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든 CEO든 같은 사람이라면, 보수차 10배 이상 나선 안돼"

2017. 4. 30.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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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포스트휴먼학회 이끄는 백종현 교수

올해가 정년퇴직 3년 차인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 그는 퇴직 이후 받는 연금을 사회가 주는 월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급여(연금)가 있으니 무직자가 된 게 아니죠. 연금을 받는 만큼 일을 해야겠지요.” 닷새 가운데 하루는 양평에 내려가 텃밭을 가꾼다고 했다. “(양평에선) 집사람은 정원사고 저는 농부입니다. 하하.” 강성만 선임기자

백종현 서울대(67) 명예교수는 독일 철학자인 칸트(1724~1804) 연구의 권위자다. 그는 칸트의 주저인 <순수이성비판>을 독일어 원전으로 연구해 박사 학위를 딴 첫 한국인이다. 그가 2006년 우리말로 옮긴 <순수이성비판>은 지금까지 21쇄를 찍었다. 매년 2쇄(2000권)씩 찍는다. 그는 “개인으로 따지면 내 칸트 번역서가 세계에서 제일 많이 팔리지 않을까 싶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영어나 중국어로도 숱한 번역서가 나왔지만 자신의 책만큼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작년 8월 서울대서 퇴직한 백 교수는 최근 <이성의 역사>(아카넷)란 책을 냈다. 원고지 4천매 분량의 이 책은 이성 혹은 이성의 연관 개념인 지성, 정신, 영혼을 중심으로 서양철학사의 거장들이 펼친 사유를 조감했다. 백 교수를 지난 28일 서울 역삼역 근처 한국포스트휴먼학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그동안 칸트 저서 10권을 혼자 번역했다. 11번째 번역서는 올해 출판 예정인 <교육학>이다. 전집(24권) 중 나머지 13권은 동료 연구자 4명과 함께 번역하고 있다. 완간까지는 10년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봤다. ‘매년 순수이성비판 2000권 판매’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해마다 철학계로 200여명이 들어옵니다. 500명은 유사 학문 전공자이죠. 나머지는 일반인들이 산다고 봐야죠.” 그는 “한국은 55살 이하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대졸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라면서 “입시나 취업, 자기계발 부담에서 벗어난 40대나 50대 일반인들이 철학서를 주로 산다”고 밝혔다.

<이성의 역사> 원고 대부분은 퇴직 이후 썼다. 칸트와 헤겔 부분만 기존에 발표한 글을 보완해 실었다. 왜 이성 중심의 철학사인가? “전통적으로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했어요. 저는 이 규정이 상당히 합당하다고 봐요. 인간은 태어나서 죽고, 욕구 충족을 위해 운동을 합니다. 이건 동물과 같은 것이죠.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 달리 욕구조절 능력이 있어요. 이게 바로 이성입니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동물적 본성을 다스립니다.” 설명이 이어졌다. “이성을 두고 서양은 로고스, 동양은 도라 했어요. 같은 뜻입니다. 로고스는 ‘말하다’는 뜻인데,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말’이란 의미죠. 도 역시 ‘말씀’이나 ‘올바른 길’이란 뜻입니다.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주체를 두고, 크게 봐서 자연, 하느님, 인간 순으로 바뀌어왔어요. 고대는 자연, 기독교는 하느님(초자연주의), 근대는 인간이죠.”

<이성의 역사> 표지

하지만 그가 쓴 것처럼 ‘이성’에 대한 반감도 상당하다. ‘(이성 반감은) 이른바 ‘문명’ 안에서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부조리, 패악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 ‘현대’의 자연과학주의도 이성 비판의 또 다른 근원이다. 이성 작용은 기껏해야 인과적으로 작동하는 계산 기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자답한다. ‘‘이성’의 척도 없이도 부조리니 패악이니 하는 것의 판정이 가능할까. 이성이 배제되면 ‘몰가치’가 ‘진리’의 옷을 입고 등장할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BC 460~370)가 간파했듯이 과학이 의존하는 방법인 “실험은 위태롭고, 판단은 어려운” 것이다. 과학이 주장하는 진리는 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백 교수는 “좋은 삶이 뭔지, 잘 사는 삶이 뭔지와 같은 물음은 선의 문제다. 여기에 보편적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의 힘 외에는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가 보기에 이성은 인류사에서 인간 존엄성을 떠받치는 주춧돌 구실을 했다. “입법적 이성성이 이성의 핵심 기능입니다. 인간이 ‘이것만은 차마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게 바로 입법적 이성성입니다.”

