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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일하는 노동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정여울 기자
입력 : 
2017-05-10 0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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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로 가는 길-47] 힘겹게 몸으로 일을 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착은 고흐의 작품세계에서 평생 지속되는 원초적 감정이었다. 벨기에 남부의 보리나주 탄광촌에서 목숨을 걸고 석탄을 캐며 간신히 생계를 꾸리는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한 시절이 빈센트 반 고흐의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시절에 '목회자'와 '화가'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했고, '그림으로 돈을 버는 화상'과 '일상을 초월한 예술가' 사이에서 흔들리기도 했으며, '평범한 삶'과 '구도자의 삶' 사이에서 방황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목회자가 아닌 화가를, 화상이 아닌 예술가를, 평범한 삶이 아닌 구도자의 삶을 선택했다. 그 길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광부들과의 생활이었다. 그것은 단지 연민이 아니었다. 고흐는 광부들의 비참한 노동조건과 열악한 생활상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부상자들을 간호하기도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기도 하면서 인간의 조건에 대한 원초적인 물음을 던진 것이다. 왜 수많은 사람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이토록 고통 받아야 하는가. 왜 인간의 힘겨운 노동은 그 어디서도 제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인가.

사진설명
빈센트 반 고흐_아를의 붉은 포도밭_1888
예술은 인간의 잠재력을 최고로 실현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인간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 붓는 엄청난 노동이기도 하다. 고흐는 그림을 그리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지만, 테오를 향한 물심양면의 빚은 늘어만 갔다. 그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자본, 화가의 재능을 화폐로 바꿀 수 있는 길을 찾았지만, 일생동안 그 길은 멀고 험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노동의 가치를 예찬하는 그림을 그렸다. '아를의 붉은 포도밭'을 보고 있으면 붉은 빛으로 물든 포도밭이 마치 농부들이 고된 노동으로 인해 흘린 피처럼 느껴진다. 고흐가 그린 붉은 포도밭에는 노동의 소중함에 대한 예찬과 함께 노동의 쓰라림이 함께 투영되어 있다. 고흐는 원래 선천적으로 강인한 신체를 타고났지만, 그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독한 압생트를 마시거나 담배를 많이 피움으로써 자신의 몸을 괴롭혔다. 30대 이후에는 거의 중독에 가까운 음주 습관이 건강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그는 위대한 예술가이기 전에 고통 받는 노동자였다. 그가 더 쓸 수 있는 자본은 스스로의 육체뿐이었다.

사진설명
빈센트 반 고흐_짐을 나르는 인부들_1881
않았지만 노동자를 바라보는 고흐의 숨길 수 없는 연민과 열정이 소박하게 드러나 있다. 보리나주 탄광촌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2년 동안, 고흐는 '목회자를 꿈꾸는 청년'에서 '어엿한 화가'로 변신해 있었다. 고흐는 척박한 노동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커다란 감명을 받았고, 완벽한 비례와 화려한 색채가 아닌 평범한 노동자의 상처투성이 몸 그 자체에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존의 인식 자체를 바꾸는 일생일대의 내적 전환기를 보리나주에서 경험했다. 구필 상사의 화상으로 출발했던 20대 시절 고흐의 미적 감각은 당시 유행하던 대중적인 그림들이나 위대한 종교화들의 영향력에서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보리나주에 가기 전 고흐는 아직 모든 것을 배우고 흡수하는 청년이었고, '이것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라는 뚜렷한 자각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보리나주에 정착한 뒤로, 고흐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고흐는 아버지의 눈, 종교의 눈, 화상의 눈을 벗어나 '예술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으로 얼룩진 암울한 미래밖에 볼 수 없었던 보리나주에서 그는 노동하는 인간의 숭고함을 발견해낸다. 나는 이것이 고흐의 진정한 내적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되도록 기피하는 장소에서조차 위대한 예술가적 영감을 찾아내는 것. 나아가 모두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길어올리는 창조적 시선이야말로 고흐를 견인하는 내적 원동력이었다. 그는 '이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설교를 해서 기독교를 전파해야겠다'는 생각을 바꾸어, '이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설교의 대상이었던 광부들이 이제 그림의 모델로 재탄생한 것이다. 종교인에서 예술가로 변신하는 과정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고흐는 그 힘겨운 내적 고투를 통해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게 된다.

청년 시절 고흐는 안정적인 삶을 꾸리는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탄광촌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사는 동안에는 자신의 안락했던 생활 습관을 모두 버리고 진심으로 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한숨과 눈물을 함께 하려했다. 고흐는 극도로 절제된 음식, 최소한의 소비만으로 만족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된 노동과 끔찍한 질병으로 죽어가는 광부를 마치 가족처럼 간호하며 깊은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모든 노력은 탄광촌에서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 보리나주의 선교위원회는 고흐에게 '선교사가 될 만한 자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를 사실상 쫓아냈기 때문이다. 꿈 많은 청년 고흐에게는 너무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하지만 훗날 '화가가 된 고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충격적인 실패는 그의 인생에 역설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그가 만약 훌륭한 목회자로서 인정을 받고 선교사나 목사가 되었다면, '화가 고흐'의 인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진설명
빈센트 반 고흐_올리브 따기_1889
해지는 세상에 대한 강력한 유토피아적 갈구. 그것은 고흐 예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고흐는 진심으로 염원했다. 가장 힘들게 사회의 밑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가치를 인정받고 결국 행복한 삶의 주인공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고흐가 올리브 따는 사람들, 씨 뿌리는 사람들, 밀밭에서 추수하는 사람들을 그리면서 한 결 같이 추구했던 것은 바로 '일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세상'이었던 것이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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