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촛불은 우병우 앞에서 멈췄다 / 이재성

이재성 2017. 4. 30. 19:2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지난해 가을 광화문 거리에서 누군가 도화지에 써서 들고 다니던 글귀 하나가 기억난다.

'우병우 너 쫌 건방지다.' 그 무렵 만난 한 국립대 의대 ㄱ교수는 아픈 사람처럼 한 가지 질문을 반복했다.

우병우 인맥이 장악한 검찰은 물론이고 성역이 없어 보였던 특검마저 그 앞에선 주춤거렸다.

우병우는 시대가 낳은 우연한 괴물이 아니라 한국 사회라는 시스템의 일부이자 또한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이재성
사회에디터

지난해 가을 광화문 거리에서 누군가 도화지에 써서 들고 다니던 글귀 하나가 기억난다. ‘우병우 너 쫌 건방지다.’ 그 무렵 만난 한 국립대 의대 ㄱ교수는 아픈 사람처럼 한 가지 질문을 반복했다. “우병우 구속될까요?”

구속 여부로 유무죄를 판단해 버리는 한국 사회의 저열한 수준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절박해 보였다. 나는 주워들은 얘기와 ‘감’에 기대어 말했다. “구속되지 않을 것 같다”고. 함께 있던 다른 이들도 거들었다. ㄱ교수는 여러 차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마치 이 나라의 정의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구속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우병우와 아무런 인연이 없었고, 개인적인 감정도 없었다. 당시 그는 학내 권력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만약 우병우가 구속되지 않는다면, 싸움을 접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줄을 잘 못 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설픈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우병우 인맥이 장악한 검찰은 물론이고 성역이 없어 보였던 특검마저 그 앞에선 주춤거렸다. ‘원조 법꾸라지’와 ‘유신 공주’와 ‘삼성 황태자’ 위에, 우병우가 있었다. 촛불은 우병우 앞에서 멈췄다.

촛불이 만든 조기 대선에서 우병우에 대한 관심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 같다. 대선 후보들의 검찰 개혁 논의는 공허하게 들린다. 회의적인 여론이 많은 이유는 ㄱ교수가 내쉰 한숨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병우는 시대가 낳은 우연한 괴물이 아니라 한국 사회라는 시스템의 일부이자 또한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바꾸기 어렵다.

우병우는 ‘잘 드는 칼’이었고, 멈출 줄을 몰랐다. 그는 검찰과 국가정보원 등 권력기관 곳곳에 자기 사람을 심고 정보와 법이라는 칼로 걸림돌을 쳐냈다. 유력 신문사도 그에게 맞서다 하루아침에 ‘부패 기득권세력’으로 전락했다. 너무 잘 드는 칼이 ‘지배블록’을 찢어버린 것이다. 뉴스에 민감한 독자들은 우병우와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였던 이 신문사가 이제 그의 실명을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신문사가 보기에 우병우는 예외적 존재였다. 시스템 자체는 그대로다. 시스템이 무너진 게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문제였다. 우병우라는 비범한 개인 탓에 충돌이 도드라졌을 뿐이다. 거악은 사라진 게 아니라 아직 시스템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대의민주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결과다. 그 핵심에 우병우의 검찰 농단이 있다. 우 전 수석이 검찰 수뇌부와 1천번 넘게 통화하면서 무슨 모의를 했는지,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만들었는지 밝혀야 한다. 검찰 개혁의 첫 시험대는 ‘우병우 특검법’ 통과일 것이다.

오항녕 전주대 교수는 최근 펴낸 <간신>이라는 책에서 간신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을 깬다. 몇 가닥 안 되는 얌체 수염을 달고 손을 비비며 아첨하는 게 간신의 참모습이 아니라는 얘기다. 간신은 기본적으로 “아주 똑똑하고 치밀하고 집요”하며, 너무나 유능해서 자신과 나라를 망친다. 물론 간신 뒤엔 혼군이 있다. 여불위에게 효문왕이 있었고, 조고에게는 진시황의 아들 이세가 있었다. 우병우와 김기춘에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있었다. 지금은 왕조시대가 아니므로 우리에겐 두 가지 의무가 있다. 누가 혼군인지 가려내는 것, 그리고 간신이 전횡할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그것이 ㄱ교수 같은 사람이 직장에서 두려움 없이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san@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 대선 팩트체크][페이스북][카카오톡][정치BAR]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