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전략적 모호성'은 '박근혜 시즌2'로 가는 지름길

2017. 5. 14.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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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종대의 군사
문재인 정부의 '안보 체크리스트'

[한겨레]

문재인 대통령은 우선 법 절차를 무시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의 추가 배치부터 중단해 미국과 협상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북핵문제 해법에 대한 우리 정부의 명확한 입장을 밝혀 북-미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도 열어야 한다. 성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서애 유성룡이 쓴 임진왜란의 기록 <징비록> 첫머리에 나오는 장면이다. 말년의 신숙주에게 성종이 물었다. “경은 짐에게 이를 말이 있는가?” 신숙주는 “왜(일본)와 절대 실화(失和)하지 마옵소서”라고 진언한다. 왕명으로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온 신숙주에게는 항해술과 선박 건조술에서 드러난 일본의 놀라운 발전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해양력이었다. 왕명으로 <해동제국기>를 저술한 신숙주는 일본의 영향력이 언젠가 조선으로 파급될 것을 깊이 우려했다. 성종은 진언에 따라 몇 번 사신을 일본에 보냈으나 얼마 후 그것마저 멈추었다.

이를 두고 유성룡은 “우리가 신숙주의 충고를 무시한 것이 임진년의 전란을 불러왔다”고 탄식했다. 하지만 정작 유성룡의 <징비록>을 탐독한 당사자는 조선의 엘리트들이 아니라 조선 정벌에 실패한 교훈을 찾던 일본의 지도층이었다. 조선 후기 정조 시절에 일본에 간 사신이 서점마다 <징비록> 일본판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 걸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에 일본군과 정부 지도자들은 모두 <징비록>을 탐독한 엘리트들로서 300년 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신숙주와 유성룡의 경고

만일 신숙주나 유성룡이 현대에 살아있다면 새로 출범하는 문재인 정부에 어떤 진언을 할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이 모두 한반도를 향하고 있음을 주목해 한반도에서의 지정학적 위기를 경고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국방부는 “고고도 요격미사일시스템(사드)은 주한미군이 미군과 한반도 방어를 위해 배치하는 방어 무기로 미국의 미사일방어(MD)와 무관하다”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왔다.

그러나 지난 4월26일 해리 해리스 미 태평양사령관은 미 의회에 보낸 서면답변에서, 사드 배치의 주체는 주한미군사령부가 아니라 태평양사령부와 미 국방부 미사일방어국(MDA)이며, 배치 이유도 한반도 방위에 있다기보다 중국과 북한을 상대로 한 미국의 동아시아 통합공중미사일(IAMD) 전략구상의 일환임을 인정했다. 그에게 순수하게 한반도 방위를 위해 투입되는 전략자산이란 없다. “통합공중미사일은 태평양사령부의 최우선 임무”라고 전제한 해리스 사령관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한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고도 했다.

한반도, 임진왜란 때 조선과 흡사
미-중 한반도서 격돌 가능성 높아
미, 중 압도하려 전략자산 배치
중, 근해에서 미 접근 차단 주력 사드 추가 배치부터 중단하고
핵동결로 미 설득 나선다면
북-미 관계 국면 전환도 가능
안보 현안서 새 리더십 절실

필자가 올해 1월에 만난 해리스 사령관은 트럼프 행정부와 딱 맞는 색깔을 갖춘, 과시욕이 강한 ‘스트롱맨’이었다. 그는 사드뿐만 아니라 줌월트 구축함(DDG-1000), 이지스함과 같은 전략자산을 한국에 전진 배치하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4월에 미 본토 3함대를 칼빈슨 항공모함을 앞세워 7함대 작전구역인 서태평양으로 전격 투입하는 파격적 군사행동을 계획하고 실행한 당사자도 그였다.

