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애 키워도 다 괜찮다
[오마이뉴스이준수 기자]
"여보~ 육아휴직급여를 2배 올려준대. 자기도 이참에 쉴래?"
"9월에 둘째 나오는데 공약대로 되려면 시간 꽤 걸릴 걸."
대선 공보물이 도착하던 날, 우리 부부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각 후보의 보육 정책을 살폈다. 애 키우는 집에서 1등 관심사는 단연 육아다. 우리도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절대로 남들처럼 애한테 안달복달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큰 애가 태어나고 산후조리원에 2주간 머물면서 우리 아이가 이미 경쟁사회에 던져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자기 자식에게 조금 더 잘 해달라고 간호사에게 간식을 넣는 옆 방 아주머니, mm 단위의 키와 g 단위의 체중을 비교하는 면회객들, 무슨 기저귀 어떤 분유가 더 좋다는 조리원 동기 아주머니들...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치열한 경주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부질없는 경쟁에 휘말려서 삶을 메마르게 하지 말자고 아내를 위로했지만, 남들보다 딸을 잘 키우고 싶은 욕심이 마음 한가득이었다. 하정*, 서천*, 오은*, 신의*, 김수*... 저명한 작가들이 쓴 육아서를 닥치는 대로 읽으며 전문가의 지침을 따르려 노력했지만 안 지켜지는 날들이 당연히 훨씬 많았다.
▲ 공동체가 있어 가능했던 육아 |
ⓒ 보리 |
저자 신혜경 씨는 스물네 살 때부터 변산공동체에서 살고 있으며, 공동체 안에서 결혼하고 딸 가을이를 낳았다. 가을이 엄마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2학년이 되도록 글씨를 떼지 못한 가을이가 글씨를 가르쳐 달라고 해도 엄마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나도 누가 가르쳐 준 적 없어, 그냥 저절로 알게 됐지."
부모들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그림책 읽어주기도 친한 대학 선배의 구박을 받을 때까지 안 한다. "나중에 글 배워서 네가 읽어"라고 말한다. 어린애한테 책 읽어주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일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좀 못됐다고 생각이 들어도 자기가 싫은 일을 억지로 참아가며 굳이 하지 않는다.
결국 그림책은 가을이가 초등학교에 가고 나서야 엄마와 함께 읽는다. 저자가 꾸준히 살아가는 기록을 글로 남기는 사람이고 영화 마니아인 걸 고려해보면 진짜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힘들면 안 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위선적으로 온갖 변명을 대며 자기를 포장하거나, 엄마도 견디지 못하는 것들을 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난 가을이가 행복해 보인다. 너 행복하냐고 물어본 적은 없지만, 내 어릴 적보다 행복해 보인다.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고 야무져 보인다. '내가 신경 써 주지 못해도 어쨌건 잘 지내잖아?' 하고 넘어가려는 건 아니다. 난 가을이만 할 때 정말 안 행복했다. 옷도 깨끗이 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묶고 늘 챙겨 주는 엄마가 있고 부모가 이혼한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공부도 잘 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사실은 아주 불행하다고 느꼈다. 어린아이도 그런 생각을 한다.' - 본문 76쪽
가을이는 5학년이 되도록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공동체 학교에서 구구단을 강요하지 않고 시험을 치지 않으니 굳이 안 외우고 필요성을 느낄 때까지 있는 것이다. 가을이 엄마는 구구단을 왜 외워야 하는지 고민한다. 가을이한테도 구구단을 배워 두면 편리하다고 말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는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저자는 공동체에서 검정고시 준비하는 아이들 수학 공부를 봐준다. 또 가을이가 크고 나서는 근처 학원에 나가 하루 4시간 초, 중등 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고 한 달에 70만 원을 받기도 한다. 남 가르칠 시간에 제 자식 구구단이나 떼게 하지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자는 공부는 하고 싶어야 하는 거지 억지로 시킬 수 없다고 믿는다. 가을이가 하고 싶어 지면 자연스럽게 할 거라고, 딸 인생이 내 인생은 아니라고 굳게 다짐한다.
행복하고 자유로운 엄마 때문일까? 가을이는 씩씩하고 당차다. 중학생이 된 가을이는 "가을. 내 말 좀 들어 봐. 엄마가 평생 당할 개무시를 한 달 동안 다 당했어"라고 하소연하는 엄마 이야기를 다 들어준다. 또 공동체 학교에서 몇 주 만에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의 개드립이 정말 그리웠다고 말하며 능청을 떤다. 밭도 잘 매고, 방 청소도 깨끗이 하고, 고양이를 살갑게 돌보는 가을이가 너무 좋아서 엄마는 '네가 없으면 난 흘러내릴 거야'라고 고백한다.
<아이랑 함께 자라는 엄마> 초반부를 읽을 때는 가을이 엄마가 무책임하고 뻔뻔하다고 생각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사는 데 정답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든다. 자기 앞가림하는 가을이와 자기 인생에 만족하는 엄마. 이거면 된 것 아닐까? 겨울에 좀 춥고, 여름에 김매느라 비지땀을 흘려도 두 모녀는 덤덤하다. 애가 타는 건 독자뿐이다.
"나 멘붕 왔다. 나 일 못 한다."
"콩, 팥, 양파, 감자, 풀, 강낭콩, 못해, 죽어 버릴 거야!"
"난 못 할 거야, 난 망했어, 하기 싫어, 못해!"
나는 이런 말들을 내 딸 앞에서 할 용기가 없다. 적당히 강하고 뒷바라지해주는 아빠로 남고 싶다. 그래도 가을이 엄마는 참 다행이다. 엄마가 저런 말들을 해도 "쯧쯧, 멘붕이 제대로 오셨구만" 하고 흔들림 없이 제 할 일 하는 딸이 있으니까. 아이랑 함께 자라는 엄마, 제목 한번 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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