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당당해야 더 즐겁죠"

이정국 입력 2017. 4. 27. 09:36 수정 2017. 4. 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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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커버스토리
원칙 갖고 탕진하는 '만렙' 탕진재머 3인의 이야기

전문가 "절제도 탕진잼 일부"
되팔 생각 먼저 하지 말고
예산·활용법 미리 살피면
당신도 진정한 탕진 고수

[한겨레]

최우혁씨가 자신이 모아온 ‘일부’ 에어조던 농구화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사진 이정국 기자
무언가 살 때 재미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소비를 할 때 인간의 뇌는 쾌락을 전달하는 도파민 등의 신경물질을 뿜어낸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뇌는 더 큰 보상을 원하게 된다. 계속 사야만 하는 쇼핑 중독에 빠지는 이유다. 하지만 중독은 기쁨이 아닌 고통이다. 이런 이유로 탕진잼(탕진+재미)은 쇼핑 중독과는 다르다. 소소한 소비로 일상에서 재미를 느끼고 삶의 활력소를 찾는 ‘탕진재머’들에겐 원칙과 법도가 있다. 탕진잼의 핵심 가치는 절제다. 덕성여대 심리학과 최승원 교수는 “탕진잼을 즐기다 안 하면 허전함과 같은 심리적 금단현상이 생길 수 있지만 한편으론 이것 자체가 중요한 여가활동”이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충동의 절제 또한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배고플 때 먹는 밥이 가장 맛있는 것처럼 말이다.
탕진재머들은 재미를 위해 절제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탕진을 통해 인생의 재미를 찾아나가는 ‘만렙’(滿+Level. 최고 레벨) 탕진재머들에게서 탕진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이야기를 사라

방 안이 신발로 가득했다. 한 사람이 누울 공간 정도 빼곤 전부 신발이었다. 18일 만난 최우혁(36)씨는 신발을 모으는 탕진재머다. 하지만 아무 신발이나 모으는 게 아니다. 나이키의 ‘에어조던’ 시리즈만 모은다. 농구 마니아인 그는 마이클 조던의 열혈 팬이었다. 그가 처음 산 에어조던은 2003년 9월, 17만9000원을 주고 산 ‘에어조던3’다. 마침 그해는 마이클 조던이 은퇴했던 해이기도 했다.

마이클 조던이 신었던 농구화를 신고 농구를 하면 기분이 어떨까 하는 단순 호기심에서 시작했지만, 기능성과 세련된 디자인이 주는 신발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그 뒤로 닥치는 대로 에어조던 시리즈를 모으기 시작했다. 개인 매매, 외국의 온라인 거래 등 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이용했다. 한때 1000켤레의 신발이 모여 서울 동작구 집 근처에 창고를 임대해 보관할 정도였다. “무턱대고 모으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이 했다. 그 결과 옥석을 고를 수 있게 됐다. 지금은 다 팔거나 나눠주고 알짜배기 190켤레만 갖고 있다.”

그는 방 한구석에서 박스를 뒤져 농구화 한 켤레를 꺼냈다. 1996년 출시된 ‘에어조던11’ 시리즈였다. 가장 비싸게 거래되는 에어조던 시리즈로 지금 시세가 300만원을 넘는다고 했다. “당시 마이클 조던은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해 슬럼프에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이 농구화를 신고 1995년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의미가 있는 신발이다” 그는 신발에 얽힌 이야기를 술술 읊었다.

그의 탕진잼은 신발이라는 물건 자체보다는 이러한 이야기에 맞춰져 있다. 신발에 얽힌 지식이 늘어남에 따라 재고 정리하고 끄적끄적 서류작업 하는 사무직이 재미가 없어졌다. 2010년, 그는 매장 판매원을 자원했다. 현재 나이키 매장에서 판매팀장으로 일하며 자신의 지식을 손님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신발 한 켤레를 팔더라도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말해주니 손님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 신발 이야기를 들은 손님이 감탄해 팁을 얹어 줄 정도란다.