2년 전 서울대 퇴임 뒤 학회 꾸려
로봇, 의생명 기술 발전에 대응해
인간 존엄성 지킬 방도 찾기 몰두
“로봇 수익 90% 이상 사회 환원을”

철학사에서 이성 개념 변천 다룬
원고지 4천장 분량 ‘이성의 역사’ 내

하지만 다윈의 진화론 이후 자연과학이 급속히 세를 불리면서 인간 존엄성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로봇이 사람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할 경우, 인격의 가치는 사라지고 사람은 오로지 수단으로만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입법적 이성성을 유지시켜야 할 이유도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그가 <이성의 역사>를 쓴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퇴임하던 해 한국포스트휴먼학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학회를 이끌고 있다. 철학자, 변호사, 로봇공학자, 사회과학자 등 여러 영역의 전문가 100여명이 속해있다. 5월20일 ‘4차산업혁명과 규범’을 주제로 학회 출범 이후 세 번째 학술대회를 연다. 매월 세 번째 수요일은 전문가 초청 토론회를 한다. 지난해는 ‘자율주행 자동차’를 여러 각도에서 검토했다.

“다윈 이전에 인간은 신과 동물 사이 ‘중간자’였어요. 지금은 동물과 기계 사이에 있어요. 다윈에게 이성은 자기 생명 유지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어요. 인간은 동물과 질적인 차이가 없죠. 이성은 자율적 능력을 부정당하고, 인간이 목표를 달성하려 할 때 도움을 주는 꾀와 같은 것이 되었어요. (인간은) 디엔에이 유전자에 의해 움직여지는 깡통이 된 것이죠.”

백 교수는 인간이 ‘생각하는 기계’가 된 데는 ‘지식은 힘’이라고 한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했다. “베이컨이 말한 힘은 자연과 타자 지배를 위한 힘입니다. 인간은 그 힘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타인을 지배하고 다른 나라를 점령했어요. 인간에게 진짜 필요한 힘은 자기를 지배하는 힘입니다. 이성의 원래 뜻은 ‘너의 욕구를 장악하라’는 것이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인류사에서 인간 개념의 외연이 가장 확대된 시기라고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자유와 평등의 철학자 존 로크(1632~1704)도 말을 탈 때 구둣발로 하인 등을 밟았지요. 퇴계도 노비를 데리고 다녔어요. 인간 개념의 외연이 지금보다 좁았죠.”

포스트휴먼은 유사인간이란 뜻이다. “지금처럼 한 가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를 다 잘하는 범용인공지능이 나올 경우 세상은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그가 이끄는 학회는 언젠가 도래할 유사인간 시대에 인간의 존엄을 지킬 방도를 찾는 연구집단이다. “범용인공지능 시대는 인구가 늘어난다는 걸 의미합니다. 기계도 인간이니까요. 이전의 산업혁명과 달리, 기계가 새로 생길 일자리를 포함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걸 다 하게 됩니다. 인간은 최상층과 비용 때문에 로봇을 배치할 수 없는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만 존재할 겁니다.” 책에서 로봇 기술 발전으로 생긴 수익의 최소 90%를 사회에 환원해 국민기본소득 재원으로 충당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다. “최근 아디다스 중국 공장이 독일로 옮겼어요. 공장이 로봇으로 돌아가면서 일자리가 400명에서 6명으로 줄었어요. (로봇 수익금의 사회 환원액을) 앞으로 20년 동안 매년 5%씩 올려나가야 합니다. 미국 최고경영자 보수와 평균임금 격차가 70년대 30~40배에서 1000배까지 늘었어요. 십 년 안에 만 배가 될 겁니다.”

