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350만 주한미군전우회
미군이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날은 1945년 9월8일. 광복 직후 38선 이남의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인천항에 도착했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에서 격침된 ‘적대적 인연’ 이후 79년 만이었다.

7만여명의 초기 미군은 3년간 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철수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철수 연기’ 요청도 소용없었다. 철수가 완료된 지 1년도 안 돼 6·25가 터지자 미군은 급거 귀환했다. 이때 참전한 미군만 48만여명이다. 이 중 3만6000여명이 전사하고 11만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참전 용사 중에는 얼 샤프 중위도 있었다. 갓 태어난 아들을 두고 전장으로 달려온 그는 1년 반 동안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피의 능선’으로 불리던 양구 펀치볼지구에서도 혈전을 벌였다. 살아생전 그곳을 방문하는 게 소원이었던 그는 아들이 한국 근무 중(1996~1998) 준장으로 승진하자 방한해 ‘잿더미 위의 기적’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가 젊은 날 두고왔던 핏덩이 아들이 2008~2011년 한미연합사령관을 지낸 월터 샤프 대장이다.

미군은 한국 외에도 많은 나라에 주둔하고 있다. 독일 영국 벨기에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에만 9만여명이 있다. 일본이나 독일처럼 경제력이 있는 나라는 주둔비용을 분담한다. 우리도 미군 비용의 절반을 방위부담금으로 낸다. 군사위성 등 첨단 감시체계가 부족한 상황에서 분담금보다 얻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군사동맹에 따른 안전보장 효과는 더 크다. 주일미군이 해병대·해군 중심인 것과 달리 주한미군은 육군 중심이다. 휴전 중이라는 특수상황과 지정학적 요건이 겹친 결과다. 병력은 2만8000여명에 불과하지만 전쟁억지력은 수십배나 된다.

주한미군은 군사 영역 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주한미군에 납품한다는 광고 문구의 힘은 대단했다. 샘표간장이나 남양유업 등의 ‘미 군납 광고’는 최고의 홍보 포인트였다. 대중문화에서는 신중현, 현미, 패티김 등이 미군 캠프 위문공연으로 스타가 됐다. 이태원을 중심으로 한 클럽 문화도 미군을 통해 확산됐다.

정전협정 이후의 주한미군만 350여만명에 이른다. 이들이 매머드급 친한(親韓)조직인 주한미군전우회를 그저께 창립했다. 초대 회장을 맡은 이가 월터 샤프 전 한미연합사령관이어서 더 의미 있다. 대를 이은 양국 동맹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에 화답하고자 한국항공우주산업과 LIG넥스원 등 우리 기업들이 후원에 나섰다니 이 또한 훈훈한 소식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