것은 여군 자매들이었고, 형제자매들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강제 전역 당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지켜주었던 이 분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랑했던 군과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인권연대를 만났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육군 여군이 모체가 되어 각 군 사관학교를 개방하고, 제대로 된 여성 장군이 나오길 기대한다는 바람도 잊지 않았다. 그는 “외로울 땐 나를 보러오세요~ 울적할 때는 나를 보러 오세요~ 깊은 밤 잠 못 들 땐 전화를 해요”라는 소절을 부르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애국가도 임을 위한 행진곡도 씩씩하게 부르겠다”

18일 오전 국립광주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돌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는 9년 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됐다. 손에 손을 잡고 이 노래를 제창하는 문재인 대통령 옆에 피우진 보훈처장도 함께 했다. 그는 전날 청와대 춘추관에서 임명 소감을 말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것이냐’는 질문에 “애국가도, 임을 위한 행진곡도 씩씩하게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기념식 이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그는 취임 일성으로 조직 개혁을 예고했다. 그는 “지금까지 추진해 왔던 보훈제도를 뒤돌아보고 불합리하거나 시대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군대라는 정글에서 군의 불합리함과 싸웠던 ‘아마조네스’는 이번에도 ‘적폐’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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