더 나아가 미국은 중국이 거의 따라잡은 군사력 격차를 다시 확대하기 위해 군사 분야에서 4차 혁명이라 할 수 있는 ‘3세대 상쇄전략’(third off-set strategy)을 이미 실행하고 있다. 이 전략의 궁극적 목적은 빅데이터, 로봇, 사물인터넷 기술을 활용한 전혀 새로운 무기체계로 서태평양의 공중과 수중에서 중국을 확실히 압도하는 데 있다. 길게는 20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이 전략이 완성되기 전에는 미국은 전략자산을 서태평양에 전진 배치해 양적으로 중국을 압도하는 현재의 전략도 병행한다. 그것이 더 많은 전략자산을 중국과 가장 가까운 한반도 인근 해역에 배치해야 하는 이유다. 변덕스러운 실용주의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길들이는 데 이와 같은 힘을 통한 압박이 주효하다고 믿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1일 오후 청와대 집무실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걸어 온 당선 축하 전화를 받고 있다. 청와대 제공

한편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군 현대화를 진행 중이다. 극초음속으로 대기권에 진입하는 새로운 장거리 미사일을 구비하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지대함 미사일 체계를 완성한 중국은 이제 우주로 진출하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이 점점 더 중국을 포위하고 있다고 믿는 중국은 당분간 미국을 압도할 수는 없으나 중국의 핵심 이익이 걸려 있는 자기네 근해에서 미국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그 목적이다. 더불어 한반도에서 급격한 혼란이 발생할 경우 미국에 주도권을 완전히 뺏기게 되면 1840년 아편전쟁 당시와 같은 수모를 또 당할 수 있다는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다.

만일 신숙주나 유성룡이 현대에 와서 이 장면을 목격한다면 임진왜란과 청일전쟁, 한국전쟁에 이어 또 한 번의 전란이 발발할 지정학적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중국, 일본과는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고, 동맹국인 미국의 종잡을 수 없는 충동을 감수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정권을 인수했다. 강대국 정치의 한복판에서 과거 전란 직전의 조선과 다를 것이 없는 새로운 정부는 대한민국 생존의 공식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 전에 시간을 다투는 긴급한 안보 현안을 처리하는 능력도 보여주어야 한다.

사드 배치 중단부터 선언하라

가장 뜨거운 감자는 사드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기간 중 은밀하게 경북 성주에 배치된 사드의 배치 경위를 국회 국정조사를 통해 재조사하겠다고 했다. 굳이 국정조사로 가는 데는 시간이 소요되므로, 기다릴 것도 없이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더 중요하다. 현재의 사드 배치가 법적 절차를 위반하고 추진되는 만큼 일단 추가 배치를 중단시키는 것은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생략된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실시하고 주민 공청회 등 의견수렴 절차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 나머지 사드 구성 부분의 추가 배치는 미루는 결정을 정부 초기에 곧바로 내려야 한다. 이렇게 해서 미국과 사드 문제를 재협상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동시에 북한 핵문제에 대해 한-미 공조의 목표를, 핵동결을 중간단계 목표로 할지 아니면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북한을 강도 높게 압박하는 방향으로 갈지 결정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선거 당시부터 일단 북한의 추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유예시키는 핵동결로 미래의 핵을 제거하는 것을 1단계 목표로 제시했다.

북한 핵동결이 성공하면 미국은 당장 북한이 미 본토를 위협하는 상황을 유예시킬 수 있고, 여기서 북한의 체제 안전을 보장하면서 신뢰를 쌓아 과거의 핵을 제거하는 2단계 목표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미국은 이러한 단계적 접근에 공식적으로 동의한 바는 없다. 다만 4월 초에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에이비시>(ABC)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바라는 바는, (북한이) 더 이상 실험하지 않음으로써 미사일 프로그램을 더 진전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 사실상 핵동결이 목표라는 ‘말실수’(?)를 했다. 바로 그 이튿날 카티나 애덤스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대변인이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서 틸러슨 장관의 말과 정반대로 “북한 비핵화와 대량파괴무기 포기 이후에야 미국은 북한과 대화에 나설 것”이라며 진화하고 나섰다.

