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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멋따라] 고즈넉한 숲의 향기 일품인 증평 등잔길

송고시간2017-05-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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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한 사랑 등잔길, 소망 비는 비나리길, 바람 솔솔 바람소리길 조성

(증평=연합뉴스) 심규석 기자 = 삼기리 서남쪽의 작은 골짜기를 지나던 선비는 그곳에 사는 처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과거를 본 뒤 꼭 데리러 오겠다는 언약을 했다.

삼기저수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비나리길[연합뉴스 자료사진]
삼기저수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비나리길[연합뉴스 자료사진]

처녀는 캄캄한 밤이면 선비가 돌아오는 길에 돌부리에 채여 넘어질까 등잔을 들고 골짜기 입구에서 기다렸다. 그 등잔불 덕에 일대는 밤에도 낮처럼 환했다고 한다.

헤어진 지 만 3년이 지난 어느 해 4월 그믐날 밤 등잔을 들고 하염없이 서 있던 처녀는 죽어 망부석이 됐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름도 없던 이 골짜기를 등잔걸이골이라고 불렀고, 이 골짜기로 들어서는 길은 등잔걸이길로 불렸다.

충북 증평군은 삼기(三岐)리라는 지명에서 착안해 이런 스토리텔링을 만들었다. '삼기'는 청주 미원, 괴산 청천, 충북 증평으로 갈리는 길목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 마을은 지금의 행정구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삼기저수지 상류에 자리 잡고 있던 이 마을은 2012년 말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으로 인해 아쉽게도 물속에 잠겼다.

마을은 사라졌지만 일부 수몰되지 않은 곳에는 생태공원이 만들어졌고 저수지 주변에는 '등잔길'이 조성됐다. 조금만 더 가면 '비나리길'과 '바람소리길'도 있어 한가로이 발걸음을 내딛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 애틋한 사랑이 담긴 등잔길

증평의 명산인 좌구산 계곡수로 채워진 삼기저수지는 산중 호수의 수려한 풍치를 자랑한다. 좌구산과 구녀산, 구석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고즈넉한 맛도 느낄 수 있다.

비나리길[증평군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비나리길[증평군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저수지 옆으로는 540번 지방도가 지나가 접근성이 뛰어나다.

저수지를 둘러싸고 데크길인 등잔길이 조성돼 있다. 2009∼2010년 만들어진 3㎞의 등잔길은 운전 중 피로를 풀 겸 차를 세워두고 산책을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산자락을 따라 구불구불 조성돼 있어 지루함을 느낄 겨를도 없다.

등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조선시대 독서광'으로 알려진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1604∼1684)의 상을 만나게 된다. 그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대첩을 이끈 김시민 장군의 손자다.

배운 것도 돌아서면 금방 잊는 '둔재'였다는 그는 책 한 권을 무려 11만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그의 노력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데크길이 잠시 끝나는 곳에는 율리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세워져 있다. 군 문화재 자료 제36호이다.

석조관음보살입상을 뒤로하고 걷다 보면 수십 그루의 나무가 물속에 잠긴 채 잎을 피우고 있다. 그 잎 사이로 찰랑찰랑 부서지는 저수지의 전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눈부시다.

데크길 안쪽에는 생태 습지가 조성돼 있다. 그늘막에서 땀을 식힌 뒤 다양한 수생식물을 살펴 볼 수 있고 아이들을 그네에 태울 수도 있다.

저수지 아래에는 장내마을이 있다.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 홍수 피해를 많이 입었던 이 마을은 아직도 수막살이제를 지내고 있다.

◇ 소망을 비는 비나리길

좌구산 부근에는 솟점말, 밤티, 삼기 마을이 있었다. 이 세 곳을 통틀어 부르는 지명이 율리이다.

삼기저수지 등잔길[증평군 제공=연합뉴스]
삼기저수지 등잔길[증평군 제공=연합뉴스]

율리 사람들은 분티고개 너머로 방아를 찧으러 다녔다고 한다. 거리는 짧지만, 소달구지가 오르지 못해 지게 짐을 지고 다녀야 할 정도로 고단한 길이었다.

분티고개 옛길을 따라 조성된 숲길이 비나리길이다. 1천8개의 계단으로 이뤄져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면서 시름을 내려놓고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소망을 품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의미가 담겨 있다.

비나리길 입구에는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이곳에 차를 세워두고 비나리길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1천8개 계단이 시작된다.

길섶에는 불교, 천주교, 기독교를 상징하는 3개의 쉼터가 조성돼 있다. 숲이 울창하게 우겨져 있어 잠시 숨을 고르며 쉬는 것 자체가 삼림욕이다.

고갯마루 좌구정에 이르면 증평 방향으로 훤히 트인 풍광을 마주하게 된다. 아름다운 풍치의 삼기저수지 너머로 올망졸망 어우러진 증평 시가지 전망은 '증평 제1경'이라 꼽을 만큼 수려하다.

숲의 향기를 깊게 들이쉬다 보면 계단을 몇 개나 세었는지 금세 잊어버린 채 도심의 찌든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나들이 하기에 안성맞춤인 요즈음 좌구정에는 돗자리를 펴고 앉아 도시락을 먹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도 종종 눈에 띈다.

◇ 바람이 솔솔 부는 바람소리길

좌구산 휴양림 관리사무소에서 천문대로 향하는 도중에 '바람소리길' 초입이 눈에 띈다.

바람소리길[증평군 제공=연합뉴스]
바람소리길[증평군 제공=연합뉴스]

묵을 쑤어 임금님 수라상에 올렸다는 상수리나무, 잎을 따 떡을 쌌다는 떡갈나무, 먼 길을 갈 때 잎을 짚신 밑에 깔았다는 신갈나무 등 다양한 참나무가 방문객을 반긴다.

숲의 경사면에 필요한 만큼의 길만 나 있다. 가파른 경사면에는 나무 데크 길이 조성돼 있다.

맑은 공기를 들이쉬며 울창한 숲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 보면 이파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바람소리가 들려 온다. 이마를 촉촉하게 적신 땀도 어느새 말라 있다.

"이래서 바람소리길이구나" 하고 생각할 때쯤 전망 데크가 방문객에게 쉬어가라고 손짓한다. 잠시 숨을 고르다 보면 어느새 숲과 동화돼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3㎞의 숲길을 걷고 나면 좌구산 교육체험지구가 나온다. 이곳이 바람소리길의 끝자락이다.

몸과 마음이 헛헛해질 때 등잔길과 비나리길, 바람소리길을 걷다 보면 숲의 향기로 가득 채워지고 머리가 맑아졌음을 느낄 수 있다.

k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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