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죽음' 앞에서 광장은 숙연해졌다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입력 2017. 4. 2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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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한빛 PD 어머니 "저는 아들을 가슴에 묻지 않겠습니다"
2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23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파도타기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대선 전 마지막 촛불집회가 열린 29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 어둠이 내려앉은 이곳에 운집한 시민들이 눈시울을 붉혔고, 숙연한 기운이 광장을 휘감았다. 입사 1년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등진,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을 맡았던 고 이한빛 PD 어머니 김혜영 씨의 간절한 연설 앞에서였다.

무대에 오른 김 씨는 "저는 이한빛 PD의 엄마 김혜영입니다"라며 깊이 고개 숙여 시민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말을 이었다.

"아들 이한빛 피디는 노량진 공시생의 애환을 그린 tvN 드라마 '혼술남녀'에서 신입 조연출이었는데, 종방한 다음날인 2016년 10월 26일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도 스물일곱 살 아들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서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시간이 멈춘 채 가슴 한가운데 뜨거운 불덩이를 얹고 살아온 지난 6개월은 인간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3년 넘게 온갖 상처 속에서도 이 땅의 존엄을 지키며 버텨 온 세월호, 생명을 존중받고자 거대한 기업과 싸우는 반올림, 무자비한 정권의 폭력 아래서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백남기 씨 등의 영혼들을 생각하며 저는 지난 4월 18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용기를 내어 아들의 죽음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했습니다"라고 전했다.

"한빛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CJ E&M이 인정해야 하고,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한빛처럼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청년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 괴물이었습니다"

고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 씨(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어머니 김씨는 "아들은 사회에 따뜻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을 만들어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겠다며 열심히 공부해 PD가 됐습니다"라며 "아들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대학 때부터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고민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빨리 적금을 들라는 말에 자기는 월급 타면 꼭 하고 싶었다며 12월까지는 세월호, KTX 승무원, 기륭전자, 빈곤사회연대 등에 월급 전액을 후원금으로 내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정규직이지만, 혼술남녀 촬영 중에 비정규직 스태프를 대폭 잘라내는 잔인함에 분노했습니다. 그들의 아픔에 자기는 하나도 도움을 줄 수 없어 힘들어 했습니다. 아들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콘텐츠를 만든다면서 뒤에서는 그들의 열정을 착취하는 방송계의 비인간적인 관행을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어머니는 "'하루 20시간이 넘는 노동에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해야 하고, 등떠미는 것이 제가 제일 경멸했던 삶이었기에 저는 제 삶을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라고 (아들 한빛은) 유서에 남겼습니다"라며 "한빛을 아는 친구들은 한빛이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하고 따뜻하고 사회적 약자에 늘 관심을 기울이던 사람으로 기억하는데, CJ E&M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개인의 문제라고 매도했습니다"라고 토로했다.

"그들은 괴물이었습니다. 6개월 전 장례식장에서 CJ E&M의 조문을 거부하며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진심 어린 사과와 재발 방지를 통해 행복한 일터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사과라는 것은 상처 받은 사람에게 직접적이고 진실되게 해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까지 포함돼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CJ E&M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 씨는 "비록 거대한 괴물인 재벌 기업과의 힘겨운 싸움이 되겠지만,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저는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촛불혁명이 저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뜻밖에 많은 청년들과 시민들이 격려해 주시고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우리 가족, 내 아들 만의 문제가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이제 저는 아들을 가슴에 묻지 않고 부활시키겠습니다. CJ E&M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특히 희망을 갖고 성실히 살아가고자 하는 청년들이 행복하고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일터가 될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jinuk@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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