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사였길래" 2만명 넘는 근로자가 죽어간 기적의 운하

최석인 건설산업硏 실장 2017. 4. 30.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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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태동한 한국 근대 건설 산업이 올해 7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건설 산업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 발전보다는 쇠락하는 이미지가 더 강한 게 현실이다. 땅집고(realty.chosun.com)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과 공동으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과 과학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 건축·구조물들을 발굴, 그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 건설산업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풍토병의 좌절을 딛고 물길을 열다

1914년에 개통해 100년도 더 지난 파나마운하는 엄청난 난공사이기도 했지만 완성되기까지 과정도 매우 드라마틱했다. 파나마운하는 현 기술 수준에서 판단해도 매우 흥미롭다. 파나마운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해상 물류의 요충지이며, 지리적·군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운하의 길이는 80㎞이며, 폭은 33.6m, 깊이는 150.4~304.8m이다. 운하의 통행 가능 최대 선박은 6만 5000t급(일명 파나맥스급·파나마 운하를 통행할 수 있도록 선폭 32.3m로 설계된 선박)이며 선박의 통과 시간은 약 8시간(단, 대기 시간을 포함하면 보통 24시간 이상 소요) 정도이다. 1998년 기준으로 연간 수입은 5억 4500만 달러이며, 1일 평균 통과 선박 수는 36척 정도이다. 우리나라 선사의 운하 이용은 격일 1회 정도이며, 연간 250여 척이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열악한 건설 환경과 프랑스의 좌절

파나마운하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인 페르디난드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에 의해 계획됐다. 레셉스는 수에즈운하 건설을 마무리하고 바로 파나마운하 건설 계획을 추진하면서 처음엔 7년 내 개통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파나마운하는 수에즈운하와 다른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수에즈운하는 거의 모래와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져 있고 높이가 15m 미만이었기 때문에 수평식으로 모래땅을 파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할 수 있었다. 반면 파나마운하 지역은 산악 지대이며, 암반이 많은 지질 조건이었다. 더욱이 차그레스강(River Chagres)의 홍수와 더운 날씨로 인한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으로 많은 노동자가 사망하는 등 공사 진척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래서 당초 수평식 계획을 현재와 같이 계단형 갑문식으로 설계를 변경했지만 결국 9년 만에 공사는 중단되고 이를 추진하던 프랑스 운하회사가 도산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풍토병은 이 사업을 좌초시킨 결정적인 요인이다. 최초에 레셉스는 운하 건설 지역에 치명적인 질병이 있다는 현지인의 말을 무시했다. 오히려 파나마 현지에서도 프랑스식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거 지역에 정원을 만들고 개미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 주위에 원형으로 물도랑을 만드는 바람에 모기 번식의 최상 조건이 되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결국 말라리아 등 풍토병이 급속도로 확산돼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미국 주도로 10년 공사 끝 운하 개통

프랑스 주도의 운하 건설이 중단되자, 전략적 차원에서 운하 건설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온 미국이 운하 굴착권과 관련 장비 및 설비를 당시 기준으로 4000만 달러에 인수했다. 미국은 1904년 공병대를 투입해 공사를 시작해 약 10년에 걸쳐 3억 8700만 달러의 공사비를 투입해 1914년 운하를 완공했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 사업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미국 철도 사업에서 대단한 명성을 지닌 존 스티븐스(John Stevens)를 사업 책임자(Project Manager)로 선임했다. 스티븐스는 대형 프로젝트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로서, 그는 생명마저도 위협하는 열악한 노동 환경의 개선이 가장 중요한 선결 과제임을 간파했다. 우선 청결한 작업자 숙소를 건설하고 좋은 음식을 노동자에게 제공했다. 풍토병을 없애기 위해 육군의 고가스(William C. Gorgas) 박사 등을 투입해 황열병 원인이 된 모기 서식지를 근절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투입했다.

프랑스와 미국이 파나마운하를 완공하는 과정에서 공사장 붕괴와 황열병 등으로 사망한 노동자만 2만7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혁신적인 아이디어 적용

운하 건설의 외적 환경 요소를 모두 제어한 후 스티븐스는 운하 건설상의 기술적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 특히 계단식 운하는 그 당시 기술 수준에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또한 대서양 쪽의 건기와 우기에 따라 강의 성격이 매우 다른 차그레스강이 상황을 매우 복잡하게 했다. 결국 스티븐스는 차그레스강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대규모 댐을 건설했고 여기서 만들어진 대형 호수(Lake Gatun)는 상당한 거리의 운하 건설 구간을 대체하는 효과를 냈다.

또 하나 큰 문제는 고지대에서의 대규모 굴착 작업이었다. 스티븐스는 철도 사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굴착 현장에서 차그레스강의 댐 현장까지 철도를 연결했다. 굴착 장비로 굴토한 흙을 철도의 화물 차량에 실어 댐 현장까지 수송해 활용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인 아이디어였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철도 레일 자체를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도 적용했다. 굴착 지역이 점점 더 넓어지면서 철도 레일 역시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철도 차량 앞부분에 소형 크레인을 설치해 이로 하여금 앞에 있는 철도 레일을 움직여 기차가 운행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굴착기와 철도 레일은 항상 가까운 지점에 평행하게 있을 수 있어 작업 효율이 극대화됐다. 이 외에도 많은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도입됐다.

사업 책임자에 대한 미국 대통령과 관계 장관의 전적인 신뢰와 권한 위임도 성공의 주요 요소로 꼽힌다. 이후 사업이 어느 정도 제 궤도에 오르자 스티븐스는 다른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임하고 고달(George Washington Goethals) 대령이 사업을 이어받게 됐다. 군인 특유의 기질을 발휘해 고달 대령은 남은 사업 일정을 훌륭히 완수했다.

파나마운하는 결국 유럽에서 1만 2000명, 서인도제도에서 3만 1000명 등 총 4만3000명의 노동력을 투입해 1914년 8월 15일 마침내 완공됐고 최초로 운하를 통과한 선박은 8만 1237t급 ‘퀸 엘리자베스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초 파나마운하의 설계 기준은 당시 가장 큰 선박이었던 타이타닉호였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항공 및 육상 교통의 발달로 최근 운하의 활용도는 과거보다 많이 줄었다. 현재 5만 척의 전 세계 화물선 가운데 7%는 제한적인 운하의 폭으로 인해 파나마운하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파나마운하는 1999년 12월 31일 운하의 관할권이 미국에서 파나마로 이관됐다. 2007년부터 54억달러가 투입된 파나마운하 확장 공사는 작년 7월 마무리되면서 1만TEU급 초대형컨테이너선(ULCS)이 통행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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