틸러슨 장관의 인터뷰가 단순한 말실수라고 취급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가 바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인 ‘최고의 압박과 관여’(Maximum pressure and engagement)를 만든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북 정책 기조는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미사일 포기를 강도 높게 압박하면서 북한의 진정성만 확인되면 곧바로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핵 폐기, 김정은 체제 보장, 평화협정 체결, 북-미 관계 정상화 등을 포괄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적절한 상황’에서 만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문 대통령이 더 적극적인 해법을 갖고 미국을 설득한다면 북한 핵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 있다.

문제의 핵심 관건은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주변 정세와 북핵 문제를 주도할 강력한 의지와 준비를 갖추었느냐다.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적당히 살피면서 미-중 사이에서 어설픈 균형을 추구하는 소극적 전략으로는 북핵 문제의 진전을 이룰 수 없다. 그런 전략은 외교·안보 참사로 얼룩진 ‘박근혜 정부 시즌2’가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우리가 바로 한반도 안보의 당사자라는 점을 분명히 선언하고 주도하려는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

집권초 한달 정권 성패 갈릴 수도

이 점에서 집권 초 한 달은 단순히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준비기가 아니다. 정부의 외교·안보·통일 분야 전략가들이 북핵 문제의 대응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에 완전한 의견 통일을 이루면서 주변 강대국과 협상할 수 있는 유능한 진용을 갖추는 절호의 골든타임이라고 할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최선의 전략을 도출하기 위한 끝장토론과 합리적인 행동계획을 수립하는 작업이 곧바로 진행돼야 한다. 자칫 이 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초기 관리에 실패하여 혼선을 빚게 되면 주변국은 곧바로 그 빈틈을 파고들어 이용할 것이다. 냉엄한 국제정세에서 우리가 주도하지 않으면 주도당한다는 인식으로 높은 수준의 결의를 도출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는 전임 정권의 외교·안보 적폐를 청산하는 과감한 개혁에 거침없이 나서야 한다. 선거 기간 내내 문재인 대통령은 보수 표를 의식해서인지 개혁에 모호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대선 기간 중에 사드 문제를 비롯한 주요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 ‘전략적 신중함’으로 포장된 우물쭈물하는 태도에서 과연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정세를 주도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적폐 해소의 첫걸음은 박근혜 정부의 품질 불량 국방정책을 재검토하고 폐기하는 것이다. 킬체인,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는 북한 위협에 대한 가정부터 잘못됐고, 언제 성공할지도 모르는 대표적 불량 정책이다. 곧 드러나겠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한 한국형 전차(K-2), 전술지휘통제체제(TICN), 한국형 전투기(KF-X), 정찰위성 개발사업은 문재인 정부에서 곧 재앙이 될 부실 사업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보수정권 9년간 250조원이 넘는 국방예산을 쏟아부었음에도 참여정부 말기와 비교해서 거의 달라진 게 없는 초라한 국방의 결과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곧 곪아터질 국방 적폐

두번째는 우리 국방이 스스로 강해질 것을 두려워하는 미성숙 상태로 장기간 방치되면서 한반도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을 주목하고 조속히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의심하며 운명을 개척하지 못하는 나라를 진심으로 도와주는 동맹은 존재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드 비용 10억달러를 가지고 투정하는 이유도 바로 우리가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태도로 일관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동안 안보가 계속 후퇴한 이유는 우리가 무엇 하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비루한 처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성찰하고 자주국방을 구현해야 한다.

세번째는 견고한 주권의 토대 위에서 장기적 안목으로 국가의 생존을 기획하는 능력 있는 전략가 집단들을 형성하여 개혁의 주체로 삼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 체결, 개성공단 폐쇄, 대북 인도주의 사업 중단과 같은 전임 정권의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합리적인 경로를 제시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은 비단 정권의 성공이 아니다. 평화는 비록 정권은 정치적으로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국민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자기희생과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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