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도 적폐다

입력 2017. 4. 26.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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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성소수자 혐오에 발목 잡힌 차별금지법…
심상정 정의당 후보만 “제정하겠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2014년 12월10일 서울시청에서 농성하는 모습. 그들은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면담에 응하라고 요구했다. 박승화 기자

“동성애는 윤리·도덕에 어긋난 성적 행위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회악.”

“동성애 차별금지법안은 동성애 확산을 조장해서 결혼율 감소, 이혼율 증가, 저출산 문제, 직간접적 에이즈 확산 등 사회병리 현상을 심화시킨다.”

“동성애자들이 청소년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을 유혹하고, 피해자들은 강제로 동성애자가 될 것이다. 동성애자에 의한 성폭력이 증가할 것이다.”

10년 전인 2007년 10월2일. 당시 법무부가 성적 지향 등 20개 사유에 의한 사회적 차별 금지를 뼈대로 하는 ‘차별금지법’을 입법예고하자 ‘동성애차별금지법안 저지 의회선교연합’이 제출했던 ‘반대의견서’ 내용이다. 이들의 의견서는 이성적 ‘반대’라 부르기 힘든 전형적인 ‘혐오표현’(Hate Speech)으로 읽히지만 참여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김영진 전 의원과 대형 교회 유명 목사 등이 주도한 이 ‘혐오활동’은 정부 입법안을 뒤집는 데 성공한다.

문재인·안철수 차별금지법 제정 사실상 반대

법무부는 그해 12월 원안이 규정한 20가지 차별 금지 사유에서 △성적 지향 △출신국가 △언어 △학력 △병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 7가지를 삭제한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공공 이익을 명분으로 차별금지법의 입법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입법 농단’에 가까운 개악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정치 분야 10대 핵심 공약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던 ‘사회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그렇게 물거품이 됐다.

성소수자 혐오는 지난 10년 동안 국가 인권정책의 발전을 가로막은 대표적 ‘적폐’다. 국회에서 그동안 발의된 6건의 입법안(노회찬, 박은수, 권영길, 김재연, 김한길, 최원식 대표발의)은 모두 성소수자 혐오 세력의 집요한 반대로 폐기되거나 철회됐다. 2014년 11월28일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소수자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선언을 담은 ‘서울시민인권헌장’ 역시 ‘서울판 차별금지법’이라는 성소수자 혐오 활동에 의해 시민위원회 표결로 채택된 지 이틀 만에 전격 폐기됐다. 서울시는 당시 “합의에 실패했다”는 이유를 들었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그해 12월1일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 조찬간담회에 참석해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백기’를 들고 만다.

이번엔 다른 결과를 끌어낼 수 있을까.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차별금지법 관련 입장을 살펴보면 여전히 전망이 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5년 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가 공약했던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두 후보는 모두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국회에 의석을 가진 5개 정당의 대선 후보 가운데 차별금지법 제정을 명시적으로 약속한 후보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유일하다.

문재인 후보는 지난 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소속 목사들과 면담 자리에서 “현행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배제되거나 차별돼서는 안 된다’고 규정돼 있으므로, 추가 입법으로 인한 불필요한 논란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더불어민주당의 공식 입장”이라고 밝혔다. 안철수 후보 역시 3월 ‘세계 여성의 날’ 기념 한국 여성대회에 참석해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해) 사회적으로 여러 의견이 있다. 사회적 공론화와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유보적인 의견을 내놨다.

<한겨레21>은 4월12일 각 정당의 대선 후보들에게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입장을 다시 물었다. 이날은 전국 107개 시민단체가 모인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시민연대’가 4월5일 대선 후보에게 차별금지법 제정 관련 정책 질의서를 보내면서 회신 마감 시한으로 정한 날이었다. 심상정 후보와 김선동 민중연합당 후보만 이를 지켰다.

페미니스트라면서…

문재인 후보는 시한을 넘긴 지 이틀 만인 4월13일 <한겨레21>에 보내온 공식 입장에서 “저는 어떠한 혐오나 차별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반대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신분, 학력, 신체조건 등 일체의 차별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법으로 금지한 평등권 침해와 차별 행위가 반드시 근절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 또한 인권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과 공감대를 높이기 위한 노력도 정부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안철수 후보 쪽에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공식 입장을 전해오지 않았다. 다만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3월8일의 입장에서 변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줬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쪽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한다. 차별금지법과 관련해선 종교계에서 동성애 문제로 인해 상당 부분 반대하고 있다. 소수자들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법제화하게 되면 오히려 그걸 인정해주는 꼴이 되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실상 반대 입장으로 해석된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쪽은 차별금지법 제정 의견을 묻는 수차례의 전화와 문자 질의에 응하지 않았다.

저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면서 여성 유권자들을 향한 공약을 쏟아내는 후보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에는 사실상 반대 혹은 유보 의견을 밝히는 것을 두고 ‘이중플레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각 후보들은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문재인), “나는 모태 페미니스트”(유승민), “30년 맞벌이 부부로 살면서 한 번도 ‘밥 줘’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안철수)고 말한 바 있다.

권박미숙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지금 대선 후보들의 행보는 정치적 철학이나 비전을 보여준다기보다 어떻게 하면 내 표가 덜 떨어질지에 매몰된 단기적이고 이중적 행보로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보수의 유력 후보가 없어서 정권 교체만이 아닌 어떤 정권 교체여야 하는지를 토론할 수 있는 게 이번 대선이다. 여성 인권을 이야기하면서 성소수자 문제에 침묵하는 사람이 과연 이번 대선의 후보로 자격이 있나 질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동희 불꽃페미액션 활동가도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은 형용모순”이라고 했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씨 파면을 결정한 다음날인 3월11일 촛불집회에 참여한 2천여 명의 시민이 집단토론을 통해 완성한 10개 ‘촛불 개혁 과제’ 가운데는 ‘성평등과 사회적 소수자 권리 보장’ 항목이 포함돼 있다. 장병권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은 “대선 후보들 가운데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목사를 만나는 사람은 있어도, 성소수자를 만나는 사람은 없다. 면담 요청서를 3월28일에 보냈는데 면담 의사를 밝힌 것은 심상정 정의당 후보뿐이다”라고 말했다.

“표 계산 위해 타협할 사안 아냐”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는 “5·18 유공자가 공무원시험 가산점을 받아서 일반 공시생들이 피해를 본다거나 성소수자들의 에이즈 치료 때문에 건강보험 재정이 파탄 난다는 등 소수자 혐오 담론은 매우 위험한 수준으로 진화했다.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의 문제는 정치 지도자가 표 계산을 위해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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