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복하지 않는 프랑스'가 던지는 질문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2017. 4. 2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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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칼럼] 프랑스 대선, 멜랑숑 바람이 연 가능성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4월 23일 실시된 프랑스 대통령 선거 1차 투표 결과가 나왔다. 무소속 중도파 에마뉘엘 마크롱이 23.8%로 1위를 기록했고, 극우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이 21.43%로 마크롱과 함께 결선에 진출했다. 정통우파 프랑수아 피용과 급진좌파 장-뤽 멜랑숑은 각각 19.94%, 19.62%를 득표해 근소한 차이로 3위, 4위가 됐다. 5위는 사회당의 브누아 아몽이지만, 득표율은 6.35%에 머물렀다.

최대 승자는 여론조사기관이다. 부동층이 많아서 이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말들이 많았지만, 1차 투표의 순위와 득표율은 막판 여론조사 결과와 일치한다. 최대 패자는 물론 여당 사회당이다. 집권당인데 10%도 넘지 못했으니 현재 한국의 범새누리당 세력과 같은 처지라 하겠다. 그나마 가까스로 선거보조금 지급 기준인 5%는 넘겨서 일단 파산만은 면했다.

당적도 없는 40대 정치 신인과 하원 의석 한 석인 극우정당 대표가 결선에 진출한 것을 놓고 언론은 "새로운 프랑스혁명"이라고까지 평한다. '좌파 대 우파'라는 근대 정치 지형을 처음 탄생시킨 나라에서 전통적 좌우 구도가 완전히 깨졌다는 것이다. 프랑스 정치에서 각각 우파와 좌파를 대표하던 공화파와 사회당이 결선에 끼지 못했으니 과연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달리 볼 수도 있다. 아니, 좌우 구도 해체라는 틀로는 설명이 안 되는 면이 있다. 우선 결선 대결의 한 쪽 축인 국민전선은 '극우' 민족주의 정당이다. 좌우를 넘어서기는커녕 우파 근본주의자들이다. 다른 쪽 축인 마크롱만 사회당 당원 전력이 있는 은행가로서 좌우 경계를 넘나드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대개 마크롱에 우호적인 논자들일수록 좌우 구도 해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보기에 해체되고 있는 것은 좌우 구도라기보다는 기성 양대 정당의 지배력이다. 프랑스 제5공화국의 양대 축이던 드골주의 우파(공화파)와 사회당이 대중의 심판을 받았다. 대중은 이 두 정파 바깥에서 우파(르펜), 중도파(마크롱), 좌파(멜랑숑)를 새로 구축하려는 시도들에 표를 몰아주었다. 결선 결과와 상관없이 1차 투표 결과만으로도 프랑스 정계는 대격변이 불가피하게 됐다.

사회당 몰락과 '극단적 중도파' 마크롱의 부상

좌우 양대 정당의 위기라고는 하지만, 실은 위기의 정도가 비대칭적이다. 공화파의 피용 후보는 그래도 20%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기성 체제의 대변자로서 결선에서 르펜을 상대할 게 기정사실화되던 인물이기에 3위에 그친 결과가 이변이기는 하다. 그러나 부패 스캔들로 지지율이 추락했어도 어쨌든 유력 후보군에서 밀려나지는 않았다. 공화파는 위기에 처하기는 했지만 붕괴한 것까지는 아니다.

붕괴한 것은 정확히 말해 사회당만이다. 그만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과 마뉘엘 발스 총리가 이끈 사회당 정부의 우경화와 무능이 심각했다. 사회당 정부는 대선 공약은 다 내팽개치고 자본의 입맛에 맞게 노동-복지 체제 개악을 밀어붙였다. 덕분에 전통적 좌파 지지층이 돌아섰고, 지지층이 사라진 정당은 체제의 버팀목으로도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사회당의 마지막 카드는 개방형 예비경선 방식의 대통령 후보 선출이었다. 처음에 사회당은 감세와 복지 지출 삭감을 주장하며 무소속 독자 후보로 나선 전 당원 마크롱이나 그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사회당을 탈당한 멜랑숑까지 포함한 '좌파' 예비경선을 제안했다. '범좌파' 간판을 달고 사회당 심판 여론을 피해보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침몰하는 정당의 들러리가 되려는 정치인은 없었다. 게다가 예비경선에 참여한 좌파 성향 유권자들은 사회당 주류가 미는 발스 대신 아몽을 대선 후보로 선출해 통쾌한 일격을 가했다. 아몽은 멜랑숑이 2008년에 사회당을 탈당하기 전까지 함께 당 내 좌파를 이끌던 인물이다. 그런 아몽이 사회당 후보로 나서고 보편적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채택하면서 잠깐 사회당이 기사회생하나 싶었다.

그러나 투표일을 몇 주 앞둔 급박한 정국은 사회당에게 재편과 반격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응급 처치로 당의 왼쪽에 부목을 대자 오른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몽을 내세운 사회당은 좌파 지지층에게 다시 다가갈 수는 있었지만, 체제의 버팀목으로는 자격을 상실했다.

