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역사 2cm] 조선 최정예 군대 '어영청'에서 어영부영 유래

입력 2017. 4. 2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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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사태 이후 공공기관장 인사가 차질을 빚고 있다.

기관장 공백 현상이 몇 달씩 지속하는가 하면 일부 기관장은 임기 만료 후에도 자리를 유지한다.

조선은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이후 특수부대인 어영군을 만든다.

이후 5천 명까지 증원하고 명칭을 어영청으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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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최순실 사태 이후 공공기관장 인사가 차질을 빚고 있다.

기관장 공백 현상이 몇 달씩 지속하는가 하면 일부 기관장은 임기 만료 후에도 자리를 유지한다.

업무 파행을 줄이려면 후임자를 뽑아야 하지만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없어 실현 가능성은 작다.

공공기관 인사는 새 정부에서나 정상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임기를 마친 기관장들이 그때까지 복지부동한다면 '어영부영' 자리만 지킨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아무런 의지도 없이 되는대로 행동하는 모양을 일컫는 '어영부영'은 조선 군대에서 유래한 말이다.

조선은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이후 특수부대인 어영군을 만든다.

집권 서인 세력의 무력 기반을 강화하고 왕을 경호하는 게 창설 목적이었다.

260명으로 출발한 이 부대는 포격 훈련을 주로 받았다.

포는 조총이나 활, 칼 등을 능가하는 최신 병기였다.

이듬해 이괄 난을 계기로 부대 규모가 커진다.

이괄은 인조반정 논공행상에서 밀려 평안도 군사령관에 임명되자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한다.

인조는 어영군 경호를 받으며 충남 공주로 피신한다.

그곳에서 어영군은 산골 포수 약 600명을 흡수한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

반란군이 진압됐을 때는 전체 병력이 1천 명을 넘어선다.

이후 5천 명까지 증원하고 명칭을 어영청으로 바꾼다.

주력 부대는 총이나 포로 무장한 사수와 포수였다.

근접전을 맡는 살수병도 양성했다.

살수병은 초승달을 닮은 칼과 무거운 쇳덩어리, 타격 도리깨 등으로 무장했다.

아들 효종이 즉위하고서 어영청 편성과 성격이 크게 달라진다.

1652년에는 전체 병력이 2만1천 명으로 대폭 확대된다.

청나라에 당한 수모를 설욕하려는 조처다.

인조는 1637년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삼전도 굴욕'을 겪었다.

어영청 전략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한다.

병력은 특수훈련을 받은 직업군인으로 편성했다.

청나라 기병인 팔기군에 대응하려고 신무기도 개발한다.

수레에 화포를 싣고 다니다 적군을 만나면 곧바로 포격할 수 있도록 설계한 전차다.

병자호란 당시 팔기군은 하루 약 100km를 달렸다.

임진왜란 때 왜군 북상 속도보다 무려 4배나 빨랐다.

어영청 전투력은 1654년, 1658년 두 차례 나선정벌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나선정벌은 청나라 요청을 받은 조선 조총부대가 러시아군과 중국에서 벌인 전투다.

함경도에서 모집된 조총부대는 무기 성능이 뛰어나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둔다.

청나라 군대는 3년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이런 조총부대도 북벌 선봉 부대로 단련된 어영청보다는 전투력이 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영청은 오늘날 특전사에 비유되는 최정예 부대였기 때문이다.

북벌계획은 준비만 하다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끝내 무산된다.

어영청은 주적이 사라지자 사기가 급격히 떨어진다.

양반 자제로 구성된 지휘부는 주색잡기로 소일했다.

장충단( 忠壇) 공원 자리에 있던 어영청 소속 수도방위 오군영의 하나인 남소영. 김홍도 작품(사진=고려대박물관)

병사들도 자연스레 오합지졸로 변했다.

1706년 이후에는 부대가 축소되고 이름도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1881년 첫 근대식 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된 후에는 극심한 차별까지 받는다.

결국, 3년 후 갑오개혁이 발표된 1894년 폐지된다.

당시 어영청은 기강이 문란해진 탓에 많은 지탄을 받았다.

군기가 풀린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라는 뜻으로 '어영비영'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이후 발음이 어영부영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공공기관은 국민 혈세를 투입해 공적 이익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이런 조직이 국정 혼란기를 틈타 어영부영하다 보면 조선 말 어영청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had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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