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2017. 4. 2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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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여자친구에게 연애편지를 써야 하는 ‘청춘’이 있었다. 뭐라도 솔깃한 내용을 끄집어내야 하는데, 쓰기만 하면 내용이 유치했다. 꾀를 냈다. 팝송 가사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글이 아닌 영어로 쓰면 ‘닭살이 돋는’ 유치함은 피할 수 있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팝송이었다. ‘Oh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 just can’t be f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

우리말로 옮기면 정말 ‘닭살이 돋는’ 가사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주겠다는 이야기인데, 연애편지의 소재로는 아주 적절했다. 나중에 여자친구가 자기 친구들에게 이 편지를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가끔 이 생각을 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해진다. 물론 편지 속 팝송 가사처럼 그 여자친구의 다리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그 편지 속 약속은 헛된 이야기가 됐다.

사실 결혼을 앞두고 연인에게는 무엇이든 다 해줄 것처럼 약속을 하게 마련이다. 특히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이 자주 쓰는 ‘상습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나면 그 약속은 물거품이 된다.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해야 하고, 대부분 설거지의 몫은 여자에게 돌아간다. 물 한 방울 묻지 않기는커녕 주부습진에 걸릴 지경에 이른다. 이번 대선에 나선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는 설거지는 ‘하늘이 여자에게 정해준 일’이라는 말로 구설수에 올랐다. 보수정당의 후보라고 해서 면피가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졌다.

연인들의 약속처럼 허망한 것이 있으니, 바로 선거때 나오는 공약들이다. 예전 국회의원 선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공약이 ‘다리를 놔준다’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다리’야 큰 혜택도 아니지만 시골에서는 ‘다리’는 큰 혜택이었다. 비가 조금만 와도 길이 끊겨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못하고, 어른들은 5일장에 가지 못했다. 어릴 때 비가 오면 학교에는 이들 마을에서 온 아이들이 운동장에 모였다. 오전 수업만 하고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읍내에 사는 우리는 그게 부러웠다. 걔들이 학교에 오지 못할 날에는 더욱 부러웠다. 하지만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비가 오면 고립이 됐다. ‘다리’가 어마어마한 존재였다. 국회의원에 출마한 후보마다 다리를 놔주겠다고 했지만 당선되고 나면 다리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 몇 번 선거에서 우려먹고 난 뒤에야 겨우 다리가 놓였다. 다리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그 다리에는 ○○○(의원 이름) 다리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런 우스개가 있다. 한 정치인이 “다리를 놓아드리겠습니다”라고 외치자, 유권자가 “우리 마을에는 강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정치인의 임기응변이 탁월했다. “그럼 강을 파드리겠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정치인을 비꼰 것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공약이 선거판을 휩쓸었다. “65살 이상 모든 어르신한테 내년부터 20만원의 연금을 드리겠다”는 것이 대표적인 헛공약이었다. 어르신들의 표심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지금 생각해보면 낯뜨거운 ‘유치한’ 공약이었다. 유치한 공약에 속지 않으려면 유권자들은 눈을 부릅떠야 한다. 마치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가 연인의 삶과 약속을 꼼꼼히 살펴보듯이 말이다. 알 만한 분은 다 잘 알겠지만 다리를 놓는 것도 힘든 일지만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이 정말 힘든 일이다.

<윤호우 편집장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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