주류 엘리트의 눈길은 다른 쪽을 향했다. 피용이 부패 추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사회당이 갑자기 당명('사회주의')을 정색하고 발음하는 상황에서 무소속 마크롱 후보가 마지막 대안으로 떠올랐다. 올랑드 정부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에 앞장섰으면서도 그런 정치색을 젊고 참신한 이미지로 치장할 줄 아는 마크롱이야말로 최소한 5년간 프랑스 자본주의를 책임질 적임자였다. 누구보다 사회당 주류가 발 벗고 나섰다. 사회당을 임종 직전으로 몰아넣은 장본인 발스는 노골적으로 마크롱 지지를 선언했다.

이제 마크롱이 결선에 진출했으니 최종 당선은 거의 확실하다. 2002년에 마린 르펜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의 집권을 막은 결선투표 시스템이 다시 성공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마크롱에게는 당이 없다. 급조한 선거운동 조직 '전진!(앙 마르슈!)'이 있을 뿐이다. 대선 한 달 뒤에 실시될 총선에서 그는 어떻게 원내 기반을 구축할 것인가?

결국 정계 개편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 마크롱 지지로 모인 기득권 세력의 정강(신자유주의 노동-복지 개악, 단일통화 중심의 유럽연합 유지, 미국 주도 군사동맹 지속)을 바탕으로 새 정당을 건설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첫 번째 재료는 무너진 사회당의 잔해일 것이다. 사회당은 무너져도 사회당 정치인들은 쉽게 살아남을 수 있다. 결선투표제만 빼면 영미식 소선거구제와 다를 바 없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출신 지역 정치인들은 충분히 생존력이 있다. 그들은 간판만 바꾸면 된다. 허울뿐이던 '사회주의'당에서 노골적인 '극단적 중도파'당으로 말이다.

공화파와는 아마도 대연정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강령 차이가 거의 없으니 사실 대연정이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기존의 거추장스러운 '사회주의', '공화주의(혹은 드골주의)' 딱지를 벗어버린 현상유지파의 대결집이라 하는 게 맞다. 좌우 구도의 해체라기보다는 '무늬만 좌파'의 우파 커밍아웃이다.

'프랑스판 포데모스' 멜랑숑 바람

그러나 사회당의 몰락이 곧 프랑스 좌파 전체의 몰락을 뜻하지는 않는다. 진짜 좌파 전통을 이어받은 도전 세력이 이번 대선에서 당당한 한 흐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소속은 좌파당이면서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라 프랑스 앵수미즈)'라는 조직명으로 출마한 멜랑숑 후보가 일으킨 의외의 바람이 그것이다.

멜랑숑은 대선 출마가 이번으로 두 번째다. 2012년 대선에는 '좌파전선' 후보로 출마해서 11.10%를 득표했다. 좌파전선은 사회당 왼쪽의 정당, 정치조직들이 모인 선거연합이었다. 멜랑숑이 속한 정당은 사회당 탈당 뒤에 창당한 좌파당이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과 경쟁하고 있는 좌파당을 모델로 삼아 사회당과 경쟁하고 이들을 대체하겠다는 목표를 내건 정당이다. 하지만 좌파당만으로는 세력이 미약했다. 그래서 공산당, 반자본주의신당 탈당 그룹 등과 좌파전선을 결성해 선거에 뛰어들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멜랑숑은 일찌감치 출마를 선언했다. 그런데 복병이 나타났다. 사회당이 막역한 옛 동지 아몽을 대선 후보로 선출한 것이다. 처음에는 여론조사에서 멜랑숑이 밀렸고, 아몽은 좌파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멜랑숑은 단일화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얼마 안 있어 멜랑숑 지지율이 아몽을 제쳤다. 멜랑숑이 아몽을 앞지를 수 있었던 것은 사회당 몰락의 반사 이익도 있었지만 멜랑숑 측의 치밀한 준비 덕분이기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멜랑숑의 선거운동 조직이다. 2012년과 달리 이 조직은 '좌파전선'이 아니다. 이름만으로는 색깔이 모호한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다.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는 정당도 아니고 정당연합도 아니다. 멜랑숑을 지지하는 유권자라면 누구나 온라인으로 쉽게 가입할 수 있는 조직이다. 40만 명이 넘는 회원 중에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가입한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오프라인 선거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12만 명 정도라고 하며, 다시 그 중 1만5000 명이 열성 활동가라 한다.

어찌 보면 마크롱의 '전진!'과 비슷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전진!'처럼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도 정당보다는 시민운동에 더 가깝지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는 좌파당이나 좌파전선과 단절된 조직은 아니다. 1만5000 명 가량의 열성 활동가는 대부분 좌파당 당원들이거나 좌파전선 내 다른 정당들의 열혈 멜랑숑 지지자들이다.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의 선거 공약도 좌파당이 준비한 강령, 정책을 이어받았다. 급진좌파 정당들이 중핵 역할을 하면서 광범한 시민이 참여해 움직이는 특이한 조직이다.

