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녀의 비극적 사랑, 혁명사를 재구성하다

권진경 2017. 4. 27. 14: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리뷰] 에릭 로메르의 역사 뒤틀기.. 캐릭터의 심리에 초점 둔 영화 <영국여인과 공작>

[오마이뉴스 글:권진경, 편집:곽우신]

ⓒ 필름뮤지움 디스트리뷰티
"나는 (프랑스 혁명) 당시 사람들 모두가, 반동파로 보이는 것이 두려워서 왕(루이16세)이 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생각합니다." - <에리크 로메르-아마추어리즘의 가능성> 중에서

<영국여인과 공작(2001, L'Anglaise Et Le Duc / The Lady And The Duke)> 이 공개될 당시, 에릭 로메르 스스로도 예상했겠지만 적잖은 비판에 휘말리게 된다. 에릭 로메르 스스로는 <영국여인과 공작> 개봉 당시 가진 <센시즈 오브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영국여인과 공작>)를 만든 데는 어떠한 정치적 이유도 없으며, 왕당파든 반왕당파든 어떤 정당을 옹호하기 위함이 아닌 관객들에게 역사에 대한 취향을 갖게끔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선을 긋기는 했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가 지배하는 프랑스에서 주류의 역사관에 반하는 로메르의 시대극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앞서 언급한 <센시즈 오브 시네마>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로메르는 우연히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16세의 사촌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정부인 그레이스 엘리엇의 회고록을 요약한 글을 읽고, 그녀와 오를레앙 공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기존 파리를 무대로 한 시대극의 연출, 촬영 방식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로메르는 아예 회화적 배경을 도입한 독특한 미장센을 보여 준다. 특별히 프랑스 혁명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던 로메르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집중하기 보다, 비극적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영국 여인 그레이스의 시선에서 그녀가 당시 느꼈던 감정과 심리를 포착해 낸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 필름뮤지움 디스트리뷰티
영국 귀족인 그레이스 엘리엇(루시 러셀 분)은 그녀의 조국 영국보다 프랑스를 더 사랑한다. 한 때, 그레이스의 연인이었으나 지금은 좋은 친구로 지내기로 한 오를레앙 공(장 클로드 드레이퍼스 분)은 그녀의 안전이 걱정된 나머지, 영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지만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열렬히 지지하는 왕당파였던 그레이스는 오를레앙의 권고를 무시한다. 

그로부터 2년 뒤, 민중들의 봉기는 더 심해지고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레이스는 파리 근교에 위치한 자신의 별장에 몸을 숨긴다. 하지만 누군가의 탈출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어렵게 파리를 찾은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남자가 오를레앙의 정적 샹네스라는 사실을 알고 잠시 고민에 빠지지만, 이내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한다. 

로메르는 그레이스 엘리엇을 두고 영국적인 불굴의 정신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를 내린다. 실제 그레이스의 용감한 면모는 영화에서 고스란히 그려지기도 한다. 반면, 영화 말미에 잠깐 등장하는 로베스 피에르를 위시한 공화파들은 무례하고 의심많고 감정에 자주 휩쓸리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보여진다. 프랑스 혁명 당시 특정 세력을 옹호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로메르의 변이 무색하게, 민중들의 봉기와 루이16세의 처형, 공화정에 반기를 드는 그레이스의 시점에서 움직이는 <영국 여인과 공작>은 영화로 정치적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로메르의 진정성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영국 여인과 공작>은 평단과 관객의 높은 지지를 받았고, 2001년 열렸던 제58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 특별 공로상을 수상하였다.(물론 이는 영화에 대한 상이라기 보다 에릭 로메르가 영화계에 헌신한 공로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크겠다.) 비록 프랑스 혁명 당시 사람들 모두가 왕당파로 보이는 것이 두려워서 루이16세의 죽음에 동조했을 것이라는 로메르의 주장에는 결코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영국 여인과 공작>에 갈채를 보낼 수 있는 것은 주인공 그레이스를 불안전한 시대에 대처해내가는 능력을 가진 인물로 그리고자 했던 로메르의 의도가 통했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기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는 보통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에릭 로메르 영화 속 사람들은 자신의 배우자, 연인을 옆에 두고도 틈만 나면 곁눈질을 시도하고, 불륜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상당수다. 역시 비슷한 소재를 주로 영화화해온 홍상수가 '한국의 에릭 로메르'라는 평가를 듣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홍상수도 그러하지만, 에릭 로메르는 종종 상식을 빗나가는 자신의 허구적 인물들에 대한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을 창조한 로메르는 방관자 입장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일종의 '관찰자'에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틀에서 <영국 여인과 공작>을 봤을 때, 프랑스 혁명을 두고 정치적으로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던 그레이스와 오를레앙은 비극적 운명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서 어느 한 입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허구의 캐릭터들이다. 

ⓒ 필름뮤지움 디스트리뷰티
영화 속에 묘사된 프랑스 혁명은 그레이스와 오를레앙에게 중립을 선택할 자유를 주지 않는다. 프랑스 역사에서 오를레앙 공은 왕위 찬탈을 노리고 급진적인 자코뱅당에 가담 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영화에서는 프랑스의 앞날을 걱정하는 진실한 애국자로 묘사된다. 프랑스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지만, 지지하는 방향이 완전히 달랐던 그레이스와 오를레랑은 그럼에도 서로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버리지 않는다. 상대방을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내걸 수 있었던 그레이스와 오를레앙의 사랑은 아름다웠지만, 다만 에릭 로메르 영화의 주 배경이었던 현대물과 달리 그들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을 뿐이다. 

언제 단두대에 올라갈지 모르는 풍전등화같은 현실이지만, 그레이스는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레이스에게 위해가 가해질 수록, 그녀는 더 단단해지고 강해진다. 에릭 로메르가 실존 인물인 그레이스 엘리엇의 삶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 있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시대 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왕정 복고를 외치는 그레이스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소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레이스 엘리엇이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보여지는 가는 철저히 관객 스스로의 판단에 달려있다. 

에릭 로메르는 (그 이상을 의도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프랑스 혁명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기에 살았던 그레이스 엘리엇이라는 사람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고, 그의 바람은 영화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공교롭게도 <영국 여인의 공작>의 배경인 프랑스 혁명은 촛불혁명이후 새로운 정부 수립을 눈앞에 둔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안타깝게도 하나의 상황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일치하지는 못한다. 정치적으로 정반대의 입장에 놓여있던 그레이스와 오를레앙은 그 때문에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적어도 서로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잃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그레이스와 오를레앙의 운명 또한 비극으로 치닫게 되었지만 자신들의 삶과 현실을 냉소하지 않았던 주인공들의 태도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가 늘 그러하듯이 힘든 상황에도 다시금 살아갈 용기를 안겨 준다. 에릭 로메르의 <영국 여인과 공작>은 오는 28일, 5월 4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에릭 로메르 회고전-연애의 모럴'에서 만날 수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