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세계일보

[안재성의 金錢史]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어두운 면

안재성 입력 2017.04.28. 17:5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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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전쟁으로 예산 낭비..시민 반발하자 무차별 학살
북아프리카·이탈리아 점령 후 재정 고갈로 제국 침체기 빠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해 비잔틴 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넓혔다. 그러나 동시에 무모한 원정으로 재정을 고갈시켜 위기를 자초했다.
우리는 천민자본주의, 황금만능주의 등의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돈을 숭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정확히는 돈이라 불리는 종이쪽지를 숭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돈’과 ‘경제’란 단어에 목을 매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한낱 종이쪽지에 지배당하고, 그 종이쪽지에 사회 전체가 얽매여 신음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을까? 세계파이낸스는 [안재성의 金錢史] 시리즈를 통해 돈과 금융의 역사에 관해 짚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동로마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을 따 흔히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불린다.

비잔틴 제국에서 제일 유명하고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불리는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다. 그는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잃어버렸던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반도를 재정복해 제국의 판도를 최대치로 넓혔다.

또한 당시의 모든 법을 집대성해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비잔틴 제국이 사라질 때까지 제국 사법 판단의 가늠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영광 외에 유스티니아누스의 어두운 면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쟁에 필요한 예산을 마련하려고 각종 증세책을 시행했다. 시민들이 반발하자 반대파를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냉혹한 조치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러고도 돈이 모자라 제국의 재정은 크게 망가지고 만다. 그의 사후 제국은 심각한 침체기에 빠진다.

◇피로 얼룩진 ‘니카 반란’

유스티니아누스가 대제로 불린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해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내정에서 치적을 쌓았다는 이유로 ‘대제’라는 호칭을 얻은 지도자는 없다.

그가 대제가 된 것은 오직 정복 사업을 통해서였다. 특히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반도를 되찾아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늘린 업적이 후세의 역사가들로부터 상찬을 받았다.

하지만 세상에 무엇이든 ‘공짜’로 얻어지는 법은 없다. 전쟁은 큰 돈이 든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까지 원정하는 대사업은 더더욱 많은 돈이 든다.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집권 후부터 전쟁 자금 마련에 열을 올렸다. 이상주의자인 그는 서로마 제국이 건재하던 당시 제국의 곡창 지대 역할을 했던 북아프리카와 제국의 고도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싶어 했다. 당시 그곳은 반달족, 고트족 등 게르만족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상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이상일 뿐, 비잔틴 제국의 시민들이 거기에 동조할 까닭은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원정 자금 마련을 이유로 세금을 올리자 당장 시민들의 반발이 시작됐다. 그가 ‘빵과 서커스’에 대한 정부의 지원까지 줄이자 시민의 반발은 최고치에 이르렀다.

‘빵과 서커스’는 로마 공화국 시절부터 이어진 오랜 복지 정책이다. ‘빵’은 가난한 시민들에게 밀을 무상으로 나눠주는 것을, ‘서커스’는 검투 대회나 전차 경주를 개최해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것을 뜻한다.

현대로 치면 국가가 최저생계비를 보장하고 여러 스포츠를 후원하는 것에 해당한다.

세금은 증가하고 복지는 감소하니 당연히 이중으로 손해를 보게 된 시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서기 532년 1월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전차 경기장에 모여 봉기했다. 그들은 그간 유스티니아누스의 지시에 충실히 따라 세금 징수에 골몰한 재무장관 요하네스와 사법장관 트리보니아누스의 파면을 요구했다.

궁지에 몰린 유스티니아누스가 그들을 해임했으나 시민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나아가 유스티니아누스를 탄핵하고 히파티오스를 새로운 황제로 선출했다. 이것이 ‘니카 반란’이다.

여기까지 진행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평화적인 타협을 포기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무자비한 진압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심복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전차 경기장을 급습했다. 군대는 마주치는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니카 반란’은 종식되었으며 이후 ‘빵과 서커스’는 사실상 자취를 감추게 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위대한 정복 사업 이면에는 ‘반대파’란 이유만으로 평범한 시민들까지 마구 죽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함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고갈된 재정…멸망의 위기로 몰리는 제국

반대파를 척살한 뒤 유스티니아누스는 예정대로 원정에 나섰다. 충실하고 유능한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533년 수만 군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를 공략했다. 벨리사리우스의 능력이 빼어난 이상으로 적이 사분오열된 상태라 원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벨리사리우스는 어렵지 않게 북아프리카를 재정복한 뒤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로마의 탈환도 간단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이걸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로마를 포기하지 않은 고트족은 계속해서 로마를 공격했다. 로마를 비롯해 이탈리아 반도 각지에서 벌어진 비잔틴 제국과 고트족의 전쟁은 물경 20년을 끌게 된다.

554년 벨리사리우스의 후임 나르세스가 고트족을 완전히 토벌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전쟁이 계속된 탓에 이를 떠받치느라 비잔틴 제국의 재정은 완전히 고갈되고 만다. 국고는 텅텅 비었고 국채를 남발한 탓에 제국 정부는 빚더미에 올랐다.

게다가 이토록 고생해서 얻은 땅은 별로 쓸모가 있지도 않았다. 북아프리카가 로마 제국의 곡창 노릇을 하던 것은 옛날 이야기일 뿐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정복했을 당시 북아프리카는 매우 척박하고 가난한 땅이었다.

이탈리아도 오랜 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쟁으로 소모된 재정을 복구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무거운 세금을 물렸지만 현실적으로 이탈리아에 그만한 돈은 없었다. 오히려 증세에 대한 반발로 반란만 유발시켰을 뿐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세력을 명분 없이 정벌하고 경제적으로 쓸모없는 땅을 정복하는, 불필요하고 불합리한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 자신은 불명의 명성을 얻었지만 시민들은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후임 황제 유스티누스 1세는 정부 재산을 보관하는 창고에 갔다가 절망감을 느꼈다. 그곳에는 금은보화 대신 국채 증서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재정이 바닥난 비잔틴 제국은 심각한 침체기로 진입했다. 제국이 더 이상 대군을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그 때를 노려 사방에서 외적이 침입했다.

서쪽에서는 랑고바르디족이 쳐들어왔다. 비잔틴 제국은 그토록 힘들게 얻은 이탈리아 반도를 얼마 유지하지도 못한 채 거의 대부분 뺏겼다. 제국에 남은 것은 남쪽 지방 일부와 시칠리아 섬뿐이었다.

동쪽에서는 사산 조 페르시아가 침공해왔다. 아바르족은 북쪽에서 강습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분전으로 겨우 그들을 물리치자 이번에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을 쥔 이슬람 군대가 등장했다.
야르무크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군은 결정적인 참패를 당했다. 제국은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나톨리아 등 동방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8세기에는 이슬람 군대가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몰려왔다.

무모한 원정이 불러온 재정 고갈 때문에 제국이 멸망의 위기로 몰린 것이다. 당시 황제인 레오 3세의 투철한 의지와 신무기 ‘그리스의 불’ 덕분에 간신히 이슬람 군대를 물리쳤지만 이후 제국이 재건되기까지는 수백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비잔틴제국 비사’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를 ‘하늘이 보낸 역병’이라고 묘사했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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