누구나 여기에서 포데모스의 강한 영향을 느낄 수 있다. 포데모스처럼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도 '우파 대 좌파'가 아니라 '특권층 대 서민'의 대립 구도를 강조한다. 포데모스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특히 청년층 사이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18세~24세에서 멜랑숑은 르펜을 훨씬 앞지르며 30%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다.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는 홀로그램을 유세에 활용하는가 하면 멜랑숑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컴퓨터 게임을 유포해서 이들 세대에 다가갔다. 이 역시 포데모스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또한 이름에서 '좌파'를 뺐다고 좌파 색채를 버리거나 희석시킨 게 아니라는 점도 포데모스와 비슷하다. 멜랑숑의 정책은 2012년에 비해 좌파색이 더 강해졌다. 5년 전에 약속한 복지국가 부활 구상은 이번에도 그대로 이어졌다(장-뤽 멜랑숑, <인간이 먼저다: 좌파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려 하는가?>, 강주헌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그러면서 생태사회주의 지향을 분명히 했다.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탈성장을 추구하는 경제 계획을 약속하는가 하면 핵발전소 철폐와 2050년까지 100% 재생가능에너지 체제 수립을 공약했다. 사회당, 공산당 가리지 않고 핵발전소 지지 입장이 강한 프랑스 좌파에서 이것은 분명 과감한 전환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멜랑숑 진영의 정치 대안이다. 만약 결선에 진출했다면, 멜랑숑 역시 마크롱이나 르펜과 다를 바 없는 처지다. 하원의원이라고 해봐야 좌파전선에 속한 10여 명밖에 없다. 기성 정당들에 대폭 양보하는 타협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떻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을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가 내놓은 답은 시민혁명을 통한 제6공화국 수립이다. 멜랑숑은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총선을 제헌의회 선거로 치르겠다고 약속했다. 제헌의회는 역사적 효력을 다한 제5공화국 헌법 대신 새 헌법을 제정한다. 새 헌법은 21세기 상황에 맞는 보편적 권리 보장을 담을 뿐만 아니라 과감한 정치 개혁의 출발이 된다. 대통령 권한을 축소해 내각책임제로 돌아가고 상원은 폐지하며 하원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로 선출한다.

21세기 정치는 '우파 포퓰리즘' 대 '좌파 포퓰리즘'의 경쟁이라는 주장으로 포데모스에 큰 영향을 끼친 벨기에 정치학자 샹탈 무페는 이런 시민혁명 구상을 '급진적 개혁주의'라 규정하며 높이 평가했다. 기성 정치 문법에 갇힌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전통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 못하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달리 민주주의 지평의 확대를 통해 사회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는 이런 비전을 지구 정치 무대로까지 확대했다. 그래서 유럽연합의 개혁을 요구하고(플랜A) 이게 수용되지 않으면 탈퇴를 불사한다(플랜B)는 입장을 밝혔고, 나토 탈퇴를 못 박았다. 멜랑숑이 약진할 기미를 보이자 주류 매체가 르펜보다 더 위험한 후보라며 비난을 퍼부은 것도 무엇보다 이런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그만큼 유럽연합 내 제2위 국가 내부에서 벌어진 급진좌파의 도전은 지구 자본주의에 실질적인 위협이 됐던 것이다.


▲ 장 뤽 멜랑숑 후보. ⓒ연합뉴스



비슷한 시험을 마주한 프랑스와 한국의 정치

멜랑숑 후보가 상당한 성과를 내기는 했지만, 프랑스 급진좌파가 계속 성장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마크롱 정부가 들어설 경우, 6월 총선에서 사회당이 공중 분해되면서 급진좌파가 진출할 틈이 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선거구-결선투표 방식의 선거제도이기 때문에 3위나 4위 세력에게는 여전히 불리하다. 2012년 대선에서 멜랑숑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도 좌파전선 의석이 10여 석에 그쳤던 경험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이번 대선에서 멜랑숑 바람이 보여준 전망과 가능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프랑스는 좌파의 역사가 너무 오래되고 두텁기 때문에 좌파 정당들의 시야를 가두는 장벽도 높고 단단하다. 사회당이 그래왔고, 공산당이 여전히 그러하며, 트로츠키주의 정파들도 마찬가지다. 멜랑숑은 이 장벽을 넘나들며 좌파 전체의 한계 바깥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 번 성공했다면, 이 성공은 다시 확대 반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마크롱 집권은 기존 질서의 위기를 5년 뒤로 미룬 것에 불과하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가 차갑게 단정한 것처럼, 마크롱은 가면 쓴 올랑드에 불과하다. 올랑드 정권 5년 동안 먹혀들지 않았던 해법이 화면발 잘 받는 마크롱의 얼굴을 내세운다고 해서 성공할 리 만무하다. 위기가 5년 더 농익은 그때에는 지금보다 더 절실하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같은 운동이 필요할 것이다.

프랑스만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선 결과는 거의 정해진 것과 다름없지만, 촛불 정신이 실제 개혁으로 관철될지는 아무도 낙관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처럼 급진적 개혁주의의 방향에서 기성 질서에 도전할 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5월 대선도 이런 세력을 도약시키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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