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나라' 조선이 드라마가 되는 법

이승한 입력 2017. 4. 29.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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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이 조선 개국을 재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시대를 읽을 수 있다. <정도전> 과 <육룡이 나르샤> 는 고통받는 백성에게 초점을 할애해 방영 당시 사회상을 은유했다.

1976년 <왕도>나 1983년 <개국> <추동궁 마마> 등은 당대 정권에 의해 군사 쿠데타를 미화하는 맥락으로 활용되었다(<시사IN> 제499호 ‘현실에서 쥔 칼자루 드라마에도 휘둘렀네’ 기사 참조).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이라는 역성혁명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박정희 소장의 5·16 군사 쿠데타와 신군부의 5·17 내란 또한 모두 어지러운 시대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엘리트 군인들이 내린 구국의 결단처럼 보이는 연상 작용을 피해가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당대 고려의 부패상을 강조하고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설파한 작품들인 KBS <정도전>(2014)과 SBS <육룡이 나르샤>(2015)는 어떻게 그러한 평가를 피할 수 있었던 걸까? 두 가지 변수를 고려해볼 수 있다. 첫째, 사극이 만들어져 방영되는 당대의 정치사회적 환경은 어떠했는가? 둘째, 작품에서 정치 시스템의 개혁을 꿈꾸는 주체는 누구인가?

ⓒSBS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백성은 조선 건국에 동참하는 적극적인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다.

일단 첫 번째 변수. 어떤 드라마도 진공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전임자에 대한 정치 보복과 정치 불안정이라는 시대상이 초래한 조선 최대의 난세 인조 연간을 다룬 KBS <최강칠우>(2008), KBS <추노>(2010)의 사례처럼, 정치를 이야기하는 사극은 어떤 식으로든 당대의 정치에 대해 발언한다. 그렇다면 <정도전>과 <육룡이 나르샤>가 등장한 시점인 박근혜 정권의 환경은 어땠는가? 박근혜 정권은 박정희의 제3공화국이나 신군부의 제5공화국처럼 전임 정권을 무력으로 뒤집어엎고 세워진 정권은 아니다. 전임자와 같은 여당의 후보가 선거제도를 통해 권력을 계승한 정권이었다. 혹자는 박근혜를 지지한 이들 중 상당수가 그 아버지인 박정희를 찾으려 했다는 점을 들어, 군사 쿠데타를 다시 혁명의 반열에 올리고 싶어 한 박근혜의 무의식과 조응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과 <육룡이 나르샤>는 기득권인 권문세족의 착취로 인해 삶의 기반을 잃는 백성들에게 초점을 할애해 방영 당시의 사회상을 은유하려고 노력했다. 소득 양극화로 민생의 붕괴가 시대적 화두로 떠올라 ‘흙수저’와 ‘죽창’이라는 단어가 유행어 반열에 오르는 시기에 역성혁명에 대한 드라마가 등장한 것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쿠데타를 합리화한다는 혐의를 쓰기보다는 당대 정치에 대한 발언이라고 보는 쪽이 더 정확하다.

두 작품 모두 조선을 개국한 무장 이성계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를 꿈꾸고 설계한 재상 정도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 역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시도다. <정도전>은 왕에게 권력이 모이는 것을 피해 재상들과 사대부들이 치열하게 논박하며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시스템을 만들려 했던 주인공(조재현)의 꿈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육룡이 나르샤> 또한 정도전(김명민)이 권력을 통제 가능한 시스템으로 만들기 위해 왕과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 서로를 돌아가며 감시하고 견제하는 국정 운영 체계를 구상하는 장면을 주요한 포인트로 잡는다. 두 드라마 모두 절대왕권 국가가 아니라 신권의 나라를 꿈꿨던 정도전의 비전을 강조한 것이다. 권력이 집권자 한 사람만의 것으로 향유되던 당대에 최소한의 민주주의 운영 질서의 복원을 요구했던 제작진의 발언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드라마 모두 고려라는 기존 권력이 스스로 갱신해 그런 나라로 거듭나는 건 난망하므로 아예 새로운 권력을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은 제작진이 당대에 거는 기대가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KBS 홍보실 KBS 드라마 <정도전>은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지 않는 시스템을 마련하려 했던 주인공의 꿈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한국 정치사와 궤를 함께하는 사극

