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정부, R&D 패러다임 전환.. 기술혁신 리더십 산업계에 맡겨야"
산기협 "산·당·정·청 회의체 필요"
국가 R&D 기획·평가에 기업 참여
사업 초기에 산업계 의견 반영도
부처별로 쪼개진 연구개발 사업에
조세지원 등 정부 정책도 오락가락
기업의 적극적 사업 참여 '걸림돌'
■대선주자에 미래 어젠다를 묻다 (2)
"국가 기술혁신 정책 수립 과정에 기업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직접적인 통로가 만들어져야 한다."
국내 8600여 개 주요 기술혁신 기업을 회원사로 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산기협)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3만8000개 기업연구소를 대상으로 새 정부에 건의할 산업기술 지원정책 의견을 수렴했다. 이 과정에서 한 중소기업 대표는 이같이 지적하며 "산·당·정·청을 포함한 회의체가 신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의 기획과 평가 과정에 기업의 참여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한 기업 최고기술경영자(CTO)는 "산업계 수요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정부 연구개발(R&D) 기획위원회에 들어가 있지 않다"고 지적했고, 다른 중소기업 대표는 "사업화에 필요한 과제가 추진되려면 사업기획 단계 산업계 의견이 체계적으로 반영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협회 측은 이 같은 기업들의 의견을 모아 국회와 정부, 산업계가 참여하는 상설 정책협의기구인 '산업기술 당·정·산 협의체' 구성과, 기업연구소 연구소장 중심의 산업계 전문가로 구성된 '국가 R&D 사업 기획평가단' 운영 등의 정책 건의를 각 대선후보 캠프와 산업기술 관련 정부부처에 전달했다.
◇한계에 직면한 정부 주도 기술혁신=기업들이 새 정부의 국가 기술혁신 체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나선 데는 앞으로 정부 주도의 혁신만으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돌파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크게 작용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이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고도성장을 이루던 시기에는 정부 주도의 기술혁신에 기업들이 발을 맞추며 굵직한 성과들을 거뒀다. 정부 과제를 중심으로 민간 기업, 정부출연연구기관, 대학 등이 참여해 세계 최정상급 기술을 확보한 메모리 반도체 개발과 CDMA(코드분할다원접속) 기술 상용화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현재 한국의 주력 수출산업인 정보통신(ICT), 전자, 자동차 등의 분야가 이 같은 성장 과정을 거쳐왔다.
민간 기업의 연구개발(R&D) 역량이 성장하는 데도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정부가 핵심 전략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춘 '기술 드라이브' 정책을 펼치면서 1981년 53개에 불과했던 기업 부설연구소는 1991년 1000개를 돌파했고, 이들이 국가 총 연구개발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82년 50%를 기록한 데 이어 1990년 80.6%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기업 부설연구소가 정부 R&D 사업의 주관 연구기관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조세·금융지원과 정부구매, 연구인력 병역특례 등의 제도적 지원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국가 R&D 투자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할 정도로 늘었지만 미래 먹거리가 될 파급력 있는 기술 개발 성과가 나오지 않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정부는 지난 10여 년 동안 혁신 시스템 전환을 위한 30여 차례의 전략을 발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국가 R&D의 77.5%를 차지하는 혁신 주체인 민간의 R&D 역량을 질적으로 성장시킬 뚜렷한 방안을 내놓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지속적인 R&D 투자 확대는 연구자들이 기업 과제를 수행하지 않고 정부 과제만으로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고, 이는 기업 수요와는 무관한 연구 주제, 즉 연구자들이 선호하는 연구 중심으로 연구가 수행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부 R&D 성과물에서 기업이 원하는 기술을 적시에 찾지 못하면서 R&D 성과가 시장에서 상용화되지 못하고 있다. 민간 기업의 R&D를 지원할 때도 정부가 기존 기술 및 분야 중심으로 지원하다 보니 기업들이 정부 지원을 받기 쉬운 분야에만 집중해 수요와 시장을 새롭게 견인할 창조적 R&D를 유인하지 못하고 있다.
파급력 있는 혁신 기술이 나오지 않자 기업들은 R&D 투자를 줄여 단기 실적을 높이는 데 급급해졌고, 그 결과 내부적으로 신사업에 필요한 기술을 확보하지 못해 해외 기술에 의존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졌다.
◇취약한 기업 R&D 환경, 국가 경쟁력 악화로 이어져=기업들은 더 이상 정부가 R&D 사업기획과 예산지원, 평가관리를 주도하는 방식으로는 급격한 기술환경 변화에 따라가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국가 R&D 사업 추진과정에서 기술의 최종 수요자인 기업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이 개인 자격의 단발성 참여 형태에 그쳐 산업계 수요를 대변하는 데 한계가 있고, 개발한 기술이 실제 사업화로 이어지는 비중이 크게 낮기 때문이다.
규모가 커지면서 부처별·사업별로 쪼개진 R&D 사업은 산업계의 전략적 사업 참여를 가로막고 있다. 일례로 서비스 로봇 육성 관련 종합계획을 보면 '건설교통 R&D 중장기 계획' '제1차 산업융합발전기본계획' '제2차 국가융합기술발전기본계획' '제6차 산업기술혁신계획' 등으로 중복 수립됐을 뿐만 아니라, 세부계획과 로드맵마저 '제2기 국가나노기술지도' '창조경제 실현을 위한 융합기술발전전략' '2020 해양과학기술로드맵' '국가 특허전략 청사진' 등 부처별·사업별로 쪼개져 있다. 통합적인 전략 방향과 로드맵이 없다 보니 기업들이 정부의 R&D 투자방향을 파악하기 어렵고, 사업 수만 늘어 적기에 적합한 사업을 찾아 활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하는 법·제도 역시 기업들이 장기적인 투자에 나서기 어렵게 만든다.
대표적인 기업 R&D 활성화 정책인 조세지원 제도는 20년 전만 해도 대기업 R&D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를 기본 5%에서 최대 10%까지 공제했으나, 2014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세액공제 한도를 줄이며 1∼3%로 대폭 축소됐다.
이런 취약한 R&D 환경은 기업들의 글로벌 기술 경쟁력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이 2015년 기준으로 한국과 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의 R&D 투자 상위 50대 기업의 R&D 투자 집약도(총매출액 대비 총 R&D 투자율)를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는 3.0%로 프랑스와 함께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부 대기업을 제외한 국내 기업들의 R&D 활동을 통한 혁신 노력이 글로벌 경쟁 기업보다 미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업의 혁신 역량 약화는 결국 국가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진다. 2011년 이후 전체 상품수출액은 정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도입액은 증가세로 돌아서 기술의 외부 의존이 심해지고 있다. 2013년까지 매년 개선되던 기술무역 수지 역시 최근 적자 폭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 특히 기술도입 분야 중에서도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반인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의 비중이 급증하는 추세로, 앞으로 국가 경쟁력의 불안요소로 꼽히고 있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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