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공약? 있는 것부터 잘 지켜라

2017. 4. 28.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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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육아당' 공동운영자 박순영

[한겨레]

“회사에서 워킹맘으로 일할 때, 내가 이렇게 힘든데 왜 동료들이 나를 이해 못해 주는지 서운했어요.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한명 한명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건 맞는데, 개인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걸로는 아무것도 안 바뀌는 것 같아요.” 지난 19일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앞에서 만난 박순영 ‘육아당’ 공동운영자는 워킹맘의 육아문제는 결국 생활정치로 이어지더라고 말했다. 과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어요. 신문사라고 하면서 나 같은 사람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해서… 딱 걸렸다! 어디 들어나 보자 했지요.(웃음)”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가 햇살처럼 청명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라는 그의 아들이 저 모습을 닮았겠지 싶을 만큼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었다. 박순영(40)은 씩씩하고 유쾌한 대한민국 ‘워킹맘’이다. 그는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한테 내가 왜 인터뷰를 청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평범한 엄마라서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시대 젊은 엄마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고학력 엄마들이다. 선배 세대 여성들이 남자 형제의 학비 마련을 위해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해야 했던 것과 달리, 그들은 비교적 큰 차별 없이 제도교육의 혜택을 받은 세대이다. 학업성적이나 교내 리더십에서도 남학생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우리 역사상 인터넷에 가장 친숙한 엄마들이다. 그들은 수시로 휴대폰을 열어 정보를 검색하고, 채팅하고, 온라인 활동을 한다. 10여 년 전에 이미 20~30대 여성들의 인터넷 이용률은 전업주부(91.3%)나 전문 사무직 여성(99.5%) 공히 90%를 넘어섰다.(2006년 한국인터넷진흥원 통계) 인터넷으로 소통하고 행동하는 엄마 커뮤니티는 최근 10여 년간 꾸준히 성장해왔지만, 직장과 가정에서 그들이 봉착한 차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취업과 승진에서 밀리고, ‘육아독박’으로 손발이 묶인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적 능력과 사회적 성취도 간의 격차가 가장 큰 엄마들이다.

박순영은 ‘육아당’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관리하는 공동 운영자 중 한 사람이다. 육아당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즐거운 모임’을 표방하며 2010년 트위터에서 시작되어, 2013년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면서 팔로어 규모가 급증해 현재 4만8천명에 육박한다. 육아당에선 육아관련 정보만이 아니라, 사회적 안전과 인권문제, 아이들 복지와 정책 등 폭넓은 주제가 다뤄지고 게시물별로 많게는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린다. 박순영은 여기 올릴 콘텐츠를 검색하고 선별하는 관리자이다. 일종의 뉴스 큐레이터나 웹진 에디터와 같은 역할이다. 육아당에 이어, 그는 지난해 ‘워킹맘연대’라는 페이스북 비공개그룹도 만들었다. 출산예정자에서부터 어린 자녀를 둔 직장 여성들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박순영을 통해서 요즘 젊은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들은 학교 졸업 이후 취업과 결혼, 육아를 경험하며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쳐 왔는지,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서 동료집단을 찾는 이유가 뭔지, 그들이 엄마로서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난 차별의 대상이 아닐 줄 알았다

-박순영씨 개인 신상에 대해선 제가 아는 게 없네요. 페이스북엔 그냥 ‘육아당주’라고만 쓰여 있어서.(웃음)

“77년생이고요. 고향은 안동, 1남2녀 중의 장녀예요.”

-그럼 고등학교까지 안동에서?

“대학까지요. 저희 아버지가 아주 보수적이라, 딸들은 웬만하면 객지에 안 보내고 끼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저는 외지로 가고 싶었는데 아빠의 극심한 반대로.”

-그 시절에도요?

“그래도 그걸 성차별이라고 느끼진 않았어요. 딸이라 걱정돼서 그러신다 생각했지. 제가 정말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갈 정도면 보냈겠죠.(웃음) 그냥 중상 정도면, 집에서 국립대 다니다가 공무원 돼서 시집가는 게 제일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아요.”

