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로 열린 대선, 동성애 앞 유턴한 민주주의

선명수 기자 2017. 5. 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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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4월 26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천군만마 국방안보 1000인 지지 선언’ 기자회견에서 무지개 깃발을 든 성소수자 단체 회원들이 기습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동성애 반대하십니까?” “그럼요.”

상식이 있는 사회라면 처벌될 수도 있는 혐오발언이 전국에 생방송되는 TV 토론회에서 나왔다. 그것도 원내 1·2당 대선후보들의 입에서, 그것도 2017년에.

좀 더 진보적인 쪽으로 평가받는 후보의 지지자들은 그의 단호한 “그럼요”를 보수 후보에게 “낚인 것”이라고 표현했다. 전직 대통령의 주어 없는 화법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조롱하고 냉소했던 이들은 그 후보가 단호하게 답한 “합법화 찬성하지 않습니다”라는 발언의 주어를 ‘동성혼’이라고 봤다. 그 주어 없는 발언이 나오기까지의 ‘맥락’이란 다음과 같았다.

“아니 합법화가 아니고, 분명히 동성애 반대하는 것이죠?”(홍준표)

“저는 뭐 좋아하지 않습니다.”(문재인)

“좋아하는 게 아니고 찬성이냐 반대냐 물어봤는데.”(홍준표)

“합법화 찬성하지 않습니다.”(문재인)

그러니까 문재인 후보의 지지자들에 따르면, 과거의 인권변호사이자 촛불민심의 계승자인 문 후보는 동성애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지만 차별에는 반대하며, 동성혼 법제화와 ‘군대 내 동성애’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이후 문 후보 캠프와 후보 스스로가 밝힌 입장도 대동소이하다.

보수 개신교, 홍준표 후보 지지 선언
결과적으로 두 대선후보의 지난 4월 25일 동성애 관련 ‘토론’은 대선판에서 성소수자 혐오발언의 빗장을 풀었다. 각 후보가 더 많은 표 공략에 나서고 다수가 곧 권력이 되는 선거국면에선 사회적 소수자의 소외가 더 두드러지긴 했지만, 이제는 ‘혐오’로까지 번진 추세다. 두 후보 모두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 또는 유보 입장을 밝혔지만, 이들의 ‘토론’은 차별금지법이 왜 필요한지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촛불이 열었다는 2017년 조기 대선에서 벌어진 일이다.

문제의 TV토론 다음날 성소수자 단체가 문재인 후보의 ‘국방안보 1000인 지지선언’ 행사장에서 기습시위를 벌였고, 또 하루가 지난 뒤 문 후보는 “성소수자에게 아픔을 드려 송구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유력 대선주자인 그의 발언과 동시에 수많은 성소수자들은 이미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고,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한 그의 젠더 감수성 역시 이미 밑바닥을 보인 다음이었다.

뒤늦게 나온 해명에선 그 ‘반대’의 대상을 군대 내 동성애로 한정했지만, 이 역시 군색하기는 마찬가지다. 문 후보는 4월 27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사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동성애에 대해서는 아무도 간섭하거나 개입할 수 없지만 군대 내 동성애 허용에는 찬성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말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군대는 동성들이 집단생활을 하기 때문에 동성애가 허용된다면 많은 부작용이 있을 것”이고, 그 ‘부작용’으로 “동성애 강요가 있을 수 있고, 상급자에 의한 스토킹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이 성희롱, 성추행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성폭력은 이성 간이든 동성 간이든 범죄다.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모두 동성애자라는 전제도 틀렸다.

더군다나 이는 유엔이 거듭 폐지 권고를 내렸으나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으로 여전히 끊임없은 논란을 낳고 있는 군형법 92조 6항과 관련된 쟁점이다. 성인 간의 합의된 성관계 역시 ‘군인’이라는 이유로 처벌하는 이 조항으로 현재 육군 대위가 구속돼 있다.