그는 80년대 초반 독일 유학 시절을 회고했다. “벤츠 자동차 회사에서 알바를 했어요. 6주 일하고 1주 유급휴가를 주는데 노는 주엔 임금을 1.5배 줬어요. 놀면 더 돈이 든다고요. 지금 한국은 80년대 독일만도 못해요. 평균 3만불 소득 사회라면 못사는 사람들도 소득 2만불은 되어야 좋은 사회라 할 수 있죠.” 그는 ‘격차 사회’를 두고 이렇게 개탄했다. “소득 차가 너무 벌어졌어요. 똑같은 사람이란 개념이 없는 것 같아요. 청소든 뭐든 같은 사람의 일이라면 10배 이상 차이가 나면 안 됩니다.”

‘유사인간’에 대한 관심은 1960년대부터 시작됐단다. “당시 ‘사이버네틱스’(생물의 자기 제어 원리를 기계 장치에 적용해 통신·제어·정보처리 등의 기술을 연구하는 학문)란 과학 기술 분야가 등장했죠. 그때부터 줄기차게 관심을 가졌어요. 인간의 기본적 인격성은 자율성에서 나오는데 기계적 설명이 가능하면 인간의 자율성이 없어지는 것이잖아요. 인간의 존엄성이 위치할 자리가 없어진다고 봤죠. 멍하게 있으면 안 되고 뭔가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 강성만 선임기자

서울대 철학과 학부 땐 율곡 철학에 강하게 끌렸으나 석사는 당시 서강대 이한조 교수의 강의에 영향받아 영미 분석 철학을 전공했다. “제가 박종홍 교수의 마지막 제자입니다. 서울대 철학과 졸업 전에 이한조 교수의 강의를 들었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그런데, 석사를 마치고 허망했어요. 철학을 공부하는데 (영미 분석 철학이) 진선미의 원리 같은 그런 설명은 없고 너무 지엽적인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칸트로 넘어갔죠.” 그는 칸트를 두고 “거의 모든 철학적 문제의 뿌리를 다 건드린, 오늘날 서양문명을 포괄적으로 대표하는 철학자”라고 했다. “칸트엔 그리스 로마 문명과 기독교, 자연과학 사상이란 세 요소가 균등히 들어 있어요. 플라톤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지만 플라톤 시대엔 기독교가 없었죠. 자연과학 지식도 그렇고요. 플라톤은 아는 게 적었어요.” 그는 “우연히 칸트 전공자의 길로 왔지만 잘 들어선 것 같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한 공부가 보람 있었어요. 독일 친구가 나에게 ‘너는 진짜 운이 좋다’고 하더군요. 칸트 같은 큰 철학자를 만난 것을 두고요.”

국내 철학계의 독일 철학 비중을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한국 학계의 사대주의는 말도 못합니다. 해방 뒤 70년대까지는 모두 독일 철학이었죠. 한국 철학자들이 독일과 특수 관계인 일본 제국대 출신이라 그랬어요. 80년대부터는 대부분 영미 분석철학입니다. 독일이나 희랍 철학도 미국 박사 출신이 다 교수가 됩니다.” 그는 국내 철학계가 “사변적이고, 사회적 영향력은 없는” 미국 철학계를 닮아, 자신과 같은 철학 전공자도 읽기 힘든 논문 작성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금 철학자들은 논문에서 자신들의 업적 자랑만 하는 것 같아요. 시민과의 접속이 없습니다. 시민과 만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해요. 인문학은 매개가 있어야 합니다. 독자들이 (인문학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제안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해야죠. 프랑스 철학자들은 (다른 나라와 달리) 일반 독자가 많아요. 철학자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에게도 책 쓰기는 ‘시민과 만날 수 있는 매개’이다. “다음 책은 <인공지능 시대의 지성>이 될 겁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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