박순영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안동대에서 멀티미디어공학을 전공하고 졸업과 동시에 안동대 교직원으로 채용되었다. 평탄하고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그러나 도전적이고 성취감을 중시하는 그에게는, 고인 물 같은 안온함이 못 견디게 지루했다. 1년 만에 교직원 생활을 박차고 서울로 올라와 증권사에 취직했다. 2003년부터 2012년 12월까지 꼬박 10년을 근무했다.

-직장생활은 어땠어요?

“제 성격이 괄괄하고 할 말 다 하는 편이라서 남자동료나 상사하고도 잘 어울리고, 개인적으로 특별히 불만은 없었어요. 제 주위의 다른 여직원들 보면서 차별이 심하다는 건 알고 있었죠. 30년 넘게 다녀도 차장 부장 직함 달기 힘든 경우도 있었으니까.”

-여성이라서요?

“공채를 할 때 5급에 30명을 뽑는다 하면 대부분 남자고 한두 명만 여자예요. 여자는 주로 창구직원으로 뽑는데 고졸도 있고 대졸도 있고, 이분들은 6급, 7급으로 채용하죠. 근데 좋은 대학, 좋은 과 나온 여성들도 6~7급으로 들어와요. 먼저 5급으로 (지원서) 냈을 텐데 취직이 안 되니까 낮춰서 오는 거죠. 이렇게 들어오면 5급보다 승진이 최소 5년에서 10년은 밀리죠.”

-다른 직장에서도 채용할 때부터 남녀성차가 그렇게 심해요?

“친구 얘길 들으니, 호봉제인 회사에서는 입사동기끼리도 군대 가산점 때문에 남녀 간에 100만원 차이가 난대요. 출발선부터 그렇게 연봉 차이가 나면 평생 차이가 날 수밖에 없죠.”

-그런데 본인은 그런 차별은 안 겪었다?

“네, 저는 괜찮은 줄 알았어요. 남자들이랑 똑같이 밤샘하고 일하고, 같이 회식하고, 제 확실한 전공(멀티미디어)이 있어서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것도 재미가 있었고요. 태어나서 2009년까지는 정말 순조롭고 평탄한 삶이었어요. 보수적인 고장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서, 정말 아무 굴곡 없이 살다가 2009년부터 인생의 첫 굴곡을 만난 거죠.”

-2009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아이를 낳았어요.(웃음) 결혼 4년 만에.”

-아하!

“아이 낳으면 이쁘겠지 막연한 생각만 하다가, 막상 딱 낳고 나니까 ‘이제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아이 때문에 밤잠 못 자지,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은 없지, 임신 전 몸무게보다 4㎏이나 빠질 정도로 힘들었어요.”

아이 낳고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6개월을 쓰고 9개월 만에 복직했다. 본격적인 시련은 그때부터였다.

보수 본고장 안동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도전적이고 성취욕 높은 성격 못 이겨
모교 교직원 그만두고 서울 증권사 취직
“남자들이랑 똑같이 밤샘하고 회식…
2009년 아이 낳은 뒤 ‘첫 굴곡’ 맛봤다”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6개월 뒤 복직
근무시간 소변도 참아가며 일했는데
상사는 ‘애는 너만 키우냐’ 타박하고
회사는 ‘생산성 떨어진다’며 눈치 줘
10년 다닌 회사 억울하게 사표 던져

“열 받아서 만든 거예요.” 10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억울하게 그만둬 너무 속상했다는 박순영씨는 그 후 육아당과 워킹맘연대를 운영하면서 새로운 활력소를 찾았다고 털어놨다. 과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칼출근 칼퇴근 하면 아웃

-아이는 어디 맡겼어요?

“출근시간이 8시 반인데 거기 맞추려면 집에서 7시 반엔 나가야 해요. 그 시간엔 어린이집 문 여는 데가 없어요. 그래서 베이비시터를 썼죠. 그 비용도 매달 백몇십만원이니 부담이 커요. 그래서 애가 조금 자라서는 회사 근처로 이사해서 8시에 문 여는 어린이집에 맡겼죠. 그때부터 30분 동안 미친 듯이 뛰어가면 딱 8시 반에 도착해요. 근데 꼭 치사하게 회의를 8시20분에 하는 거예요.”

