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안전'없는 철거 계획..잇따른 붕괴 사고

박영민 2017. 4. 2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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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삼동 철거현장

지난 22일 오전 10시쯤 서울 강남구의 한 5층짜리 건물 철거 현장에서 1층 바닥이 무너져 굴착기가 지하 2층 아래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공사 현장 주변에서 물을 뿌리던 몽골 국적의 노동자 2명이 매몰됐다가 3시간여 만에 모두 구조됐다.

낙원동 철거현장

앞서 지난 1월엔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있던 한 숙박업소의 철거공사 현장에서 지상 1층 바닥이 붕괴되면서 작업 중인 노동자 4명이 추락했다. 이 사고로 2명이 다치고 김 모(61) 씨와 조 모(49) 씨가 목숨을 잃었다.


"또 안전사고…" 잇따른 철거 현장 붕괴

두 사고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1층 바닥이 갑자기 무너졌다는 점이다. 사고 직전 무게 20톤이 넘는 굴착기가 철거 작업을 하던 것도 똑같다. 굴착기 옆에서 물을 뿌리던 근로자들은 순식간에 잔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관기사] 종로 붕괴 사고와 '판박이'…근본 대책 절실

낙원동 붕괴 사고를 조사한 경찰은 1층을 지지해야 할 임시 철제 기둥(잭서포트)이 안전기준에 턱없이 모자라게 설치된 탓에 무너졌다고 밝혔다. 공사를 할 때 아래 2개 층에서 하중을 받치는 지지대를 각 18개씩 설치하게 돼 있음에도 이들은 1개 층에 3개만 설치했다.

또 원래 14.5t짜리 굴착기를 사용했어야 하지만 작업을 빨리 마무리하기 위해 21t짜리로 임의로 변경한 것으로 밝혀졌다. 곧바로 치워야 하는 철거 폐기물 400t가량을 쌓아둔 채 공사를 진행하다 결국 하중을 견디지 못한 바닥이 무너지게 됐다고 경찰은 밝혔다.

철거 업체가 공사 시간을 단축하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안전기준을 무시했고, 이들의 안전불감증이 끝내 붕괴 사고로 이어진 셈이다.

철거계획서, 안전 보다 주변 민원 대응

경찰은 지난 25일부터 역삼동 철거현장 붕괴사고와 관련해 합동감식단을 구성해 현장조사에 들어갔다. 아직 정확한 붕괴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안전불감증이 원인이라는 건 해당 업체가 제출한 철거계획서를 보면 추측이 가능하다.


취재진이 입수한 철거 업체의 철거 시공계획서는 모두 16장으로 구성돼있다. 철거 계획의 목적은 "계약 공기 내 목적물을 발주자에게 제공"이다. 또한 계획서의 상당 부분을 소음과 비산 먼지에 따른 주변 민원 대응 계획이 차지하고 있다. 철거 현장이 유동인구가 많은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안전'에는 소홀했다는 비판을 피하긴 어려운 대목이다.

[연관기사] 역삼동 붕괴사고…안전대책 빠진 철거 계획

가장 중요한 철거 방법은 '철거로 인한 현 구조물을 진단한다'고만 두루뭉술하게 적혀있을 뿐이다. 5층짜리 건물을 어떻게 철거를 한 것인지, 그때마다 예상되는 하중은 얼마인지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는 것이다. 살수 작업을 하면 콘크리트에 하중이 더 쏠리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계산도 빠져있다.


공정별 작업량 및 작업일수는 경험적 자료에 따른다고 적혀있는데, 이는 현장소장의 경험을 의미한다. 한 철거 현장 관계자는 "경험이 많은 현장소장에게 맡기면 알아서 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장소장은 업체에 늘 상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사기간 동안 임시로 고용된 사람일 뿐이다.

부실한 철거 계획서…어떻게 통과했나?

이렇게 부실한 철거 계획서는 단 하루 만에 구청의 심사를 통과했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현행 건축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업체의 철거 멸실신고는 24시간 이내에 처리해줘야 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신고서를 살펴 보니 처리 기간은 '1일'이라고 명시돼있었다. 업체의 철거 계획서를 검토하고 현장에 직접 나가 살펴보거나 전문가들이 모여서 회의를 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관계자는 "만약 우리가 철거 멸실신고를 처리하지 않고 시간을 끌면 업체에서 왜 법에도 없는 사항을 가지고 그러냐고 항의를 해온다"며 시간 여유를 가지고 검토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더 큰 문제는 철거 멸실신고는 철거 7일 전까지 관할 시·구청장 등에게 하도록 돼 있는데, 이를 어겨도 과태료 30만 원만 부과된다는 점이다. 관계자는 "공사기한을 맞추기 위해선 우선 철거를 하고 나중에 신고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며 "서둘러 철거를 한 뒤 공사 대금을 받고 과태료를 내는 것이 더 이득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또 착공을 하게 되면 감리자를 선정해서 공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착공 전에 철거를 할 땐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관리 감독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는 점도 있다. 대부분의 업체가 착공 전에 철거부터 하는 이유다.

철거 현장 안전 대책 실효성은?

지난 2012년에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붕괴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철거 공사의 경우 안전에 관련된 규제가 미비하다는 점이 지적됐다. 국토해양부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철거할 경우 철거 계획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철거 현장 사고는 이어지고 있다.


낙원동 붕괴 사고 이후 서울시는 "서울 시내 5층 이상 등 일정 규모 이상 건물을 철거할 때는 사전 안전 심의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대책을 발표했다. 관계 전문가가 참여해 해체공사계획서를 작성하고, 시ㆍ구 건축위원회가 철거 계획을 사전에 꼼꼼히 살펴보도록 했다.

또 현행 건축법상 '신고제'인 건축물 철거 규정을 '허가제'로 바꾸고, 일정 규모 이상 건축물 철거 시 전문 기술자 참여를 의무화하는 '철거 설계제'를 도입하도록 국토교통부에 건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까지 '안전 심의'는 권고 사항에 불과하다. 역삼동 철거 업체는 강남구청의 안전심의위원회가 열리기도 전에 공사를 시작했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법적 의무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사실상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인했다.

1%의 가능성…100%의 위험

결국 이번 역삼동 철거 현장 붕괴 사고는 "현행법이 그렇다"는 관계 당국과 현행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하는 철거 업체가 만들어 낸 사고라고 볼 수 있다.

한때 '규제 프리'라는 이름으로 현장에서의 불필요하게 여겨지는 관계 법령들이 손질의 대상이 됐다.다. 업체들은 철거 규정을 허가제로 바꾸고 안전심의위원회의 검토를 거치는 건 불필요한 규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장치를 과도한 규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금 늦더라도 안전하게 작업하기 위한 조건이 마련돼야 또다시 같은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안전에 있어서만큼은 1%의 가능성이 100%의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보다 촘촘한 안전망 마련에 나서겠다"는 어느 관계자의 말처럼 이번 사고가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안전해지는 발판이 돼야한다.

박영민기자 (youngmi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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