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이 성찰하고 더 깊게 파고들겠습니다

2017. 5. 1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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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 29돌] 편집국장이 드리는 글
[한겨레]
스물아홉 해는 세대가 바뀔 만큼 긴 세월입니다. 사람도 세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창간 정신을 되새기는 한편으로, 3민(민주·민중·민족)의 가치와 더불어 ‘평화’의 가치를 중시할 것입니다. 남과 북의 평화는 물론이고 다수자와 소수자의 공존·공생 등 사람 사이의 평화뿐만 아니라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남방돌고래 제돌이와 같은 비인간 인격체를 포함한 뭇 생명체와의 공존, 사람과 사이보그·안드로이드·로봇의 공존 등으로 시야를 쉼없이 넓히겠습니다.

1988년 5월15일, <한겨레신문>이라는 이름의 새 신문 창간호 50만부가 온 나라에 뿌려졌습니다. 6월항쟁의 성과인 직선제 대선에서 ‘양복 입은 군인’이 대통령이 된 충격의 와중에,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라고 굳게 믿은 이들의 헌신과 간절함으로 <한겨레신문>은 세상에 나왔습니다.

1988년 5월15일 <한겨레신문> 창간호

스물아홉 해가 흘렀습니다.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1988년 5월15일 부산에서 새 신문을 나눠주던 ‘인권변호사 문재인’은 닷새 전인 10일 국회에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취임선서를 했습니다. 그는 2013년 5월15일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한겨레 창간 25돌 기념행사에 참석해 축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간 당시 한겨레 부산지사장이었고 창간 발기인부터 시작해서 창간 주주·독자, 창간위원 등 ‘창간’ 자가 들어간 일은 다 했고 그 기억을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공정한 언론을 바로 세우기 위한 한겨레의 위대한 도전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문재인 대통령은 창간 때 구입한 5000원짜리 한겨레 주식 380주(190만원 상당)를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권력’과 ‘언론’의 길은 다릅니다. 문 대통령은 주권자인 국민(헌법 1조)의 뜻에 따라 헌법 정신이 국민의 삶에서 오롯이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겨레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진보언론의 길을 걸으려 애쓰는 한편으로,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 권력 감시의 책무를 다하는 데 헌신해야 합니다. 한겨레는 새 대통령과 정부의 정책 수행을 때로 지지하고, 때로 비판하게 될 것입니다. 감정 섞인 비난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편향’(눈먼 지지)도 ‘반편향’(눈먼 비판·비난)도 한겨레의 길이 아닙니다. ‘권력’을 대하는 ‘언론’의 비판적 거리·태도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2016년 9월20일치 <한겨레> 1면 머리기사 제목은 이랬습니다. “대기업돈 288억 걷은 K스포츠재단 이사장은 최순실 단골 마사지센터장”. 선출된 권력도 임명된 공직자도 아닌, 어둠 속의 ‘최고권력자’ 최순실의 이름이 한국 언론에 처음 등장한 기사입니다. 그것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실체를 드러내, 1700만명의 ‘촛불시민’을 광장으로 이끈 조명탄이었습니다.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이 이어졌습니다. 박근혜 정부에 ‘감정’이 있어서 쓴 기사가 아닙니다. 권력은 유일한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따라 공적으로 투명하게 작동해야 하며, 언론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앞으로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다만 한겨레 주주·독자를 포함한 시민들과 함께 고민하며 해법을 모색해야 할 ‘당혹스런 현실’이 있습니다. 종이신문은 세계 모든 곳에서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2016 한국언론연감>(연감)을 보면, 한국의 종이신문 구독률은 20년새 69.3%(1996년)에서 14.3%(2015년)로 폭락했습니다. 그 추락의 속도만큼, 아니 그보다 빠르게 인터넷 뉴스의 성장세가 가파릅니다. <연감>을 보면, 주 5일 이상 접한 매체로 신문이 7.1%인데 스마트폰은 73.7%입니다. 지난해 말 기준 스마트폰 사용자는 4641만8474명으로, 대통령선거 유권자(4247만9710명)보다 많습니다. 시민들은 종이신문이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읽고 봅니다.