-왜 출근시간 이전에 회의를 해요?

“그런 회사들이 많아요. 7시 반에 하는 데도 있어요.”

-그럼 항상 혼자 지각생이겠네요?

“회의 중에 들어가서 슬그머니 앉는 거죠. 그 기분 정말 안 좋아요. 민폐 끼치는 사람 된 것 같고. 근데 그런 회의에서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안 해요.(웃음)”

-회의시간을 좀 조정해 달라고 해보지 그랬어요?

“그렇게 배려를 해주는 팀장도 있는데, 복직한 뒤 만난 팀장님은 안 그랬어요. 한번은 아이가 열이 펄펄 끓는데, 열이 나면 유치원에도 못 보내게 되어 있잖아요. 베이비시터가 낮 시간엔 원래 안 오는데 ‘아이가 아프니까 오늘만 좀 봐주세요.’ 사정해서 맡기고 출근은 했는데….”

-그렇게 출근하면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겠어요.

“그런데 베이비시터한테 전화가 왔어요. 애가 열이 40도까지 간다고. 그렇게 데리고 있다가 잘못되면 안 되니까 엄마한테 전화한 거죠. 마침 크게 바쁜 날도 아니어서 ‘과장님, 저 조퇴 좀 할게요’ 하니까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 ‘애는 너만 키워?’ 그러더라고요. 어찌나 서럽던지, 지하철 4호선 타고 집에 오는 길에 사람들 다 보는 데서 펑펑 울었어요. 애 앞에서는 울 수도 없잖아요.”

-평상시에 팀장하고 사이가 안 좋았어요?

“저도 원래 애기 낳기 전에는 회식 좋아하고 어울리는 거 좋아하던 사람인데, 아이 낳고서는 그럴 수가 없잖아요. 어린이집에서 데려오려면 퇴근하고 바로 가야 하니까. 그런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요. 저더러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칼출근 칼퇴근하고, 야근을 안 한다고요. 저는 시간 내에 일을 다 마치고 가려고 근무시간엔 소변도 참고 일했거든요. 제가 그렇게 일할 때, 근무시간에 야구를 보는 남자 직원도 있었어요. 근데 제가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사람으로 찍힌 거예요.”

-팀장이 고과점수도 나쁘게 줬겠네요.

“육아휴직을 쓰면 무조건 B로 떨어져요. 그 전까지는 늘 A를 받아서 보너스도 받고 했는데. 그래도 B 받은 것에 큰 불만은 없었어요. 남들 열심히 일할 때 난 회사 못 나왔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자존심이 상해서 그럴수록 더욱 악착같이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이 그를 따로 부르더니, 지점 영업직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평생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업무였다.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셨어요?

“‘박순영씨는 기술도 있고 남편도 있으니 상관없지 않냐?’고 하더라고요.”

-남편이 있는 게 좌천의 이유가 되나요?

“그게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거예요. 저는 남편과 별개로 일하는 여성인데…. 그러면서 제가 정 안 나가면 제 밑에 계약직 여직원을 내보내겠다고 하더라고요. 거기다 대고 ‘나 대신 걔를 내보내라’ 할 수도 없잖아요. 내가 사수인데.”

구조조정을 위한 거라 했지만 회사의 선택은 ‘두 여자 중의 하나’를 내보낸다는 거였다. 박순영은 고민 끝에 지점 발령에 응했지만, 자기 전문성과 무관한 업무를 지속하긴 어려웠다. 결국 10개월 만에 사표를 쓰고 회사를 떠났다. 그간의 경력을 바탕으로 소셜마케팅을 전문으로 하는 대행사를 창업했지만, 오랫동안 피땀 흘린 회사에서 받은 배신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10년 다닌 회사를 억울한 마음으로 관두는 게 너무 속상해서 위염이 다 생겼어요. 평소에 저는 도전적이고 자존감이 높은 성격으로, 애사심도 유달리 강했고 리더십도 있다고 인정받았는데 그 일을 겪으면서 인생관이 크게 바뀌더라고요. 열심히 일한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기지? 우리나라가 그래도 괜찮은 나라인 줄 알았는데, 사람을 쥐어짜는 걸로 나라를 굴러가게 하는구나 싶어서 큰 충격을 받았죠. 이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시스템의 문제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때 육아당(페이스북 페이지)을 만든 거죠. 열 받아서.(웃음)”

