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사시 존치할 것"..'서민 대통령' 이미지 부각

김보경 2017. 4. 28.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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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복지라며 똑같은 혜택 제공하는 건 공산주의식 배급"
'묻지마 복지' 대신 담뱃값·유류세 인하 공약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아시아경제 김보경 기자, 문채석 기자]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는 28일 "사법고시를 존치하고, 행정고시도 폐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홍 후보는 이날 열린 제19대 대통령선거 방송연설(KBS)에서 "사시·행시 폐지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통로를 없애는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홍 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청년과 서민이 다시 꿈꿀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서민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가난을 극복해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경남도지사, 대통령 후보가 되기까지 걸어온 길을 설명하는데 연설문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또한 그는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을 떨쳤지만 "검찰 내부의 비리를 파헤쳤다는 이유로 아예 사건배당을 해주지 않았다"며 "더 이상 검찰에 남아 있을 수가 없어서 제가 그토록 갈망했던 검사직을 스스로 버려야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홍 후보는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라며 "청년과 서민이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표적인 서민 감세 공약으로 담뱃값, 유류세 인하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홍 후보는 "담뱃값은 내리고 비흡연자들의 건강추구권 보호를 위해서는 정부가 더욱 투자하겠다"면서 "배기량 2000㏄ 이하 전 차종에 대해서는 유류세를 절반으로 내리겠다"고 제시했다.

그러면서 "바닥 민심과 진짜 여론은 승리의 기운이 넘쳐나고 있다. 남은 시간, 제가 지면 자유대한민국이 무너진다는 필사즉생의 각오로 뛰겠다"며 "돈 없고 백 없어도 마음껏 꿈꾸고 뜻을 펼칠 수 있는 나라를 꼭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은 이날 홍 후보 연설문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해외에 계시는 재외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자유한국당 대통령후보, 당당한 서민 대통령, 기호 2번, 홍준표입니다. 두 번째 방송연설입니다. 지난번 방송연설을 보시고 많은 분들이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속이 시원하다고 하셨고, 꼭 대통령 돼서 이 나라 지켜달라고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꼭 이겨서 국민 여러분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대선이 11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3월 18일, 출마선언을 하고 13일 만에 자유한국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문재인, 안철수 후보, 5년 동안 선거만 준비했는데, 저는 출마를 결심하고 이제 겨우 한 달 반이 지났습니다. 늦어도 한참 늦은 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냈습니다. 바닥 민심과 진짜 여론은 승리의 기운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홍준표의 진심과 4선 국회의원, 당대표, 재선 경남도지사로서 입증한 홍준표의 국정운영 능력을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남은 시간, 제가 지면 자유대한민국이 무너진다는 필사즉생의 각오로 뛰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바람에 머리를 빗고 비에 몸을 씻는다는, 즐풍목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22년 정치인생을 즐풍목우의 심정으로 살아왔습니다. 나라가 지금과 같은 심각한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번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정치·외교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우리는 너무 큰 위기에 직면해 있고 그것은 제가 외면할 수 없는 책임이었고 운명이었습니다.