종이신문은 이대로 몰락할까요? 주목해야 할 추세가 있습니다. 종이신문의 구독률·열독률이 수직 낙하하는 반면, 종이신문사에서 취재·보도한 뉴스의 결합열독률(종이신문·고정형인터넷·이동형인터넷·일반휴대전화·IPTV를 통한 뉴스 수용)은 오히려 상승하고 있습니다. 2011년 76.5%에서 2016년 81.8%로 꾸준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종이신문 구독자는 줄지만, 종이신문사의 뉴스를 더 많은 시민이 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신문사가 ‘디지털화’를 주문 외듯 하는 배경입니다.

문제는 종이신문의 황혼 그 자체가 아닙니다. 뉴스를 취재·보도할 기자들, 취재 조직을 안정적으로 유지·확대할 물적 기반의 붕괴 추세가 가파릅니다. 다시 <연감>을 보면, 한국의 일간지 수입에서 인터넷 콘텐츠 판매 수입은 3.9%뿐입니다. 종이신문 구독률 추락에 따른 경영수지 악화를 막아내기엔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수준입니다.

‘좋은 기사’를 돈 내고 보는 사람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반면 포털 등 디지털 세계에 그득한 뉴스는 공짜입니다. 그 뉴스를 세상에 내놓은 이들한테 마땅한 보상이 없다는 뜻입니다. <연감>이 “‘좋은 뉴스’ 실종을 초래한 주요 원인으로 언론사의 수익 저하와 포털 중심의 뉴스 소비가 거론된다”고 지적한 건 과장이 아닙니다. “진정한 위기는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던 20세기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 떠오르는 당혹스런 격변의 시기입니다.

한겨레신문사는 주식회사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이윤’이 목적은 아닙니다. 한겨레가 탄생과 존재의 이유인 ‘좋은 저널리즘’을 구현하며 장기 지속하려면 좋은 기자와 취재 조직을 유지·확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좋은 기사를 돈 내고 보는 시민’의 존재가 필수적입니다.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시민단체 등 비영리기구가 지속하려면 후원회비를 내는 시민의 존재가 필수적인 이치와 다를 게 없습니다. 한겨레는 디지털 시대에도 새 길을 여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많은 시민들이 지갑을 기꺼이 열고 싶은 ‘좋은 기사’를 세상에 내놓는 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한겨레 안팎에서 비판과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사실을. 사회적 약자의 고통스런 삶의 현장에 한겨레 기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 한겨레는 늘 가르치려고만 드는 ‘꼰대’처럼 보인다, 한겨레가 시대 변화에 앞서가기는커녕 보조도 맞추지 못하고 있다, 한겨레의 창간 정신이 퇴색했다, 한겨레가 오만해졌다, 한겨레의 혁신 디엔에이(DNA)가 잠자고 있는 게 아니냐는 등의 지적이 있습니다. 과한 비판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뼈아프게 받아들입니다. 달라지려 애쓰겠습니다.

창간 정신을 되새기겠습니다. “새 신문은 민주주의적 모든 가치의 온전한 실현, 민중의 생존권 확보와 그 생활수준 향상, 분단의식의 극복과 민족통일의 지향을 주요 방향으로 삼을 것입니다.”(1987년 9월23일 ‘새 신문 창간 발의 선언문’) 창간 때부터 한겨레의 3대 가치인 민주·민중·민족, 3민의 가치를 바꿔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난 스물아홉 해 동안 한겨레 구성원들이 이 가치를 쉼없이 반추하기를 게을리한 게 아닌지 되물어야 할 때입니다. 대선 직전 한겨레가 1면 머리기사로 “농민 없는 대선”(5월1일치), “황금연휴에 공항 지키는 노동자들, ‘세계1위’ 인천공항 뒤엔…6831명 비정규직의 땀”(5월4일치), “‘보이지 않는’ 1%의 유권자”(5월6일치) 등의 기사를 비중 있게 다룬 건, 창간 정신을 오늘도 살아 숨쉬게 하는 데 태만했다는 반성의 작은 결과물입니다.