중요한 건 두 번째 변수다. <개국>에서도 조선 건국을 정치 엘리트 이성계의 시선뿐 아니라 민초인 떡대의 눈으로도 함께 바라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정도전>과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조선 개국에 백성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커진다. 일단 <정도전>을 보자. 정몽주(임호)가 선물해준 <맹자>를 품고 귀양 온 정도전은 글줄도 읽지 않고 괴력난신에 기대 살아가는 백성들을 우매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을 서낭당의 신령한 돌 위에 주저앉아서는 항의하는 백성들을 향해 미신에 현혹되지 말라고 일갈한다. 정도전의 이런 초기 행태는 대중을 계도가 필요한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정치 엘리트의 시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정도전>은 어떻게든 권력의 내부자가 되어 나라를 개혁해보겠다고 생각했던 정도전이 혁명가로 거듭나는 계기 또한 백성이었다고 말한다. 과거 유생들에게 직접 농사를 지어봐야 백성의 고통을 안다고 기세 좋게 일갈했던 정도전은, 기껏 농사를 지어도 수확물 대부분을 빼앗기는 백성의 현실 앞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맹자>를 달달 외울 정도로 탁월한 유학자였으되, 백성들 사이에서 뒹군 후에야 그 참뜻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정도전>에서 백성의 위치가 일방적인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정도전에게 새로운 체제에 대한 영감과 가르침을 주는 위치까지 올라왔다면,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조선 건국에 동참하는 적극적인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다. 분이(신세경)가 이끄는 백성의 무리는 과도한 세금과 고려의 폭정을 피해 조세의 손이 미치지 않는 새로운 땅을 일궈 살아보려던 세력이다. 임금과 중신들이 자신의 고충을 알아달라고 읍소하는 백성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국가의 보호가 아닌 자치를 획책한 범법자였던 셈이다. 처음엔 정도전과 비전을 함께하며 그의 조언대로 땅을 일구던 분이와 그 무리는, 조선 건국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차츰 자체적인 비전을 궁리하게 된다. 분이는 정도전이 왕권을 견제하는 구상에 마냥 감탄하며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직접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묻는 혁명의 주체로 그려졌다. 또 조선 개국 후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자치구로 반촌을 받아 주민자치를 시도하며 자신의 정치를 이어갔다.

조선 개국도 이렇게 사극으로 제작되는 시대의 현실에 맞춰 적극적으로 그 의미가 재해석된다. 조선 개국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영웅 이성계가 들고일어나 부패한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태평성대를 열었다’는 식의 해석으로만 화면 위에 옮겨지다가, ‘고려의 혼란과 도탄 속에 야심에 찬 엘리트 군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고 나라를 세운 사건’이라는 균형 잡힌 해석으로 옮아가고, 다시 ‘민중의 현실로부터 정치 엘리트가 깨달음을 얻어 분권과 협치의 국가를 설계한 사건’, 나아가 ‘백성이 적극적으로 주체가 되어 구체제를 무너뜨린 사건’으로 재해석되는 일련의 흐름은 지난 몇십 년간의 한국 정치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일부 권력자만이 정치의 주인공으로 활약하던 독재 체제에서, 지난 과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권력을 쟁취해낸 1987년 체제로, 그리고 기득권 블록을 향해 당신들을 뒤엎을 수 있다고 말하는 각성한 시민들이 시대의 주역이 된 ‘포스트 1987’ 체제로 한국 정치사가 옮아가고 있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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