저는 참 어렵게 자랐습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우리 국민 모두가 겪어야 했던 고난의 세월이었고 저희 가족에게는 천형 같은 가난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다섯 번 전학을 다녔습니다. 리어카 하나에 세간을 싣고 이틀을 걸어 이사를 다녔습니다. 아버지가 짐 싸라, 한 마디 하시면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 채 이삿짐을 싸야 했습니다. 그렇게 경남에서 대구로, 다시 경남으로 울산으로 먹고 살기 위해 유랑민처럼 떠돌아 다녔습니다. 가난은 저희 가족을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무학이셨습니다. 학교를 가보지 못했습니다. 돈 버는 데는 재주가 없어서 피땀 흘려 지은 농사는 홍수가 나서 하루아침에 떠내려갔고 장사를 하면 늘상 손해만 보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가족들 먹여 살리는 일은 어머니 몫이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문맹이셨습니다. 글을 몰랐습니다. 가족 위해 희생하고 묵묵히 일만 하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였습니다. 달비장수를 나가면 며칠을 굶고 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동네로 들어오는 고갯마루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으면 저 멀리 위태롭게 흔들리는 어머니가 제 가슴 속으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 하던 해 여름, 큰 홍수가 있었습니다. 한밤중에 저를 흔들어 깨운 누나 손을 잡고 강둑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시커먼 낙동강물이 저희 집과 우리 식구의 꿈이 담긴 땅콩밭을 휩쓸었고 제 중학교 진학의 꿈도 함께 물속에 잠겼습니다.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서 장학금을 준다고 해서 선택의 여지도 없이 대구로 진학을 했습니다. 대구에서 공장에 취직해 살던 작은 누나의 달셋방에서 6년의 대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전기요금 때문에 밤 10시면 불을 끄라는 주인 아주머니의 감시 속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부를 했습니다. 도시락 싸갈 형편이 못돼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공부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공부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가난이 지겨워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의대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학비가 많이 든다고 육사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육사 특차시험에 합격해서 부모님 계신 시골에 가있는 동안 제 인생을 바꾼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훔친 비료를 샀다는 장물취득의 누명을 쓰고 경찰지서에 잡혀가신 것입니다. 농협지소장이 비료를 빼돌리고 횡령을 했는데 그걸 아버지에게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아버지 누명을 벗기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다 찾아 다녔지만 지소장의 힘에 눌려 어느 누구도 증언을 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틀 뒤 풀려났지만 억울함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군인이 될 것이 아니라 검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바로 대구로 가서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대입시험을 다시 준비했습니다. 법대에 가서 검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운 좋게 고려대 법대에 합격을 했지만 또 돈이 문제였습니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아버지와 작은누나가 빚내온 입학금 5만 6천 원과 한 달 하숙비 1만 4천 원을 들고 동대구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추풍령을 넘었습니다. 제 나이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성장이 아니라 생존이었고 지독한 가난과의 전쟁이었던 유년과 학창시절이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가난했지만 꿈이 있었습니다. 꿈이 밥이고, 꿈이 목숨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청년들,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꿈이 없어서 불행한 것입니다. 청년과 서민이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경남도지사 시절, 저는 서민자녀 교육지원 4단계 사업을 시행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고,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일 만큼은 없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서민 자녀들에게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책을 사거나 인터넷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예산을 지원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갈 때는 1인당 3백만 원의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서울에는 서민자녀 대학생을 위한 최신시설의 기숙사를 짓고 있습니다. 내년부터는 돈 걱정 안 하고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됩니다. 기업트랙을 만들어서 서민자녀들 우선적으로 취업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돈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게 했습니다. 꿈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청년과 서민이 다시 꿈꿀 수 있는 나라, 만들겠습니다. 돈 없고 빽 없어도 마음껏 꿈꾸고 뜻을 펼칠 수 있는 나라, 꼭 만들겠습니다.