육아당과 워킹맘연대를 운영하는 일은 그 자신에게도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아동학대를 당한 사연이라든가, 기간제 교사가 임신했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받지 못했다는 사연을 공유하면서 그 억울한 감정을 공유하고 함께 분개했다. “각개전투로 부딪치던 엄마들의 문제를 공론화”해서 사회적 의제로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박순영 육아당 공동운영자가 이진순씨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과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 많던 똑똑한 여학생은 어디로 갔을까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소설 있잖아요. 오늘 박순영씨를 만나러 오면서 문득 그 책 제목이 생각났어요. 그 많던 똑똑한 여학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집에 있어요.(웃음) 지금 전업주부 하시는 분들 중에, 스펙 좋은 분들 정말 많으세요. 너무 아깝죠. 왜 그만뒀냐고 하면 다들 육아문제 때문에 더 이상 지쳐서 못 다니겠더라고 그래요. 저나 제 또래, 거의 그렇죠.”

-남편이랑 교대로 아이를 돌볼 수는 없었나요?

“제가 육아당이나 워킹맘연대에 글을 올리면 ‘아빠는 뭐하고 있었길래?’ ‘미혼모야?’ 이런 댓글이 많이 올라와요. 개중에는 집안일 하기 싫어서 일부러 늦게 퇴근하는 아빠도 있겠지만, 저희 남편 같은 경우는 육아에 무척 적극적이고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근데 회사에서 안 보내주는 거죠. 저희처럼 부부 둘 다 고향이 지방인 경우는, 주위 20㎞ 근방에 아이를 돌봐줄 어른이 한 명도 안 계셔요.(웃음) 제가 발 동동 구르며 뛰어다닐 때, 남편은 남편대로 새벽 5시 반에 나가서 11시까지 일하다 들어와요. 제가 남편한테 뭘 더 요구할 수 있겠어요?”

-육아문제는 결국 노동문제로 이어져 있군요.

“집에서 쉬면 ‘맘충’이라고 하고, 애 떼어놓고 나가면 ‘독한 년’이라고 하니 엄마들이 어쩌겠어요. 엄마들이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끔 경력단절여성을 만들어 놓고, 그 후엔 비정규직밖에 될 수 없게 해놨잖아요.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학원비라도 벌어보려고 엄마들이 일을 찾는데, 요즘 마트의 캐시어(계산원) 자리도 대기자가 많아서 줄 서서 들어간대요. 그럴 때 엄마들 자존감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거죠. 저도 증권사 나온 후에 창업해서 일하다가 그만둔 지 이제 딱 한 달 되었는데, 이래저래 앞날이 걱정이 됩니다.”

-상황이 이러니 비혼여성과 아이 안 낳겠다고 하는 여성이 늘어나죠. 결혼해서 아이 엄마가 된 것 때문에 잃은 게 많지요?

“그래도 저는 그 덕에 ‘인생의 굴곡’을 만났잖아요.(웃음) 그땐 너무 힘들었는데, 회사 그만두고 새로 창업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진짜 강해졌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 무렵부터였을 거예요. 사회에 억울한 사연들을 보면 참지 못하는 거요. 내가 억울한 걸 한 번 겪어보니, 대학도 나오고 나름 좋은 회사 다녔는데도 이렇게 억울한데, 정말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들은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하겠나 싶더라고요. 그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할 즈음, 세월호가 터진 거예요. 제가 그때 홍보일을 하고 있어서 거의 24시간 티브이가 켜져 있는데 세월호가 침몰하는 과정을 계속 보고 있으려니까, 우울증이 오는 거예요.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래서 육아당에, 세월호의 진실과 관련된 소식들, 정부 조치를 비판하는 글, 육아 정책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글을 엄청 올렸어요.”

-반응은 어땠어요?

