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세월호의 아이들과 대리고(代理苦)

원익선 | 원광대 정역원 교무 2017. 4. 28.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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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백성들의 피맺힌 절규와 몸부림을 경찰의 방패가 철벽을 쳐서 막고 있는 사이, 사드발사대와 레이더 등이 올라가는 것을 눈물을 삼키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심정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후배는 마을 주민들이 애통해하는 인터넷 중계 화면이 마치 화구에 들어가는 관을 보며 가족 친지들이 그 주위에서 오열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 관은 인간양심일 것이다. 그리고 현장의 선배는 사드배치야말로 한국인들을 침몰해가는 세월호에 승선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며 분노했다.

그 세월호, 어린 꽃들을 태워 바다에 수장시킨 그 배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부끄러운 어른의 입장에서 참으로 미안하고 미안한 마음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사드가 국제사회의 적폐라면, 세월호는 한국사회의 적폐이리라. 한 자식도 다치면 가슴이 미어지는데, 이렇게 많은 꽃들이 모진 비바람 앞에 한꺼번에 지다니!

불교학자 무라오카 기요시(村岡潔)는 대리고 이론을 발표했다. 의사이기도 한 그는 한 지역 병원의 몇 년간의 기록을 놓고 분석해본 결과, 항상 일정한 정도의 환자가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 일정한 환자는 정상인 사람들에게 병을 경고하고, 건강하게 하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을 보살의 대리고라고 불렀다. 보통 환자가 아프면, 그 아픔의 원인을 환자 자신에게 귀속시킨다. 그것을 희생자비난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이와는 정반대의 해석을 한 것이다.

그리고 대리고의 역할은 정상적인 사람들로 언제든지 교체되고 있다고 보았다. 세월호 아이들은 불가역적인 대리고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확장하면, 이들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치명적인 결함을 경고한 부처이자 보살이며 예수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은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여 인간을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끌어올렸다. 물질이 개벽된 것이다. 그런데 물질은 결국 인간의 삶을 더없는 나락으로도 떨어뜨리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인 핵을 다룰 수 있게 되어 한순간 대량살상이 이루어졌다. 물질의 발전이 비상하던 19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상시적인 전쟁에 시달리고 있다. 공자나 석가나 예수나 마호메트가 살던 시대조차도 이러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인공지능로봇이 발명되고 있다. 인간의 두뇌를 이식시키거나 자율적인 생각을 재생산하기만 하면, 죽음을 기반으로 한 불교의 윤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윤회에 의하면 전생의 기억은 없어지지만, 그 행위에 의한 과보는 남게 된다. 그런데 불사의 기계 로봇의 회로 속에는 그 기억이 영원히 남아 무한한 생각의 증식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인간이 만든 모든 과학적 지식을 장착하게 되면, 초인적 로봇들의 세상이 된다.

브레이크 없는 욕망이 현실이 되는 이 과학 앞에서 우리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인간의 정신이 깨어 있지 못하면, 과학의 무한질주는 끝없이 이어지고, 인류는 자진해서 자신의 존재를 기계의 지배하게 두게 될 것이다.

세월호의 비극은 자기 절제가 점점 불가능해져가는 이러한 인간에 의해 일어났다. 대량수송을 위해 만든 배를 인간의 탐욕이 운행하고, 애초에 통제나 제어를 통해 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던 국가라는 기관이 연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지구호 차원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대승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펼치고 있는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거사는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자신도 아프다고 한다. 같이 아파하는 것은 대리고의 구조처럼 모든 중생이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연기(緣起)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수성 예민한 성자들은 중생들의 아픔을 스스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중생을 보듬는 부처의 마음을 대자대비라고 한다. 자식이 잘해서 칭찬도 받고 상도 받는 것을 덩달아서 기뻐하는 마음이 자(慈)라면, 자식이 잘 못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이 바로 비(悲)이다. 부처는 이러한 마음이 온 세계의 중생을 향해 있으므로 대(大)자를 붙여 대자대비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 소태산 박중빈의 대각개교절, 석가모니불의 탄신일이 연이어 이어지는 이 시기, 세월호의 아이들은 인류가 앓고 있는 현재의 고통과 앞으로 다가올 인류의 파멸적 고통을 우리들에게 미리 알리기 위해 불국정토 혹은 천국에서 파견된 자비 가득한 부처와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며, 아이들의 절규는 그 메시지가 아닐까. 아니면 절대자 혹은 성현들 스스로 너무 급박해진 이 문명의 결함을 알리기 위해 어린 성자들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나타난 것은 아닐까.

<원익선 | 원광대 정역원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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