저는 법대만 가면 사법고시는 바로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질 않았습니다. 꼬박 6년이 걸렸습니다. 검사 11년은 부패와의 전쟁, 권력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대통령의 형을 수사하고, 6공 황태자로 불리던 권력 실세와 빠찡코 대부를 구속했습니다. 검사장을 포함한 검찰 고위 간부까지 구속했습니다. 광주지검 시절에는 조폭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한꺼번에 수십 명을 구속시켰더니 오히려 조폭이 로비를 해서 서울지검으로 발령이 나기도 했습니다. 저를 모델로 해서 만든 드라마 모래시계가 국민의 귀가시계가 되고 국민 여러분께서는 제게 모래시계 검사라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저를 수사에서 완전히 배제시켰습니다. 검찰 내부의 비리를 파헤쳤다는 이유로 아예 사건배당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검찰에 남아 있을 수가 없어서 제가 그토록 갈망했던 검사직을 스스로 버려야 했습니다. 변호사 개업을 했지만 검사장까지 구속시키고 쫓겨난 검사라는 소문이 나서 사건을 의뢰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한테 앙심을 품은 조폭들의 협박이 시작되었습니다. 집으로 식칼이 배달돼오고 심지어 아들을 납치하겠다는 협박까지 받았습니다. 의뢰인 하나 없는 변호사로는 제 가족을 지킬 자신이 없었습니다. 가족을 지킬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내 가족을 지켜야겠다는 가장의 책임으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2주일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들 앞길에 방해될까 연락도 못하게 하시다가 제 얼굴 보고 마지막 눈을 감으셨습니다. 저는 정치를 시작하고, 어머니는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가 남기신 꿈 하나 가슴에 품고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그 꿈은,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 평생 일만 하고 고생만 하신, 제 어머니 같은 분들이 잘사는 세상 만드는 겁니다. 그것이 제 인생의 마지막 꿈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서민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많은 복지정책이 쏟아지고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서민경제 정책이 발표되지만 십 년 전, 이십 년 전에 비해 서민들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난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친 몸과 아픈 시간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를 아는 서민대통령만이 서민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경남에서 완성한 서민자녀 교육지원사업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대한민국의 희망사다리를 놓겠습니다. 사법고시는 존치하겠습니다. 행정고시도 폐지하지 않겠습니다. 사시·행시 폐지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통로를 없애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의 꿈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치워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어 꼭 지켜내겠습니다.

담뱃값, 내리겠습니다. 국민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담뱃값을 인상했지만 담배 판매량은 인상 전 수준으로 다시 늘어났습니다. 서민들의 담배 소비량이 더 늘었고 결국 서민들만 더 힘들어졌습니다. 반대하는 분들도 많을 줄 압니다. 하지만 서민들 힘들게 하는 정책은 바로 잡겠습니다. 담뱃값은 내리고 비흡연자들의 건강추구권 보호를 위해서는 정부가 더욱 투자 하겠습니다. 유류세, 절반으로 내리겠습니다. 국제유가가 내려도 국내 기름값은 그대롭니다. 세금이 60%나 차지하고 원유값이 내려도 세금은 정액으로 부과되기 때문입니다. 서민들 이렇게 힘들게 하면 안 됩니다. 2000cc 이하 전 차종에 대해서는 유류세를 절반으로 내리겠습니다. 서민대통령 홍준표가 청년과 서민이 꿈꿀 수 있는 대한민국, 만들겠습니다. 묻지마 복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서민중심 복지로 바꾸겠습니다. 복지의 결과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주는 가가 아니라, 얼마만큼 격차를 해소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보편적 복지라는 이름으로 똑같은 혜택을 제공하는 것은 복지가 아니라 공산주의식 배급입니다. 더 필요한 곳에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합니다. 기업에는 자유를 주고 서민에게는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복지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평생을 가난과 싸웠지만 한 번도 가난에서 벗어나보지 못했던 제 아버지는 일당 800원 받는 임시직 야간 경비원으로 힘든 인생을 마쳤습니다. 한겨울 영하 20도의 바닷가에서 칼바람 맞으며 가장의 책무를 다하고자 했던 아버지를 보며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무학의 아버지, 문맹의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신 유산, 그것은 꿈이었습니다. 가진 자들이 좀 더 양보하는 세상,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있는 세상, 그리하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꿈. 그것이 제가 받은 유일한 유산이자 제 인생의 마지막 꿈입니다. 일당 800원 받던 임시직 야간경비원의 아들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자식들 먹이느라 고리사채에 머리채 끌려 다니던 어머니의 아들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한 번 보여주십시오. 홍준표가 대한민국 서민의 꿈을 한 번 이루어 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이 홍준표의 힘이 되어주십시오.
늦은 시각, 끝까지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시기 바랍니다.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문채석 수습기자 chaes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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