“‘애나 잘 키우지 육아당에서 왜 이런 얘기를 하냐?’고 항의하는 댓글이 엄청 많았어요. ‘육아당 좌빨이냐?’고 욕하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아이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미세먼지도 육아 얘기고, 세월호도 애들이 죽었으니 육아 얘기라고요. 근데 요즘엔 그런 댓글이 단 하나도 없어요. 촛불집회 이후로 크게 달라진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즐거운 모임’
트위터 이어 2013년부터 페이스북 활동
“각개전투 하던 엄마문제 공론화” 의지
초기엔 ‘육아당 좌빨이냐’ 비난 댓글도
촛불 집회 이후 분위기 달라지더라 기혼여성을 ‘맘충’이라 비하하는 세태
“엄마들한테 온라인은 세상 연결고리
똑똑한 ‘육아독립군들’ 아닌가”
“예전엔 카페에서 금기처럼 여겼는데
요즘엔 엄마들 정치 얘기 많이 해요”

온라인에 거점을 둔 ‘육아독립군’들

단일한 조직은 없지만, 젊은 엄마들은 시시때때로 세력을 형성해 자기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 ‘유모차 부대’로 처음 존재감을 알린 이후,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온라인커뮤니티 82쿡(82cook.com)은 유가족을 위한 바자회를 열었고, 지역커뮤니티인 ‘마담방배’ 엄마들은 아기를 데리고 추모행진을 벌였으며, 엄마들이 주축이 된 ‘리멤버0416’은 3년 내내 전국 각지에서 1인시위를 벌여왔다. 주로 온라인에 기반한 젊은 엄마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지난 탄핵 국면과 최근의 대선 국면을 거치며 더욱 강화되는 추세이다. ‘설거지는 여자가 (하는 일), 남녀 일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라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발언은 거의 모든 육아커뮤니티에서 조롱거리가 되었고,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대형 단설유치원 신설 자제’ 공약은 젊은 엄마들의 거센 반박 여론에 직면해 지지율 급락에 결정타가 되었다.

-기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최근 10~20년간 크게 변화한 것 같습니다. 한동안 ‘아줌마’ 시리즈가 유행했었어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제3의 성. 성적인 매력도 없고 아무 데서나 염치없이 엉덩이 들이밀고 자기 자리 차지하려는 극성스런 중년 여성들. 그 뒤로 ‘미시족’이란 용어가 떴는데, 결혼한 후에도 젊고 매력적인 주부를 뜻하면서 소비의 주체로 떠받드는 용어였죠. 요즘엔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기혼 여성을 무위도식하는 벌레로 비하하는 ‘맘충’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박순영씨가 생각하는 대한민국 기혼 여성의 이미지는 뭐죠?

“(곰곰이 생각) 육아독립군? 똑똑한 엄마들, 기댈 데 없이 혼자서 씩씩하게 애들 잘 키우는 엄마들. 옛날에 집안 어른이나 동네 어른들이 육아에 대한 조언을 해줬다면 이제는 다들 혼자잖아요. 온라인에 가서 고민을 얘기하고 정보를 찾고 대화를 나누죠.”

-젊은 엄마들의 온라인 활동을 마뜩잖게 보는 시선도 있어요. ‘종일 애 돌보고 살림하느라 눈코 뜰 새 없다면서, 한갓지게 컴퓨터 앞에서 노닥거릴 시간은 있냐?’고.

“엄마들한테 온라인 활동은 세상과의 소통, 세상과의 연결고리 같은 거예요. 요즘 포털사이트 같은 데 보면 워낙 상업적인 내용이 많으니까, 커뮤니티에서 엄마들끼리 얘기하고 싶어 하는 거죠. 저도 전업주부 한 달 하면서 보니까, 온라인을 통해서 정보를 습득하고 굉장히 합리적인 소비로 실속을 챙기는 현명한 엄마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육아당, 워킹맘연대 말고 따로 또 하는 커뮤니티 활동이 있어요?