“되팔려고 모으면 안 된다. 진정한 탕진잼이 아니다.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이 담는 콘텐츠를 산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가 초보 탕진재머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박현미씨가 모아온 필기구들. 박현미씨 제공

소득을 고려하라

박현미(41)씨는 펜을 모은다. 2003년 생일선물로 독일의 라미 만년필을 받고 나서다. 어릴 때 아버지가 써왔던 만년필에 대한 추억도 추억이지만, 꾹꾹 눌러쓰지 않아도 되는 만년필만의 매력에 푹 빠졌다. 만년필과 볼펜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볼펜은 손에 힘을 주어 눌러야 글씨가 나오지만, 만년필은 종이에 갖다 대는 정도만 해도 글씨가 써진다. 모세관 방식(만년필 안의 모세관을 따라 잉크가 종이에 닿는 방식)을 쓰는 특성 때문이다.

그동안 몽블랑, 파카, 워터맨, 펠리칸 등 다양한 만년필을 모으면서 날마다 만년필 탕진재머로 거듭났다. 브랜드마다 개성 있는 펜촉과 디자인을 즐기게 됐다. 그러다가 볼펜도 탕진 사정권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스테디셀러인 모나미가 최근 기본 디자인은 살리면서, 소재를 고급화한 프리미엄 라인을 내놓기 시작하자 관심이 생겼다. 스위스의 카란다시(까렌다쉬) 볼펜 같은 명품 볼펜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디자인적인 완성도는 박씨에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의 이런 탕진은 좀더 다양한 정보를 얻기 위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문방삼우’라는 비슷한 취미를 가진 이들이 모인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활발한 정보 교류를 하고 있다. 현재까지 만년필 400자루, 독특한 볼펜 수십 자루를 모은 상태다.

펜의 가격은 제조사 색상, 재질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가 갖고 있는 가장 비싼 펜은 5~6년 전 구입한 몽블랑 ‘솔리드 골드’라는 만년필로 1100만원에 달한다. 펜촉과 펜이 모두 18케이(K) 금으로 돼 있는 제품이다. 만년필 애호가들이 “언젠간 갖고 싶다”며 노리는 펜 가운데 하나며, 현재는 단종됐다.

“너무 비싼 것만 모으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다이소에서 천원대 볼펜도 모은다”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소득과 예산 안에서 탕진을 하는 것이다”라고 박씨는 답했다. 그는 자신 월소득 20~30% 안에서 구입하는 것이 원칙이다. 펜 수집을 시작하려는 초보들에겐 “처음부터 비싼 제품을 사지 말고, 가용 예산 안에서 합리적인 제품을 사라”고 조언했다. “자신의 예산 안에서 사고 싶은 것을 사면 문제될 것이 없지 않으냐”고 그는 되물었다.

레고피규어도 인기있는 탕진 아이템이다. 조덕호씨 제공

스스로에게 질문하라

조덕호(28)씨는 피규어 탕진재머다. 포털에서 ‘조덕호의 아카이브’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그는 이 ‘바닥’에선 꽤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의 탕진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2015년 8월, 옛 직장에서 첫 월급을 받은 뒤 5만5000원을 주고 산 일본 타미야의 ‘레오파르트’ 전차 피규어가 탕진의 시작이었다.

처음부터 체계적인 수집을 하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손 가는 대로 무작정 모아오다가, 지난해 4월 블로그를 개설하면서 체계적인 수집의 필요성을 깨닫게 됐다.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관통하는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주로 영화와 관련된 레고 피규어 수집에 열을 올리게 됐다. 영화 <백 투 더 퓨처>, <스타워즈> 그리고 마블 히어로 영화를 소재로 한 레고 피규어가 그의 애장품이다. “영화를 워낙 좋아해요. 영화 속 히어로들을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그렇게 모인 피규어가 700여개다.

체계적 탕진은 직업으로 이어졌다. 최근 취미 매칭 서비스 회사인 ‘하비박스’의 하비큐레이터로 일하게 된 것. 그는 현재 이 회사에서 회원들에게 피규어 취미를 소개하고 추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손가락만한 작은 레고 피규어 하나에 수십만원을 지급할 때도 있지만 그에게는 원칙이 있다. 샀을 때 “좋은 지름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제품을 선별해서 고른다. 사기 전에 어떤 식으로 진열을 할지도 고려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왜 사느냐”고 스스로 질문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에겐 소중하지만 누군가에겐 애물단지로 보이는 게 탕진 아이템이다. 부모님, 남편, 아내 등이 반대한다면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나만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 당당한 탕진을 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스스로 이것을 왜 사야 하는지 질문하고 의심해야만, 투자·취미·수집 모든 측면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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