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추적>'돼지 흥분제' 요힘빈, 알고 보면 치명적이라는데..

한경진 기자 2017. 4. 2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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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의 ‘돼지 흥분제’ 논란. 홍 후보는 12년 전 펴낸 자서전 ‘나 돌아가고 싶다’에서 45년 전 있었던 강간 미수 사건의 공범이었다는 내용을 스스로 밝혔다. 그는 “무려 45년 전에 벌어진 일을 12년 전 자서전에서 고해성사한 것”이라며 “(사실 관계가) 책의 내용과는 다소 다른 점은 있지만 그걸 알고도 말리지 않고 묵과한 것은 크나큰 잘못”이라고 해명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자서전 '나 돌아가고 싶다'(2005)에 실린 '돼지 흥분제 이야기' /인터넷 캡쳐

자서전에 따르면 ‘하숙집 친구’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할퀴고 옷을 찢을 정도로 강한 저항을 한 끝에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45년 전 일’이지만, 지금 일어났다면 큰 일 날 일이다.

“책을 보면 남성 여러명이 한 명의 여성을 강간하기 위해 사전에 모의하고, 그에 따라 역할 분담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범행 계획을 짜고, 누군가 약물을 구하고, 행위자에게 전달을 해서 실제로 피해 여성에게 먹였어요. 특수강간이자 준강간 미수 사건의 공동 정범이라고 해석할 수 있어요.” (법무법인 천일 노영희 변호사)

하숙집 청년들이 벌인 짓은 ‘혈기왕성했던 시절의 철 없던 행동’으로 봐 줄 수 없는 범죄행위였던 것이다.

실체가 불분명한 ‘돼지 흥분제’

이 일화에 등장한 ‘돼지 흥분제’는 수십년 전부터 마치 ‘데이트 강간약(date rape drug)’의 대명사인 것처럼 잘못 알려져 왔다. 하지만 ▲‘돼지 흥분제’라는 약을 실제로 양돈농가에서 쓰는지 ▲그 약을 돼지가 아닌 사람에게 투여해도 되는지 ▲투여할 경우 최음 효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다. 잊혀질때쯤이면 성 범죄 사건 기사에 ‘소품’으로 등장해왔을 뿐이다.

/조선일보DB

1991년 12월 10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는 20대 남성이 ‘가축용 발정제’를 넣은 주사기로 여성을 위협해 성폭행을 한 혐의로 군 검찰에 넘겨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2010년 10월 4일 조선닷컴에도 돼지 발정제 기사가 나왔다. 보건복지가족부 국정감사 현장에서 양승조 의원이 ‘돼지 발정제’가 성 범죄의 도구로 쓰인다고 지적했다는 내용이다.

/조선닷컴

“돼지 발정제요? 오래 전부터 최음제라고 주장하는 ‘정체불명의 약물’을 그렇게 부르던 사람들이 있었죠. 도대체 어떤 성분을 말하는 것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건국대 동물생명공학과 김진회 교수는 “요즘 현장에서 돼지를 교배시킬 때 쓰는 약물은 암퇘지의 배란을 촉진시키는 ‘호르몬제’밖에 없다”며 “이런 호르몬제는 정맥·복강주사로 투여하는 것이어서 행여 사람이 음료에 타서 먹는다고 해도 위(胃)에서 모두 소화돼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D동물용 의약품업체의 K이사(수의사)는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동물용 성선자극호르몬 주사제’는 투약 즉시 동물에게 발정 증세가 오는 게 아니다”라며 “돼지의 난포·난소 발육을 돕는 호르몬 주사제여서 며칠 뒤에 증상이 온다. 이걸 사람에게 ‘최음제’로 절대 쓸 수 없다”고 말했다.

“동물용 호르몬제를 집중적으로 취급하다보니, 몇 년 전 한 남성으로부터 불쾌한 문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어요. 동남아 국가에 ‘최음제’로 수출할 돼지 발정제를 찾는다면서, ‘수출의 역군’이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 용도로 약품을 줄 수도 없거니와, 수의사 처방전이 없으면 판매하지 못한다고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이병천 교수는 “세간에서 말하는 ‘돼지 흥분제’의 실체를 본 적이 없다”며 “과거 양돈 농가에서 돼지의 발정을 유도하기 위해 수퇘지 냄새를 강하게 압축시킨 ‘스프레이’를 암퇘지 코에 뿌리는 걸 본 적은 있다”고 했다. “이 스프레이도 현장에서 쓰는 걸 거의 못 봤어요. 수퇘지 취기를 모은 것으로 사람이 맡으면 너무나 역겨워서 도저히 쓸 수 없습니다.” 수퇘지의 고환과 침에 담긴 화학물질인 ‘안드로스테논’ 성분이 담긴 스프레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유해물질, ‘요힘빈’

수의학자와 양돈업계 관계자들은 홍 후보 자서전에 등장하는 문제의 ‘돼지 흥분제’는 ‘요힘빈’이라는 물질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한국양돈수의사회 이득근 사무국장은 “수십년 전 양돈장에서 발정제라며 ‘요힘빈’이라는 동물용 의약품을 쓴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런 용도로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요힘빈은 아프리카 요힘베 나무의 껍질에서 추출한 물질이다. D동물용 의약품업체 K씨는 “요힘빈은 동물을 마취시켰다가 깨어나게 할 때 쓰는 ‘길항제’”라며 “건강원 등지에서 사슴 뿔 자르고 난 다음 깨어나게 할 때 썼던 약품”이라고 설명했다.

요힘빈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인체 사용을 금지한 ‘유해물질’이다. 환각·어지럼증·경련·고혈압 같은 부작용이 있고, 심하면 정신을 잃거나 사망할 수도 있다. 1961년 국내 최초의 여판사였던 황모씨 변사 사건에서도 체성분 분석 결과 요힘빈이 검출됐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다.

/조선일보DB

1989년에는 ‘개소주집’ 같은 건강원들이 요힘빈을 넣은 건강식품을 팔다가 광주지검 특수부에 무더기 적발되기도 했다.

/조선일보DB

‘논두렁 시절’ 사람에게 써도 되는 최음제인 것처럼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요힘빈이라는 이름을 단 불법 약물이 활개를 치고 있다. 최근에는 다이어트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근력운동 관련 섭취제에 포함돼 불법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약처 관계자는 “이번 사건으로 돼지 발정제가 주목을 끌면서, 잘못된 정보가 확산할까봐 우려스럽다”며 “요힘빈은 과량 투여하면 혼수상태·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인체 유해물질”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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