“제가 사는 지역의 엄마들 온라인카페하고요, 와글에서 하는 ‘국회톡톡’ 입법제안 사이트…(웃음). 지역맘 카페에서는, 아파트 분양할 때 중학교 지을 예정이라고 하면서 고가로 분양해 놓곤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라서, 그 약속 지키라고 시청에 민원 올리는 일을 하고 있고요. 국회톡톡에서는, 신입사원이나 복직자가 근속연수 1년 미만이라고 연차휴가 제대로 못 쓰는 것 시정해 달라는 제안이 올라와서 입법발의 단계까지 갔는데, 출산과 육아 때문에 쉬었다가 복직하는 엄마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어요.”

-엄마들 사이에 정치적인 대화도 많아졌나요?

“요즘 엄마카페 같은 데 가면 정치 글들 많아졌어요. 예전엔 카페에서 약간 금기처럼 되어 있었는데 요즘엔 엄마끼리 좋은 내용 있으면 서로 공유하고 퍼뜨려요. 예전에는 여자들의 정치색이 남편을 주로 따라간다고 여겨졌지만, 요즘엔 엄마들끼리 진짜 얘기 많이 해요.”

엄마의 정치, 아이의 미래

-이런 변화는 촛불집회 덕일까요?

“촛불 이전에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촛불 때문에 자신감이 커진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국민들이 계속 감시하고 여론 형성하면 민심이 반영돼서 정치도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근데 아직도 관공서 민원실 게시판 같은 데 들어가려고 하면 모바일로는 접근이 안 돼요. 페북이나 트위터로 공유하기 기능도 없고, 그래서는 참여를 하려야 할 수가 없죠. 저는 뭐 거창한 정치는 잘 모르고, 생활 속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예요.”

-맞습니다. 좋은 거 있으면 잘 닦아서 자식한테 물려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인데, 사실 정치나 환경은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유산이잖아요.

“제가 오늘 꼭 하고 싶었던 얘기가 그거예요. 제가 회사에서 워킹맘으로 일할 때, 내가 이렇게 힘든데 왜 동료들이 나를 이해 못해 주는지 서운했어요.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이들은 그이들대로 애써서 버티고 있는 거니까. 그런 사람들한테 나 힘든 거 이해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죠. 한명 한명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건 맞는데, 개인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걸로는 아무것도 안 바뀌는 것 같아요. 전체 시스템이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

-최근 육아당에 대선후보들의 보육 관련 공약 비교표가 올라와 있던데, 댓글이 엄청 많이 달렸더라고요. 전반적인 의견은 어떤 것 같아요?

“지켜라~”

-네? 공약을 지키라고요?

“그래 놓고 제대로 안 지킬 것 같아서요. 있는 거나 잘하면 좋겠어요.”

-예를 들면?

“육아휴직이요. 규정에 있지만 눈치 보여서 못 쓰는 사람들 너무 많아요. 그리고 칼퇴근제나 자율근무제 같은 것도 있어도 못 쓰죠. 어린이집 7시까지라고 되어 있지만 5시만 되면 문 닫는 데도 있어요. 5시 이후까지 봐주려면 교사를 더 채용해야 되니까 ‘어머니, 아이 혼자만 남아 있으면 정서에도 안 좋아요’ 하면서. 직장 다니는 엄마들은 어쩔 도리가 없지요. 따로 아침저녁으로 베이비시터를 쓰는 수밖에는.”

-이번 대선 공약에도 육아휴직을 반드시 쓰게 한다든가, 어린이집과 돌봄교실을 확대한다는 조항이 들어가 있던데요.

“그건 좋은데 그것도 좀 수위 조절을 해야지, 너무 육아휴직을 강요하면 회사 입장에서는 여직원 안 뽑을 것 같거든요. 그럼 여자들은 취업이 더 안 되는 거예요. 넓게 보고 현실을 봐야죠. 아무리 좋은 공약 내놔봤자 현실화될 수 없으면 무슨 소용 있겠어요? 결혼하면 자동으로 회사 관두게 하는 데가 아직도 많다고요.”

고용평등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한다든가, 직장인에게 야근과 회식을 강요하지 못하게 하는 건 누군가 대통령이 된 후에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여야 의원들이 뜻을 모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구실로 ‘아이 키우기 나쁜 나라’를 용인하는 일은 이제 그만 멈춰야 한다.

녹취 심지연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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