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환의 야구사색]유니폼 벗는 '쇼맨십 포수' 홍성흔, 그를 떠나보내며

2017. 4. 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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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덕아웃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대체불가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홍성흔(40)이 30일 두산이 마련해준 공식 은퇴식을 통해 정들었던 그라운드를 떠난다.

골든글러브 6회(포수 2회, 지명타자 4회) 수상자이기도 한 홍성흔은 두산을 넘어 KBO리그의 스타로 팬들의 오랜 사랑을 받아왔다. 상대 팀이 싫어할 정도로 파이팅이 넘치고, 결정적인 적시타를 숱하게 기록했다.

두산 홍성흔. 스포츠코리아 제공

덕아웃의 분위기를 주도하며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 넣기도 했다. 현재 두산의 오재원과 비슷한 캐릭터라고 비유할 수 있겠다.

지금이야 개성이 넘치는 선수들이 여럿 존재하지만 당시만 해도 경직됐던 야구계의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그것도 포수가 이른바 ‘오버맨’으로 불리기는 쉽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특별한 선수였다.

경희대를 졸업한 홍성흔은 지난 1999년 OB베어스(두산의 전신)의 1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했다. 그가 1977년 2월 생인 탓에 프로 경력은 나보다 후배였지만 실제로 그는 나에게 ‘형’으로 통했다.

데뷔 시즌부터 홍성흔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던 것은 데뷔하자마자 자리를 잡아 그해 신인상까지 획득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프로에 갓 데뷔한 신인 포수가 데뷔 시즌부터 각광을 받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1999년에만 111경기에 나서 타율 2할5푼8리, 16홈런, 63타점을 기록했다. 포수라는 특성을 감안한다면 신인왕 자격은 충분했다.

홍성흔은 주전으로 거듭났고, 선발 투수였던 나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오랜 기간 그와 배터리를 이뤄 수많은 경기를 치렀다. 홍성흔은 공부를 많이 하는 포수 중 한 명으로 선수들을 편하게 하는 능력을 지녔다. 넘치는 에너지만큼이나 그는 몸쪽 승부나 직구 위주의 공격적인 볼배합을 많이 요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워낙 경기장에서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오다 보니 나와 홍성흔은 야구장 바깥에서도 친분을 쌓아갔다. 함께 식사를 자주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다. 특히 홍성흔은 투수들을 알뜰살뜰 챙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 번은 홍성흔의 집을 찾았는데, 그 곳에서 어깨에 수지침을 많이 맞았다. 홍성흔의 부친께서는 수지침 자격증 보유자로, 집에서 직접 선수들에게 수지침을 많이 놓았다. 어깨 부상에 시달렸던 나에게 도움이 됐던 ‘수지침’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홍성흔은 투수들을 유독 잘 챙겼다.

그와 야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역시 2001년 10월 한국시리즈 3차전이었다. 당시 2회에 3차례의 내야안타를 맞았던 나는 홍성흔이 공을 뒤로 흘리면서 실점을 내줬다. 속상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흥분해 “(홍)성흔이형 공 좀 잘 잡아”라고 다그쳤다. 당시에는 정말 이기고 싶어서 내뱉은 말이었지만, 승부욕이 과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었던 사건인 이른바 ‘양배추 사건’과도 인연이 있는 홍성흔이다. 홍성흔은 내가 모자에 넣고 다녔던 양배추에 큰 관심을 보였고, 직접 효능을 체험하고자 자신의 모자에 양배추를 끼워 넣은 채 몇 차례 경기를 뛰었다. 예상보다 훨씬 시원한 느낌이 들어 만족스러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2005년 두산에서 함께 뛰었던 박명환 코치(왼쪽)와 홍성흔. 스포츠코리아 제공

홍성흔은 말주변도 좋아 방송사들의 러브콜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숱한 방송 출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예인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2000년대 초반 ‘감기’라는 노래로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가수 이기찬의 콘서트를 홍성흔과 함께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는 무대로 나가 관객들에게 인사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수 비와도 친하게 지냈던 그였다.

야구선수로는 사실상 최초로 팬클럽을 거느린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홍성흔 팬클럽 이름은 ‘아도니스’로, 가장 규모가 컸을 때는 회원이 무려 3만명에 달했다. 준수한 외모에 쇼맨십 여기에 말주변까지 갖춘 홍성흔은 어느새 OB와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거듭났다.

지난 2011년부터는 제2의 도시인 부산을 연고로 하는 롯데로 적을 옮겼다. 여기서도 그는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4시즌 간 활약하기도 했다. 열광적인 팬들이 많은 두산과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것은 물론 재차 친정으로 돌아와 은퇴까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큰 복이기도 하다.

홍성흔하면 포수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그는 ‘성공한 지명타자’이기도 하다. 2004년만 하더라도 도루 저지율이 3할3푼8리에 달했던 홍성흔은 어깨가 나빠지면서 2루 송구에 약점을 보였다. 결국 그는 포수에서 멀어져 지명타자로 돌아서야 했다.

본인은 포수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었다. 포수 마스크를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하지만 워낙 타격에 자신감도 있었고, 욕심도 많았던 터라 그는 지명타자琯?승승장구했다. 지명타자로 만 골든글러브를 4차례나 수상했을 정도.

지금 생각해보면 홍성흔의 지명타자 전향은 신의 한수라고 생각한다. 오래 앉아있는데다 경기 내내 여러 가지를 신경 써야 하고 심지어 부상의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것은 포수의 숙명이다.

이렇다보니 포수는 타격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쉽지 않다. 홍성흔을 볼 때마다 타격 재능이 포수라는 포지션에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는데, 지명타자로 전향을 하며 오히려 롱런을 할 수 있었다.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냈지만 현재 홍성흔은 은퇴 이후 진로에 대해 상당히 고민이 많은 것 같다. 일단 그는 코치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하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던 그는 미국으로 떠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산하의 루키팀 코치 연수를 받고 있기 때문. 영어 공부에도 매진 중이라는 소식도 접했다.

지난 2015년 우타자 최초 2000안타 달성에 성공한 뒤 딸 화리양과 화철군과 기념촬영에 나선 홍성흔. 스포츠코리아 제공

그럼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본인은 부담스러워 하나,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성격이라면 방송일도 충분히 도전해 봄직 하다. 실제로 그는 몇 차례 방송 출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선수 은퇴 이후의 삶을 계획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일단은 막막하겠지만 언제나 쾌활했던 홍성흔이라면 제 2의 야구 인생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 역시 막막했지만 지나고 보니 유니폼을 벗어도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수입은 현역 때에 비해 크게 줄어드니 각오는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박명환 스포츠한국 야구 칼럼니스트·해설위원/ 現 야구학교 코치, 2017 WBC JTBC 해설위원
정리=이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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