스물아홉 해는 세대가 바뀔 만큼 긴 세월입니다. 사람도 세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창간 정신을 되새기는 한편으로, 3민(민주·민중·민족)의 가치와 더불어 ‘평화’의 가치를 중시할 것입니다. 남과 북의 평화는 물론이고 다수자와 소수자의 공존·공생 등 사람 사이의 평화뿐만 아니라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남방돌고래 제돌이와 같은 비인간 인격체를 포함한 뭇 생명체와의 공존, 사람과 사이보그·안드로이드·로봇의 공존 등으로 시야를 쉼없이 넓히겠습니다. 예컨대 흔히 민족주의적 과거사로 인식돼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위안부 문제 관심 갖는 10·20대…‘소녀상 세대’의 탄생”(4월7일치 2면) 등을 통해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재해석하려 했습니다. 대선 직전 ‘기자가 그린 대선여지도’라는 정책 보도 연재물, 예컨대 “‘애니멀 피플’ 1천만명, 교감할 후보는 누구?”(4월21일치 1·8·9면), “성소수자도 시민이다”(5월5일치 1·8·9면) 등을 통해 지금껏 대선 정책 보도에서 비중 있게 다루지 않던 새 의제를 제기하려 했습니다. “유기견을 ‘퍼스트도그’로…토리 복남이 뒷발이 청와대 가서 살자”(4월25일치 2면) 등을 통해 동물권에 대한 대통령과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려 했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모두 ‘평화’ 가치를 확장하려는 문제의식의 작은 결과물입니다.

평화의 가치가 담긴 기사를 더 많이 더 풍부하게 보도하겠습니다. 창간 30돌인 내년에는 또 다른 30년을 내다보며 ‘평화’ 가치에 대한 한겨레신문사 차원의 좀더 체계화된 의견을 밝힐 것입니다. 한겨레는 ‘전쟁이 없는 상태’로서 소극적 평화를 넘어 ‘정의의 실현’으로서 적극적 평화를 추구할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완성태가 없습니다. 경계 밖에 버려진 존재가 단 하나라도 있으면 멈출 수 없는 무한운동과 같습니다. 한겨레는 소외된 존재가 있는 한 좌절하거나 포기할 권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독자를 포함한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더 기울이겠습니다. 뉴스 생산 과정에 독자와 시민의 참여를 넓히려 노력하겠습니다. 이미 운용하고 있는 ‘시민편집인’과 ‘열린편집위원회’ 제도에 더해 한 해 두 차례씩 한겨레의 보도에 대한 독자의 의견과 판단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조사를 벌이겠습니다. 지난 대선 과정에 ‘<한겨레> 대선 보도의 공정성 여부’를 파악하려 진행한 독자 조사 결과는 금요일(19일)치 신문에 대선 보도 분석·평가 기획기사와 함께 전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독자 조사 결과를 성실하게 공개하겠습니다. 인터넷한겨레를 통해 기사를 접하는 누리꾼들의 의견과 평가를 체계적으로 파악해 취재·보도에 반영할 방안도 마련하겠습니다.

고여 썩어가는 물이 되지 않으려 애쓰겠습니다. 권력과 자본, 세상의 타락과 부패를 견제할 소금이 되려 애쓰겠습니다. 언론은, 기자는 편한 자를 불편하게 만들고 불편한 자를 편안하게 만드는 ‘질문하는 자’여야 한다는 당위를 실천하려 애쓸 것입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들과 함께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경구를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창간 30돌인 내년 이맘때에는 더 나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제훈 편집국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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