물론 홍준표 후보는 ‘의도적으로’ 해당 질문을 던졌고, 문 후보는 망설임없이 답했다. 홍 후보의 ‘막말 퍼레이드’도 이어졌다.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AIDS)가 창궐한다”는 왜곡된 주장이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생중계됐고, 이후엔 “(동성애는) 절대 못하도록 금지하겠다”, “(집권하면) 동성애를 엄벌한다”고 겁박했다. 금지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사람의 정체성은 아닌 데다 무슨 수로 금지하고 엄벌할지 역시 미지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보수 개신교계의 홍 후보 지지선언이 나왔다. 기독자유당의 요구로 홍 후보가 TV토론에서 해당 질문을 했다는 보도 역시 나왔다. 전광훈 기독자유당 대표는 “홍준표 후보가 동성애, 차별금지법 반대 등 기독교가 원하는 모든 사항을 들어주기로 했다”며 “그래서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보수 표 의식, 차별금지법도 입장 바꿔
이후 상황은 기이하게 전개된다. 특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문 후보 지지자들의 비난은 문 후보를 비판한 성소수자들, 특히 기습시위를 벌인 성소수자 단체에 쏠렸다. 이들이 문 후보의 멱살을 잡았다는 가짜뉴스가 빠르게 유통됐고, 대선주자들이 빗장을 푼 혐오발언들이 SNS를 타고 확산됐다. “문재인이 홍준표의 큰 기술에 말렸다”(김어준)는 ‘방어’도 나왔지만,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혐오의 공식화는 그 정도 발언쯤은 용인될 수 있다는 의식을 정당화하며 빠르게 일상에 번졌다. 이는 해당 TV토론 이후 SNS에서 ‘동성애는 싫지만 차별엔 반대한다’ 류의 발언이 쏟아진 데서도 확인된다. 과거 선거 때에는 잘 거론조차 되지 않다가 이번 대선판에선 두 후보의 발언으로 느닷없이 소환된 성소수자들이 그 발언의 후폭풍까지 맞고 있는 것이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동성애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는 ‘1분 발언’으로 주목을 받고 심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자 어김없이 ‘사표(死票)론’도 등장했다. 이는 일부 열혈 지지자들만의 기획은 아니었다. 민주당 우상호 공동선대위원장은 지난 5월 2일 “정의당에 대한 지지는 다음 선거에 하셔도 되지 않나 생각한다”면서 “이번에는 정권교체에 집중하는 게 시대정신”이라고 사표론의 군불을 땠다. 정작 선거에서 ‘죽은 표’를 만드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를 개편하자는 진보정당의 주장엔 슬그머니 발을 빼왔던 거대정당의 주장이다.

문 후보 역시 보수 표심을 의식할 수밖에 없음을 부인하진 않는다. 문 후보는 자신의 ‘동성애 반대’ 발언에 대해 “현실정치인으로서의 상황 속에서 나의 입장을 밝힌 것”(4월 27일)이라고 해명했다. 그가 10년 전 참여정부가 추진했고 자신도 지난 대선에선 제정을 약속했던 차별금지법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들며 유보 입장으로 돌아선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결국 다시 ‘나중에’다. (관련 기사 주간경향 1215호 문재인의 ‘나중에’) 그러나 다시 ‘나중에’로 돌린들, 나중에란 약속은 선거일 투표소에서 멈춰 왔다는 것을 차별금지법 표류 10년의 시간이 입증해 왔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지난해 말 탄핵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때 출간한 ‘촛불 이후’의 고민을 담은 책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에서 1987년 민주주의는 군사독재를 끝내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삶의 민주화’에는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가 멈춘 곳에서 혐오와 폭력, 차별이 독버섯처럼 자랐다. 투표소에서만 평등한 사회에서 사람들의 존엄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엄기호는 대의제 앞에서 멈춰버린 민주주의를 그 너머로 밀어붙이기 위해 “왕을 뽑고 그 왕에게 우리의 권리를 위임한 뒤 다시 삶의 자리에서 노예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왕의 부재 이후 발생하는 모든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라며 지난해 말 촛불광장의 유의미한 경험은 ‘말하는 주체’로 동료 시민을 인정하고 경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017년 ‘촛불이 만들어준 대선’에서 민주주의는 다시 투표소 앞에서 유턴하고 있는 걸까.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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